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07)
  • 곧 엘리아의 우뚝 솟은 콧날과 앙증맞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감겨 있는 눈꺼풀에선 속눈썹이 풍성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간, 저 작은 입술과 커다란 눈이 함께 호선을 그리며 웃던 때가 떠올랐다.

    ‘이능이라니…….’

    펠릭스는 복잡해진 마음에 거친 숨을 내뱉었다.

    가녀린 손목과 발목, 그리고 허리가 눈에 띄는 여자였다. 저 몸에서 그 힘이 어떻게 나오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펠릭스는 여자에게서 눈을 뗐다. 때마침 마차가 멈추었다.

    펠릭스는 여자가 깨어나지 않자 머리를 받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마중을 나온 앤드류는 마차의 문이 열리지 않자 큼큼, 목을 풀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전하,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앤드류가 마차 문을 열자 펠릭스는 슬쩍 손을 거두었다. 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여자의 얼굴이 허공 아래로 떨어졌다.

    “엇?”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엘리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엘리아가 의아한 낯으로 눈앞의 펠릭스를 바라봤지만, 펠릭스는 앤드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먼저 갈 테니, 아이와 부인을 깨워서 방으로 안내해.”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의 침착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고요하게 울렸다. 의아해하며 바라보던 앤드류가 곧 싱글벙글 웃음 지으며 짐짓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펠릭스는 마차를 빠져나와 성안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 * *

    “제레미 님!”

    “도련님!”

    북부 성 사람들이 검술 수업 시간에 또다시 사라진 제레미를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엘리아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잔가지 가득한 풀숲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엘리아는 금세 아이의 아담한 뒷모습을 찾아냈다.

    가까이 다가서니 아이는 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남들이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제레미…….”

    “쉿, 아직 안 지나갔어요.”

    아이는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최대한 조용히 속삭였다.

    “분명 검술 수업이 싫지만 좋다고 하지 않았니?”

    “그럼요. 싫지만 좋아요.”

    “근데 대체 왜 또 도망 다니니……?”

    “좋은데 싫기도 하니까요!”

    “그렇구나. 그런데 벌써 한 달째인데, 괜찮을까?”

    엘리아의 말에 아이의 어깨가 들썩이며 떨렸다. 걱정이 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치만, 루카스가 무서운걸요.”

    “그래, 그때도 그랬지. 왜 싫은 거니? 정말, 널 때린 건 아닌 거지?”

    엘리아는 아이에게 다시금 물으면서도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알기로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루카스 엘라드,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내였다.

    “때리진 않아요…….”

    “그럼?”

    “너무…….”

    “너무?”

    “고지식해요! 음, 데니스가 말하기론 고지식한 거래요.”

    “아…….”

    아이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엘리아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서서 아이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훈련은 좋은데, 루카스는 싫어요!”

    “이런, 그랬구나. 좋아! 그럼 나랑 같이 가볼까?”

    “네? 아니, 난…….”

    “제레미가 멋지게 훈련하는 모습 보고 싶어, 응?”

    엘리아가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엘리아의 손을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고사리 같은 손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아이답지 않게 살짝 까슬한 느낌이 드는 손이었다.

    ‘뭐든 부딪혀 봐야 해.’

    지난 세월을 보내고 이제야 깨달은 것이 있다면, 딱 그거 하나였다. 부딪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

    엘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레미와 걸음을 옮겼다.

    *** 북부 성 안에 있는 연무장은 꽤 크고 넓었다. 바깥이 추워서 따로 내부에 연무장을 지어놓은 듯했다.

    엘리아는 연무장 쪽으로 처음 발을 들였다.

    ‘이곳에 와보게 될 줄이야…….’

    위치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딱히 이곳을 오고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첫 방문인 셈이었다.

    쇠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건, 웃통을 모두 벗은 사내들의 뒷모습이었다.

    “……하아.”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그래도 엘리아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문득, 머리 위로 검은 인영이 졌다.

    루카스 엘라드.

    호밀밭처럼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사내는 대부분의 북부 사람들과 다르게 피부가 하얗지 않고 약간 탄 느낌이었다.

    그의 찌푸린 이맛살 사이로 땀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졌다. 굵직한 눈썹과 입술이 무엇이 불만인지 살짝 처져 보였다.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엘리아를 바로 알아보는 듯했지만, 인사도 생략한 채 용건을 물었다.

    “처음 뵙네요. 엘리아 로이드라고 해요. 아르티젠 북부에 온 뒤 제가 이곳에는 찾아온 적이 없어 그동안 인사도 못 드렸네요.”

