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07)

“내 평생, 다섯 난 아이 몸이 이 지경이 된 건 또 처음 봅니다. 당분간 지나친 운동은 피하셔야 합니다.”

의원의 말에 침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흠. 저는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말씀들 나누십시오.”

“감사합니다.”

“…….”

엘리아의 인사에 의원이 허리를 깊게 숙인 뒤 방을 빠져나갔다. 펠릭스의 손짓에 사용인들도 그 뒤를 따랐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엘리아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색색거리며 잠든 아이의 얼굴에서는 아직도 푸른빛이 맴돌았다.

아이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이마 위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제레미가 무리해서 쓰러지는 일이 빈번했던 걸까.’

착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엘리아 옆에는 펠릭스가 있었다. 그의 낯빛도 그녀만큼이나 어두웠다.

“…….”

그는 제레미가 누워 있는 내내 단 한 마디도 없었다. 터지는 한숨을 꾸역꾸역 참아낸 엘리아가 이내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제레미는 검술 수업이 좋지만 싫대요. 그래서 아이가 수업 때마다 도망을 다닌 거예요.”

“……그래.”

“아이도 알고 있었나 봐요. 더 버티기가 힘들다는 걸. 그래도 끝까지 노력한 제레미가 참 대견하지 않나요?”

엘리아의 말을 우두커니 듣고 있던 펠릭스의 시선이 잠든 제레미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그에게 아이를 지켜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잠깐.”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당신은 수업에,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그의 물음에 돌아선 엘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제 말을 들어볼 마음이 생기셨나 봐요?”

그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이는 며칠이 지나, 몸이 다 낫자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의 수업은 한 시간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뀌어 있었고, 루카스는 아이의 훈련 강도와 횟수 계획 보고서를 다시 작성해야만 했다.

“도련님, 차 좀 드십시오. 오늘 차가 아주 기가 막히게 우려졌습니다.”

“조나단, 이건 차 아니야, 커피야.”

쿠키를 오물오물 먹고 있던 제레미가 손가락으로 잔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어엇.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커피입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드셔야지요!”

“……어린이는 마시면 안 된다구!”

“그, 그렇습니까?”

엘리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쉬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제레미가 쉴 때마다 기사들도 따라서 차도 마시고, 간식도 먹어서 그런지 어색했던 처음과 달리 서로 많이 친해진 모습이었다.

‘나이 차가 꽤 나는데도, 저렇게 대화하는 걸 보면 신기해. 호랑이 앞 다람쥐 같달까.’

후후, 웃으며 흡족해하던 엘리아는 뒤돌아서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제레미를 발견했다.

그에 엘리아가 살짝 손을 들어 인사하자, 아이 빼고 그 뒤에 서 있던 기사단 모두 그에 맞춰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큭, 마님이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셨어.”

“무슨 소리야. 나에게 웃어주신 거라고!”

기사들이 서로의 어깨를 툭툭거리며 서로 자신에게 마님이 눈길을 보냈다고 좋아들 하고 있었다.

“아니 이것들이 마님이 네깟 것들에게 손을 들어주실 리가 없잖아. 봐 지금도 나를 보고 웃고 계시잖아.”

평기사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점잖은 짐버튼도 어느새 눈으로 하트를 쏘고 있었다.

정작 제레미는 얼굴을 붉힌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마님께서 이리 웃는 모습은 또 처음 보네요.”

옆에 있던 유리가 흐뭇한 미소로 엘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조그만 아이 뒤에 덩치 큰 사내들이 서 있으니, 그 모습이 참 기묘하면서도 재밌구나.”

“그렇네요. 처음엔 해적 출신이라고 해서 연무장 근처는 얼씬도 안 했는데, 마님 덕분에 좋은 분들을 알게 됐어요.”

“……다행이야. 루카스가 불만이 가득해 보이긴 하지만, 곧 괜찮아지겠지?”

“그럼요. 기사단장씩이나 되어서 배포가 그리 작아 쓰겠어요?”

유리의 말에 엘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참 좋을 텐데.’

