소설리스트

25화 (25/107)
  • “그런데, 왜 이 눈사람만 입꼬리가 내려갔습니까?”

    앤드류는 한 손으로 턱을 만지며 의문을 표했다.

    “아버지는 늘 이런 표정이니까!”

    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펠릭스를 따라 하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그 모습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북부는 사계절 내내 추워 한번 만든 눈사람은 잘 녹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성 안팎을 오가는 사용인들은 눈사람을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펠릭스가 성을 비우는 동안 엘리아는 매일 정무를 살피며 일을 처리했다.

    현재 북부 상황에 대한 자료와 성 내부 예산에 관련한 공부도 시작했다.

    대부분 앤드류가 도와주긴 했으나, 처음으로 북부의 현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북부에 들어오는 자금 대부분이 제국의 토지확장 전쟁에 참여하거나 내부 반란을 진압하여 받은 돈과 물자였다.

    ‘이건, 제국에 있는 귀족 가문이잖아?’

    세금이라고 적혀 있는 곳에는 영지민들 말고도, 귀족들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엘리아는 단번에 그들이 휴양차 북부에 방문한 귀족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귀족들에게서 걷은 세금에 비하면 영지민들이 낸 세금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당연했다. 영지민들은 밭을 일구거나 용병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북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업에 의존하여 빠듯하게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제국처럼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다면?’

    성사만 된다면 북부의 사정이 크게 나아지겠지만, 제국이 북부의 교역을 통제하고 있어 불가능한 꿈이었다.

    엘리아는 꽤나 복잡한 북부의 사정에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 * *

    북부 성 창밖 환한 보름달이 어둑한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이상하게, 잠이 안 오네.’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엘리아는 침대 위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탁, 타닥. 타다다닥.

    문밖에서 사람들이 서둘러 오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서둘러.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대.”

    사용인의 목소리가 스치듯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서 창가로 달려갔다.

    ‘이 시간에 펠이 온 건가?’

    말도 안 된다고 분명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몸은 이미 한발 앞서 나갔다.

    창문 아래로 상당한 수의 군단이 대열을 맞춰 성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는 아르티젠 북부를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거렸다.

    엘리아는 서둘러 숄을 어깨 위에 걸친 후, 침실 문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나 빨리?’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가자마자 옅은 피비린내가 났다.

    계단을 다 내려가기 전, 엘리아의 시야에 펠릭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앤드류에게 무어라 말을 하더니, 피로 얼룩진 갑옷을 벗어 건네며 1층을 가로질렀다.

    집사 역시 그의 갑옷을 두 손에 들고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피가…….’

    온몸이 피로 얼룩진 펠릭스의 복부 쪽에는 붕대가 엉성하게 감겨 있었다.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던 엘리아는 계단을 오르려는 펠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다, 다친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에 그가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잿빛 눈동자 주위로 옅게 핏발이 서 있었다.

    “아팠다더니, 괜찮나 보군.”

    “당신, 당신 피가 나요…….”

    어떡해, 새어 나오려는 뒷말은 겨우 삼켰다. 그는 묵묵히 계단을 올라와 엘리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나중에 이야기 나누지.”

    그의 말에 엘리아는 떨리는 두 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엉망이라니…….’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그녀의 마음을 옥죄듯 짓눌렀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앤드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엘리아는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님께서 자주 다쳐서 돌아오시나요?”

    “아, 아닙니다. 이번엔 무리하게 서둘러 돌아오시려다가 그런 것 같은데, 매번 이렇진 않습니다.”

    “대체, 뭣 때문에…….”

    “그, 글쎄요.”

    앤드류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그게 미심쩍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눈동자를 굴렸다.

    “앤드류……?”

    “그게, 그러니까. 아! 저는 이만, 대공님의 상처를 치료하러 가야겠습니다.”

    “네? 의원을 부르지 않고요?”

    “너무 늦은 밤이라, 일단 응급 처치만 하고 아침에 부를 생각입니다.”

    “……제가 갈게요.”

    “네. 그럼, 네, 네?”