    “……네. 안녕하십니까. 대공 부인. 루카스 엘라드입니다.”

    그는 엘리아의 웃음기 섞인 인사에 한 박자 늦게 답하며, 안색을 굳혔다.

    어쩐지 연무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엘리아와 루카스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제레미 수업을 참관해도 괜찮을까요?”

    “참관 말씀이십니까? ……사내들만 있는 곳이라 불편하실까 걱정되는군요.”

    매서운 눈매가 조금은 사납게 일렁였다.

    “다 펠릭스의 충실한 부하들이잖아요. 그런 걱정 하실 필요 없으세요.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물론 부인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 저 녀석들은 아닌 것 같군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기사들이 훈련을 멈춘 채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 어린 기사들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처음 근거리에서 봤는지 얼굴이 발그스름해져 있었다.

    “어머,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수련하시면 되세요. 전 제레미가 궁금해서 왔거든요.”

    그 모습에 엘리아는 조금은 뻔뻔해 보일 정도로 태평하게 말을 던졌다. 물론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제레미의 검술 연습만 구경하고 갈 거예요. 제레미의 멋진 모습이 너무 궁금했거든요. 제레미 보여줄 수 있지?”

    제레미는 엘리아의 말에 부끄러운지 대답 없이 그녀 뒤에 숨었다.

    눈살을 찌푸린 루카스가 아이를 바라보며 단호히 외쳤다.

    “도련님! 적군 앞에서도 그리 숨으실 생각이십니까? 어서 이쪽으로 나오십시오!”

    그의 날카로운 말에 아이는 쭈뼛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엘리아는 달래듯 제레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북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그런 유약한 태도는 버리셔야 합니다!”

    계속되는 호통에 살짝 마음이 상하였다. 아직은 너무 어린아이였다. 어른에게 할 만한 이야기를…….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엘리아가 알기로, 그는 의리 하나만으로 제국에서 지내던 일상을 포기하고 대공과 함께 북부에 정착한 사내였다.

    루카스는 열다섯의 어린 펠릭스와 함께 루프르브 제국의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그런지, 펠릭스가 가장 믿는 기사 중 한 명이 루카스였고, 엘리아 역시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북부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웠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이렇게 독기 가득한 사람이었구나.’

    루카스 역시 펠릭스처럼 나이가 들고 나서야 융통성과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어쩌면 너무 어린 나이에 숱한 전쟁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같은 루틴으로!”

    루카스가 단호하게 말하니, 제레미는 살짝 질린 얼굴로 뛰어나갔다.

    ‘저 작은 아이가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엘리아의 입장에서는 작고 여린 제레미가 한없이 아이 같기만 했다. 그래서 이런 훈련을 꼭 해야만 할까,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는 선이 그어져 있는 넓고 동그란 원 바깥에서 뛰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스무 바퀴.

    한참 속으로 세다가도 엘리아는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위를 올려다보니, 루카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아이를 지켜봤다.

    “점점 느려집니다. 도련님!”

    그가 강하게 소리쳤다. 아이는 그 소리에 놀랐는지 화들짝 처진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다리에 점점 힘이 풀리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땀이 비가 오듯 흐르고 있었다.

    연무장이 실내라고는 하나 춥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디선가 외풍이 부는지 눈만 오지 않을 뿐, 온도는 실외와 비슷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땀을 흘리다니, 아이가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심하잖아.’

    아이는 고작 5살이었다.

    그렇다고 또 섣불리 엘리아가 나서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나는 훈련에 관련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그래서 오늘은 훈련을 그저 지켜보고 있기로 했다. 아이에겐 당장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하아, 하아…….”

    제레미가 연무장 바닥에 쓰러진 채 밭은 숨을 내뱉었다.

    “목검을 드십시오! 대련입니다.”

    톡.

    소리와 함께 나무로 된 검이 아이 옆으로 떨어졌다. 아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데니스, 앞으로 나와!”

    “끄응…….”

    데니스라는 사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울상을 지었다.

    “또 접니까아?”

    루카스가 어그적거리며 움직이는 데니스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

    그는 얼굴 위에 주근깨가 가득 흩뿌려진 사내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눈을 가릴 만큼 길기도 하였는데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유독 작은 덩치의 남자였다.

    언뜻 엘리아와 신장이 비슷해 보였다.

    “하아…….”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제레미 앞에 섰다. 대련이라는 말에 엘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뼈가 다 자라지 않아서 툭, 치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장성한 기사와의 대련이라니. 말이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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