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07)

“아, 아니에요!”

“……괜찮다. 조금만 기다리렴. 곧 따뜻해질 거야.”

엘리아의 의미심장한 말에 아이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쉿. 자, 어서 어머니에게로 가야지. 기다리고 계신단다.”

아이의 어머니는 불안한 눈빛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엘리아도 서둘러 물자가 쌓여 있는 공간에 잠시 몸을 숨겼다.

‘조금쯤은, 괜찮을 거야.’

그런 생각과 동시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푸른 눈동자에 물처럼 빛이 차올랐다. 희뿌연 눈앞이 한참 있다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또렷해지는 엘리아의 시야를 따라, 하늘을 메우던 구름이 걷혀 가고 있었다. 빛이 하나둘, 줄기를 이루며 사람들을 비추었다.

아르티젠 북부에선 거의 매일 눈이 내렸다.

처음 보는 광경에 주민들은 이게 무슨 일이냐며 수군거렸다. 아무도 엘리아가 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됐다…….”

일을 마친 엘리아는 곧장 제레미에게 향했다. 제레미는 하늘을 바라보며 신기한 듯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펼쳐 내리쬐는 한 줄기의 햇빛을 잡듯이 움켜쥐었다.

바람이 온기를 머금고 엘리아의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뒤흔들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제레미의 녹안이 반짝거리면서 엘리아를 비추었다.

“예, 뻐…….”

“그래. 하늘 참 예쁘지?”

“아, 아아. 네에.”

엘리아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던 제레미가 이내 말끝을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엘리아는 피식 웃으며 맑아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옷에 묻은 얼음 조각들은 이미 녹아내린 뒤였다.

빛은 잠시 후 사라졌다. 먹구름이 다시 하늘을 뒤덮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이 정도가 한계네.’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눈이 묻은 아이의 옷이 마른 것 같으니 이 정도면 된 듯싶었다.

“제레미, 할 말이 있단다.”

“……뭔데요?”

제레미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너를 혼낸 건, 미워서 그런 게 아니야.”

“……그럼요?”

“가끔 어떤 사람이 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그래서 그 사람이 잘됐으면, 하고 혼낼 때도 있단다.”

“음, 왜요……?”

제레미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아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런 거야.”

“……사, 사, 사랑이요?”

아이가 고개를 숙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엘리아는 허리를 굽히고 그런 아이를 두 팔 벌려, 꼭 안아주었다.

“그래, 사랑.”

“……거짓말.”

아이는 안긴 그대로 웅얼거리며 고개를 휘저었다. 부드러운 아이의 머리카락이 볼을 연신 간지럽혔다.

그 모습조차 귀여워, 엘리아는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던 마을 사람 모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작 엘리아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그대인가?”

“네? 그게 무슨…….”

고요한 마차 안, 갑작스러운 펠릭스의 말이 정적을 깼다. 제레미는 엘리아의 무릎을 베고 이미 잠이 들었다.

“아까, 우연히 당신 눈을 봤어.”

“…….”

“푸른빛이 흐르더군. 이능이 있었나?”

엘리아는 빠르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계속해서 그녀와 눈을 맞추는 끈질긴 시선만 없었다면,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뭐라 둘러대도 소용이 없겠어.’

펠릭스가 이렇게 빨리 눈치챌 줄은 몰랐다. 일반 사람은 기이한 경험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이능의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황실에서 이능 보유자들을 많이 봤었겠지…….’

엘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맞아요. 아카데미에 가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날씨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거예요.”

“후작은 왜 그대 이능을 내게 숨긴 거지?”

“모르니까요.”

“뭐?”

“아버지는 제게 이능이 있는지조차 모르신다고요.”

“아버지라는 작자가,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그는 살짝 화가 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며 엘리아의 귓가에 울렸다.

“아버지는 저를 싫어하세요. 아, 싫어한다기보다는 관심이 없으세요.”