    당황한 앤드류가 잠시 말을 더듬거렸다.

    “대공님 상처, 제가 치료할게요.”

    “아, 아아.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래 보여도, 상처가 좀 깊어서 보기가…….”

    엘리아는 앤드류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다시금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엘리아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더 단호했다. 앤드류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구급상자는 여기 있습니다.”

    옆에 서 있던 하녀가 나무로 된 상자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엘리아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2층에 있는 그의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아직 다 씻지 못한 건지 방 안에 딸린 욕실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한 걸음씩,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침대 앞까지 걸어갔다.

    ‘예전에는, 혹한의 설산처럼 차갑고 거대하기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복잡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둑했던 창밖으로 희끄무레하게 푸른빛이 들어왔다. 새벽빛이 밝아 오고 있었다.

    벌컥.

    갑작스러운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욕실 문 앞에 펠릭스가 흰 가운만 걸친 채 서 있었다.

    *** “당신이 왜…….”

    엘리아는 그의 물음에 괜스레 구급상자를 뒤적거렸다.

    “상, 상처 좀 보여주세요. 치료하게.”

    무던하게 말을 꺼내려고 노력했으나, 가운 사이로 드러난 그의 근육을 보고 머리카락에 가려진 귓불이 뜨거워졌다.

    “피만 봐도 질색할 것 같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군.”

    한참 동안 움직임이 없던 펠릭스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걸어와 침대 위에 앉았다.

    엘리아는 그 말에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붕대를 꾹 움켜쥐었다.

    “……저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에요.”

    “…….”

    말을 내뱉자마자, 정적이 흘렀다. 멈췄던 손을 움직여 상자에서 약재를 마저 꺼내 들었다.

    “……벗겨 드릴까요?”

    한참 펠릭스의 얼굴과 가운을 번갈아 바라보던 엘리아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펠릭스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스스로 가운을 벗었다. 하체만 가리고 앉은 그가 엘리아를 바라보며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엘리아의 상앗빛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엘리아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탄탄한 복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흉터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새로 생긴 상처는 살이 벌어져 피가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이런, 심하게 다쳤어요…….”

    그 모습에 당황도 잠시 침착하게 상자에 있던 약초를 배 위에 올렸다. 손가락 끝이 뱃가죽에 닿을 때마다 움찔, 몸의 진동이 느껴졌다.

    “당신은 가끔, 제 나이의 여인이 아닌 것 같아.”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묵묵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푸른빛 때문일까, 그의 눈빛이 흐릿한 느낌이었다.

    “그게 무슨……?”

    “사내의 몸을 보고도 덤덤하지 않나. 거리도 꽤, 가까운데.”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깝다 못해 달라붙어 있는 수준이었다.

    “치, 치료를 위한 거니까요…….”

    “……숄이나 올리지.”

    그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고요한 실내에서 그의 마른침 넘기는 소리만 어색하게 들렸다.

    ‘왜, 저러지?’

    엘리아는 조금 의아해하며 완전히 내려간 한쪽 숄을 끌어 올렸다.

    “붕대 감게, 팔 좀 들어주세요.”

    그는 순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붕대를 감으려면 그의 허리를 여러 번 반복해서 끌어안아야 했다.

    한 번 감을 때마다 살갗이 닿는 느낌이 생경해서 더 얼굴이 화끈거렸다.

    쿵쿵, 지금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웠다.

    붕대를 잘 고정한 뒤에야 엘리아는 그와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끝났나?”

    “네.”

    붕대를 다 감은 뒤에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상처 쪽에 닿아 있었다.

    엘리아는 스르륵,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

    “…….”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엘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삼킬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지금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은 건가?”

    “…….”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은 첫날밤을 치렀던 그 날과 조금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그가 엘리아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그의 입술이, 무방비하게 벌어져 있는 입술과 맞닿았다.

    축축한 혀가 아랫입술을 훑으며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엘리아는 몸이 굳어 잠시 숨을 멈추었다.

    곧이어 진득하게 훑어 내리던 입술이 떨어졌다. 찰나 같은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