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07)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잔잔했던 마나가 파도처럼 출렁이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마나가 다시 회복되면 몸이 더 괜찮아지는 거 아니었나?’

엘리아는 속절없이 감기는 눈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몸이 또 한 번 휘청이며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눈앞이 보이지 않아서 어디로 넘어지는 건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는 것?

바닥으로 추락했지만 무언가 몸을 받치고 있어 강렬한 통증은 없었다.

사람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마님! 도련님!”

유리와 하인들이 비명을 지르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엘리아는 자신을 받치고 있던 무언가가 제레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리아 님, 아파요?”

눈물 섞인 목소리에 그녀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려고 노력했다.

누군가 엘리아의 몸을 부축하며 옮겼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내내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레미 내 아이야! 쉬, 금방 괜찮아질 거야.’

분명 그렇게 말을 내뱉고 싶었는데,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캄캄했던 눈앞에 이제는 푸릇한 빛이 보였다.

* * *

이틀이 지나서야 푸르던 눈앞이 깨끗하게 보였다.

성에 다녀간 의원은 도무지 증상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야. 이곳은 이능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수긍을 하면서도, 이능을 잘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눈이 이상해요…….”

엘리아는 울상인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앤드류와 유리 그리고 제레미가 한곳에 모여 엘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성 사람들이 죄다 마님의 안부를 묻고 갔습니다. 다들 이리 걱정하니, 제가 어떻게 자리를 비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 그랬나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 그리고 대공님께 서신도 보내놨습니다.”

엘리아는 잠시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몹시 놀란 얼굴이었다.

“그 사람에게요……?”

그녀의 반응에 앤드류가 잠시 당황하다 말을 이었다.

“네! 북부에 일이 생기면 즉시 보고하는 게 제 의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먼 곳에 있는데, 괜한 걱정을 끼칠 수 있잖아요.”

엘리아는 무안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는 앤드류를 살짝 나무랐다.

“……이미 그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죠. 다들 정말 괜찮으니까, 어서 볼일 보세요.”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요. 안 그래도 몸 약한 마님께 험악한 북부가 얼마나 힘들지…….”

유리가 울먹거리며 대답하자, 앤드류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하께선 일평생 아무리 급한 소식에도 서신을 보낸 적이 없었는데, 회신하신 걸 보면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는…….”

“어머나, ‘그’ 대공 전하께서 답을 주셨단 말이에요?”

“그렇지, ‘그’ 대공 전하께서 그랬네.”

엘리아는 유리와 앤드류의 만담 같은 대화를 듣다못해 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신경도 쓰이시겠죠. 본래 다정한 분이잖아요.”

엘리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유리가 ‘다, 다정이요……?’라고 중얼거리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대공비 전하께는 다정하시지요. 암. 그렇지 않았다면 서신 내용이 극진하게 보살피라는 말뿐이겠습니까.”

팔짱을 낀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마님 한정 다정한 대공 전하, 참 로맨틱해요!”

어느샌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설레발치는 유리의 모습에 엘리아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간 묘하게 반복되는 상황에 엘리아는 난감하기만 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틀 동안 꼼짝도 못 하게 했지……. 펠릭스의 명 때문이었나.’

“하아, 전 이제 좀 누워서 쉴게요.”

엘리아가 모든 걸 포기한 채 중얼거렸다.

앤드류와 유리는 그제야 상큼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 후,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여기 있어도 돼요……?”

조심스러운 아이의 목소리에 엘리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레미는 기쁜지 눈빛에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입술을 말아 물며 애써 기쁨을 감췄다.

“아직도 아파요……?”

“아니, 다 나았단다.”

“피, 거짓말.”

엘리아를 유심히 바라보던 제레미는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엘리아가 몸을 일으키며 두 팔을 벌렸다.

“봐, 멀쩡해 보이지?”

“어어? 움직이면 안 돼요!”

아이는 깡충깡충 뛰면서 얼른 엘리아의 팔을 내리려 노력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엘리아는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호호호, 정말 멀쩡하다니까.”