엘리아는 두 눈을 똑바로 뜨며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정한 말투에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확답을 주고 싶었다.

“말을 했으면, 후작이 아카데미에 보냈겠지.”

“후작 부인께서 이능의 존재를 아셨어요. 그분은 제가 아카데미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황실이 이능을 숨겼다는 사실을 알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제가 행복해지는 게 싫어서일 거예요…….”

정말 모든 말이 다 사실이었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되기까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 후작은 북부로 시집간 엘리아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단 한 줌의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도록 깨달았다.

“제 이능이, 당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것만큼은 믿어주세요.”

“……그래.”

그렇게만 말하고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 가족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부끄럽네요.”

엘리아는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려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럴 것 없어.”

“네……?”

“움츠러들 것 없다고.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나와 폐하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잖나.”

그의 말에 엘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다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펠릭스의 고백에 엘리아는 안도감을 느꼈다.

‘좀 더 의심할 줄 알았는데…….’

펠릭스는 힘이 있는 자를 경계했다. 어쩌면 10년간 거의 홀로 북부를 지켜 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갖춰진 기사단도 없었다고 했다. 북부는 거의 무법 지대나 다름이 없었다. 북부 영지민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건, 모두 펠릭스의 노력 덕분이었다.

“감사해요.”

“뭐가?”

“그냥, 이해해 주셔서…….”

엘리아의 말에 펠릭스는 한참 고심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이능은, 아주 잠깐 가능한 건가? 순식간에 다시 추워지던데.”

“네. 지금은 아주 잠깐뿐이에요. 제한도 많고…….”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엘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흐음, 그렇군. 아무리 그래도, 그 이능은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어. 여기도 제국의 눈이 있을 테니.”

“…….”

그녀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아이의 분홍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이는 새근새근, 붉고 통통한 입술을 살짝 벌리며 잠들어 있었다.

곤히 잠든 모습을 봐서 그런 걸까. 이능을 사용한 탓일까. 그녀 역시 잠이 쏟아졌다.

‘아,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한창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면 안일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엘리아는 몇 번이고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그냥 자. 깨울 테니.”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스르륵 몸에 힘이 풀렸다.

엘리아의 벽안이 눈꺼풀 속으로 숨어들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고개를 따라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사이 좋게 잠든 엘리아와 제레미의 모습에 펠릭스의 시선이 얼마간 머물렀다.

덜컹, 덜컹.

“하아…….”

엘리아를 앞에 둔 펠릭스는 손가락 끝으로 미간을 짓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나를 아는 듯한 저 눈빛이며, 가끔 내뱉는 말과 행동. 그리고 이능까지…….’

모든 걸 봤을 때, 여자는 그가 세운 경계 대상 범주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경계와 의심보다 측은한 마음이 더 앞섰다.

‘많이도 힘들었나 보군…….’

마차의 움직임을 따라, 여자의 금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꾸벅꾸벅.

곧 창문에 머리를 박을 것처럼 고개가 허공 위로 살짝씩 움직였다.

덜커덕.

순간 마차가 눈길에 미끄러졌는지 크게 휘청거렸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길이 상당히 미끄럽습니다!”

바깥에서 마부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가지.”

잠시간의 정적 후 대답이 나왔다.

“그러겠습니다!”

마부가 곧장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커다란 손에는 여자의 작은 머리가 기대어 올려져 있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앞섰다.

‘대체 이 여잔 뭐지?’

그녀는 잠결에도 제레미를 신경 쓰고 있는 듯 아이의 몸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자가 혹시나 깨진 않았는지 살폈다. 다행히 눈꺼풀이 움찔했을 뿐, 깬 것 같진 않았다.

제레미 또한 그 곁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하아…….”

가는 길 내내 그의 한쪽 손은 여자의 베개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엘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금발이 무릎까지 내려와 제레미의 얼굴을 살짝씩 간지럽혔다. 그게 잠을 방해하는지 아이가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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