루카스는 모두 간식을 먹고 차를 마시는데도 저 멀리서 혼자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뭔가 낙담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린 엘리아는 살며시 그에게 다가갔다.

*** “……차 안 드시나요?”

엘리아의 목소리에 루카스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괜찮습니다.”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하아. 그냥, 절 내버려 두십시오.”

그가 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

엘리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며 일을 열었다.

“저 일방적으로 행동…….”

“어린아이를 교육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네?”

“제가 조금 지나쳤던 것도 같습니다.”

엘리아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낯선 모습을 보여주는 루카스 놀란 듯 쳐다보았다.

“아,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이것도 뭐 다 핑계에 불과한 말이긴 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고마운걸요. 불쾌해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아의 말에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이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민해 주는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에요.”

엘리아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왜 또, 연무장에 있는 거지?”

엘리아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펠?”

“이곳에서 자주 보는군.”

펠릭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게 아이 쉬는 시간에 간식 좀 챙겨주려고…….”

“간식은 됐고 일단 좀 나가지.”

그녀는 또다시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며, 연무장 바깥으로 나와야만 했다.

제레미와 기사단, 하녀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펠. 좀 멈춰봐요.”

조금 걸었는데도 속도가 너무 빨라서 숨이 찼다. 분명 점점 몸이 회복하고 있는 상태인데, 그의 속도는 여전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잘 들어, 연무장은 앞으로 출입 금지야.”

“네? 왜죠?”

눈을 찌푸린 채 묻는 엘리아에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뭔가를 생각하는 듯 그가 엘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훈련에 방해되니까.”

“그렇지만, 저는 쉬는 시간에 방문했어요. 루카스에게도 충분히 말을 전해뒀고요.”

“…….”

“무엇이 문제인가요.”

엘리아는 펠릭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당히 물었다. 연무장에서만 볼 수 있는 제레미의 또 다른 모습을 이대로 놓칠 순 없었다.

“당신은, 그 시선들이 전혀 안 느껴지나?”

안 그래도 충분히 가까운 거리인데도 그가 엘리아 쪽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어, 떤 시선을 말씀하시는지…….”

당황한 엘리아가 살짝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이렇게 뚫어지도록 당신을 보던데, 그게 안 느껴진다고?”

훅, 그의 진한 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급격히 가까워진 거리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쳐다본다는 거지?’

복도 한복판, 가까운 거리에 서서 서로를 관찰하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니, 조나단이 키는 조금 작아도 근육은 더 낫지.”

“아니라니까 그러네. 루카스 님이……. 헉!”

연무장 문을 열고 나온 유리와 페니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반응에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했고, 펠릭스는 덤덤하게 서 있었다.

“그, 저, 저희는 아무것도 못 봤으니, 하시던 일 마저 하세요!”

유리가 그렇게 소리치더니, 페니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갔다. 급히 가던 중 유리는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벌떡 일어나 빠르게 사라졌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엘리아는 유리를 보며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저러다 또 넘어지겠네…….”

엉뚱한 그녀들의 모습에 미소 짓던 엘리아는 어느덧 제 얼굴로 쏟아지는 펠릭스의 끈질긴 시선을 느꼈다. 엘리아는 눈치를 보듯,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웃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안 되겠군.”

“네……?”

“출입 금지이니 그렇게 알아.”

“아니, 펠.”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뒤돌아서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왔다가 가는 그 뒷모습에 엘리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내 웃는 모습이, 이상한가……?”

한참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혼자서 중얼거리던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정말.’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저만큼 멀어져 있는 게 지금의 펠릭스였다.

“하아…….”

차라리 마흔셋의 펠릭스가 더 알기 쉬웠던 것 같기도 했다.

벌컥.

곧이어 연무장 문을 열고 제레미가 나왔다.

문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엘리아의 모습에 제레미는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사답게 점잖게.

“끝났니? 어서 이리 오렴. 씻고, 함께 식당에 가자.”

아이가 그녀의 부탁에 마지못해 따라간다는 듯이 그녀의 소맷자락을 살포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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