그녀의 말에도 아이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픈 사람은 누워 있는 거랬어요!”

아이가 심각한 얼굴로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또 엘리아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나는 사랑받고 있구나.’

아이의 모든 행동에서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제레미, 정말 다 나았어. 얼마나 건강한지 보여줄까?”

“어, 어떻게요?”

아이의 눈이 예쁘게 반짝거렸다. 엘리아는 씩, 웃고는 제레미 손을 꼭 붙잡고 바깥으로 나갔다.

*** 곧 봄이 다가오는데도 바깥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눈송이가 북부의 얼어붙은 땅 위로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봐, 이렇게 걸어도 멀쩡하잖아. 이제 걱정하지 않을 거지?”

“무, 무리하면 안 된댔는데…….”

아이의 말에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새하얗게 빛이 나는 눈을 맨손으로 뭉쳤다.

눈을 만질 때마다 손끝이 얼어붙어 새빨갛게 물들었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좋은 생각이 났어. 내가 눈사람을 완성하면, 더는 걱정하지 않기로 약속하자.”

뭉친 눈이 살짝 커졌을 때쯤, 놀 생각에 벌써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던 아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엘리아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 눈사람은, 대공님이야.”

“아버지요?”

“그래. 그다음은, 제레미.”

“……그다음은요?”

제레미의 물음에 어느샌가 추위에 새빨개진 얼굴로 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 다음이 나. 어때?”

제레미가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만들래요!”

“좋아! 시작해 볼까?”

두 사람이 눈사람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사이 엘리아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려 다시 방문한 유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텅 빈 방을 마주했다.

그땐 이미 북부 성문 앞에 제레미보다 덩치 큰 눈사람 두 개와 작은 눈사람 한 개가 놓여 있는 상태였다.

“다 됐다!”

아이가 눈이 묻은 손을 털어내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앤드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신다! 여기!”

유리도 헐레벌떡 쫓아와 엘리아의 몸을 살폈다.

“아이고, 쓰러지셨던 분이 왜 이러고 계세요.”

“아, 언질이라도 하고 갔어야 했는데……. 미안.”

엘리아는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며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다들 뭐라 하진 못하고, 그저 황망히 눈사람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이건 대공님이십니까?”

맨 앞에서 팔짱을 낀 앤드류가 눈사람을 품평하듯이 빤히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눈사람은 오랜만이네요.”

유리는 눈사람 셋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싱글벙글 뿌듯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맞아! 앤드류. 이건 아버지고, 이건 나고, 이건 엘리아 님이야! 예쁘지?”

천진한 아이의 질문에 앤드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제레미 님께서 이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은 또 처음 보네요.”

“처음이요?”

“네. 항상 성안에서만 계셨습니다. 바깥에 거의 나오지 않으셨지요.”

“하긴, 이곳은 제레미의 또래가 거의 없군요?”

“그렇습니다.”

엘리아의 물음에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도 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제레미만큼은 친구를 몇 명쯤 사귀었으면 했다. 아이는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을 이곳에서 충분히 배웠지만, 그래도 언젠가 또래들과 함께 아카데미에 적응해야 했다.

‘제레미의 생일 연회가 꽤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아…….’

아이는 추위에 볼을 빨갛게 물들이면서도 실룩거리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엘리아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작고 앙증맞은 두 손을 꽉 잡아주며 물었다.

“춥지? 들어갈까?”

문득, 뒤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뒤를 돌아보니, 유리가 어디선가 나뭇가지를 꺾어 왔다.

“세상에, 이걸 들고 온 거야?”

“그럼요! 한번 하는 거 제대로 해야죠!”

형체만 있던 눈사람들을 나뭇가지와 작은 풀잎으로 꾸미자, 제법 사람의 형태가 갖추어졌다.

아이의 환한 웃음소리에 모두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

엘리아는 이 순간, 눈물이 나올 것처럼 행복했다.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북부가 온전해서 행복했다.

‘이 순간을 지키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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