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이 귀여워 여자는 눈에서 수없이 하트를 쏘아대며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 * *
엘리아는 제레미의 작은 손을 꼭 잡고, 출정을 떠나는 북부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없어야 할 텐데…….”
“…….”
엘리아의 근심 어린 말에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제레미도 아버지가 출정을 떠나는 게 걱정이 되는구나.”
“…….”
“우리 모두를 위해 가는 출정이라 힘들어도 대공님을 잡을 수가 없네.”
안타까운 시선이 여린 아이의 얼굴을 보듬었다.
“……알아요.”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제레미는 정말 어른스럽구나. 이번에 돌아오시면 우리 대공님과 시간을 많이 만들어보자.”
“……맨날 바쁜데.”
“응?”
“아버지는 나랑 놀아주지 않는대요.”
“이런……!”
엘리아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자 아이는 얼굴을 옆으로 팩 돌려 버렸다.
“잘 보러 오지도 않으시는걸요.”
“오! 제레미. 그렇지 않단다.”
“…….”
“대공님은 제레미에게 관심이 많은걸.”
“거짓말.”
그녀의 이야기에 아이는 골난 목소리로 한쪽 다리로 눈밭을 헤집기 시작했다.
아이의 아랫입술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론 대공님께서 제레미를 많이 생각하시던데?”
“……?”
아이는 얼굴을 돌려 커다랗고 순수한 눈망울을 끔벅거렸다.
“항상 나랑 제레미 이야기를 하는 걸?”
“정말요?”
아이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귀여워.’
엘리아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가 독촉하듯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음, 제레미 아팠을 때 대공님께서 무척 놀라셨단다.”
“……!”
“진짜야. 내가 제레미한테 거짓말한 적이 있었니?”
엘리아의 말에 제레미는 눈을 깜빡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봐, 정말이라니까. 검술 수업 방식도 싹, 바뀌었잖아. 전부 대공님께서 결정하신 거야.”
그녀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잘게 흔들렸다.
“……흥! 안 믿어요.”
제레미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자신이 없는 듯한 목소리였다.
“내 말을 믿어줘. 우리 모두 널 사랑하고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있단다.”
그녀의 말에 아이의 통통한 볼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아이는 감정을 감추는 데 서툴렀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행동 하나하나가 선명할 정도로 다 눈에 보였다.
아닌 척해도 상냥한 아이. 제레미는 마치 봄 햇살 같았다. 항상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뭉근하게 녹여 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곧 제레미 생일인데…….’
아이만을 위한 선물을 고심하던 엘리아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제레미에게 봄을 보여줄 수 있다면…….
“무슨 생각 하세요?”
“……북부에 봄이 오면 어떨까, 제레미.”
“봄이요?”
아이가 봄이라는 말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냈다.
“응, 봄. 제레미는 어떤 계절이 제일 좋아?”
“으음, 여름……?”
“여름이 좋니?”
“네. 여름에는 안 추워요!”
아이의 대답에 그녀는 아차 싶었다.
북부는 여름이라고 해도 한겨울보다 조금 덜 추운 정도였다. 사시사철 겨울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북부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사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봄은 모르겠구나…….”
“나, 봄 아는데!”
제국의 따뜻한 봄을 알 길 없는 아이가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그에 엘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 * *
그날로부터 엘리아는 성안에 있는 서재에 살다시피 했다. 이능에 관련한 자료를 찾기 위함이었다.
북부에는 오래된 서적들이 제법 많았다.
“마님, 차를 우려 왔어요. 지금 드시겠어요?”
“고맙구나, 유리.”
“별말씀을요.”
엘리아는 유리가 내온 차를 후루룩, 들이켠 뒤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찾아보세요? 온종일 도서관 밖으로 나오시지도 않고. 도련님께선 벌써 지치신 것 같은데…….”
유리가 두꺼운 책을 펼친 채 꾸벅꾸벅 조는 제레미를 가리켰다. 엘리아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냥, 공부할 게 있어서.”
“어? 이건, 제국어가 아니네요?”
“……맞아. 고대어란다.”
엘리아는 유리의 말을 듣다가 문득 그녀가 제국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제국에서는 귀족 계층이 아니라면 글을 배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글을 익힌 사용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바로 코앞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글을 아는구나? 혹시 공부에 뜻이 있는 거니?”
엘리아의 반응에 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북부 영지민 대부분이 아는걸요? 대공님이 문자를 알아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모두 교육받을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대공님께서?”
“네. ‘글을 모르는 건, 눈이 먼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시면서 가르쳐 주셨는걸요?”
“그, 그 많은 사람을 전부?”
“그건 불가능하죠! 몇몇 사람들에게 알려주셔서 그분들이 다른 분들을 가르쳐 주는 방식이었어요.”
‘나는 왜 이런 것도 알지 못했지?’
엘리아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감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표정이 무서워 그를 외면하기 바빴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얼굴을 맞댈 일도 거의 없었다. 서로 마주치더라도 간단한 인사가 끝이었다.
아르티젠 북부가 휘청일 때, 엘리아와 펠릭스는 그제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북부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참 펠릭스를 떠올리던 그녀는 다시금 책을 펼쳐 들었다. 책에는 창조신과 악신과 관련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책은 고대어로 쓰여 있었지만, 엘리아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어릴 적 세레나의 숙제를 대신 하며 어깨너머로 고대어를 배웠던 게 이럴 때 도움이 됐다.
‘헬리오스의 연대기.’
책은 천상신인 ‘헬리오스’와 악신인 ‘타나토스’의 천계 전쟁으로 시작됐다.
천계 전쟁은 인간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여파로 천상신의 권능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 권능이, 이능…….’
그 이상의 상세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헬리오스’가 ‘타나토스’를 무한한 마나의 힘으로 소멸시켰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었다.
“하아…….”
엘리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깊게 한숨을 내쉬자, 졸고 있던 제레미가 눈을 떴다.
“……끝났어요?”
“응. 제레미, 지루하니?”
“아니요. 그런데, 이 책은 뭐예요?”
제레미는 요즘따라 부쩍 호기심이 늘었다. 엘리아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아닌 척 이것저것 물어보는 모습이 꼭 아기 다람쥐 같았다.
“이 책에 중요한 정보가 있는 줄 알았는데……. 어?”
분명 마지막 페이지인 줄 알았는데, 한 페이지가 더 있었다.
‘뭐지, 종이가 붙어 있었나?’
엘리아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널따란 종이 위에는 딱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προφητικός κράτος ἀναγεννάω.」
분명 속으로 읽은 줄 알았는데, 어느샌가 입 밖으로 문장을 읊조리고 있었다.
‘어어? 뭐지? 글씨들이 왜…….’
엘리아는 조각난 채 떠오르는 글씨들이 재빠르게 하나의 뭉텅이가 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어어……?”
무어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위협적으로 날아든 글씨 탓에 우당탕 뒤로 넘어졌다.
“마님!”
“엘리아 님!”
곧이어 엘리아를 부축하는 유리와 놀란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멍하니 손을 들어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도, 눈알이 빠질 것처럼 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아 님 눈이…….”
제레미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리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토할 것 같아…….’
유리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엘리아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금 휘청거렸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님! 괜찮으세요?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래.”
“엘리아 님!”
유리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역시 물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부축을 받고 있음에도 몸이 휘청이며, 바닥에 쓰러지듯 미끄러졌다.
“의, 의원! 의원을 불러올게요!”
당황한 유리의 외침이 들렸다.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엘리아는 손을 뻗으며 주위를 더듬었다. 작은 온기가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아파요……?”
제레미의 목소리에 엘리아는 가까스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레미…….’
그녀는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