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집을 비울 때는 항상 해야 할 일이 없나 확인하잖아요. 그런 건가 해서요.”
엘리아가 이런저런 말로 둘러대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펠릭스는 성큼, 엘리아 앞으로 다가섰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엘리아의 눈에 보이는 건, 타는 듯한 잿빛 눈동자였다.
사람을 꿰뚫는 듯한 눈빛.
“……가끔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 착각이겠지?”
“네. ……착각이죠.”
착각이 아니었다. 엘리아는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다가선 사내를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그와 16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으니까.
“……수상하군.”
엘리아는 펠릭스의 낮고 탁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둘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서,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저는 그저, 예전부터 아름답다고 유명했던 북부가 좋았을 뿐이에요. 그리고 척박했던 곳을 이만큼 일궈 온 당신을 항상 존경해 왔어요…….”
‘빈말은 아니니까.’
“이곳을 함께 지키고, 또 성장시키고 싶어요.”
‘그래. 언제까지고, 함께…….’
엘리아는 그에게 최대한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
모든 것을 말하기에 지금은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고, 아직 모두와 제대로 된 친밀감을 쌓지도 못했다.
“제국에서, 북부에 관련한 이야기를 들은 건가?”
“네. 이곳은 언제나 소문이 무성해요. 척박하지만, 아름답다고.”
확실히, 북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귀족들도 종종 이곳으로 휴양차 방문했다.
설산은 물론 사시사철 내리는 눈이, 성 외곽을 둘러쌀 때 풍기는 신비로움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시기쯤인가. 경관을 즐기는 귀족들에게서 재화를 얻어, 북부가 그나마 살 만해졌지…….’
한참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엘리아는 펠릭스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면 그는 두 걸음 다가왔다.
“저, 펠……?”
“……이상하군.”
“네?”
펠릭스가 엘리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푸른빛이 서린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담아냈다.
참다못한 엘리아는 그를 손으로 살짝 밀어내며 얼굴을 붉혔다.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이게 그저 존경의 눈빛이라고?”
“……?”
“이 눈빛은…….”
그는 그녀를 벽으로 내몰다 못해, 점점 몸을 엘리아 쪽으로 기울였다.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엘리아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숨을 멈추었다.
펠릭스의 눈에는 전에 본 적 없는 이채가 감돌고 있었다.
*** “펠. 당신, 괜찮은 거예요?”
엘리아가 그의 눈빛을 살짝 피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펠릭스는 서둘러 제 몸을 물렸다.
“……아, 내가 잠시…….”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펠?”
“……그렇게 관심이 많다면, 함께 시찰을 나가도 좋아.”
“정말요? 저도 함께 가도 될까요?”
“……그래.”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엘리아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펠릭스는 어느샌가 밝아진 엘리아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레미랑 대화할 기회도 생기고, 북부도 살펴볼 좋은 기회야.’
머릿속에는 이미 모든 계획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럼 준비하고 나오도록.”
“네, 감사해요.”
그가 먼저 식당 문을 나섰다. 서둘러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얼어 죽기 싫으면, 따뜻하게 입도록 해.”
문을 통해 나갔던 그가 다시 돌아와 그녀를 돌아보며 툭, 말을 던지고 나갔다.
그의 행동에 엘리아는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냥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나오라고 하면 되는데…….’
한결같은 그의 모습에 엘리아는 터지는 웃음을 구태여 참지 않았다.
‘처음엔 못된 말만 골라서 하는 저 모습이 싫었는데.’
엘리아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처음으로 북부에 왔을 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항상 펠릭스와 제레미에게서 도망쳐 다녔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도 그리 살갑지 않았었다.
지금의 엘리아는, 펠릭스와 제레미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도 준비해 볼까?”
엘리아는 전보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식당을 나섰다. 작은 창밖으로 눈이 펑펑 흩날리고 있었다. 복도에 서니, 입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제레미와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분명 사지가 떨리는 추위였는데도, 엘리아는 어쩐지 춥지 않은 것만 같았다.
* * *
엘리아는, 조금 난감한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두 부자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펠릭스는 팔짱을 낀 채로 멍하니 바깥만 쳐다보고 있었고, 제레미는 뚱한 표정으로 내내 볼을 부풀리며 앉아 있었다.
덜컹, 덜컹.
말들이 푹푹 패는 눈길에서 한껏 달리지 못한 탓에 마차가 계속해서 덜커덕거렸다.
눈치를 살피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 정말 아름답네.”
마차 바깥 풍경은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나무로 지어진 아담하고 견고한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지붕이 일부러 하얗게 색감을 맞춘 것처럼 똑같았다.
마을 외곽에는 아르티젠 영지라고 안내판이 걸렸다. 안내판에는 아르티젠을 상징하는 설산과 눈꽃이 그려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 주변으로 마을 주민들이 몰려왔다.
다들 하나같이 밝은 표정들이었다.
“대공님께서 납셨다!”
“아이고, 이런 추운 날에도…….”
아이들과 주민들이 모여서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고, 모두 마차에서 내려왔다.
펠릭스는 언제나처럼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었다.
일종의 버릇이었다. 그는 눈은 마음의 거울과 같다며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눈을 쳐다보았다.
“필요한 물자는 이쪽 사람들을 통해서 받게. 이번 겨울나기에 축복이 함께하길 바라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는 간단한 인사만 전하고, 뒤에서 물자를 싣고 따라온 이들에게 손짓했다.
펠릭스는 시찰을 나올 때마다 영지민들에게 물자를 전달했다.
북부에선 사시사철 내리는 눈 탓에 풀이 거의 자라지 못해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대신, 불행히도 마물이 있었다. 마물이 설산 밑으로 내려온 적은 없었지만, 척박한 환경에 물자라도 받지 못하면 주민들의 생활은 더 팍팍해질 것이 분명했다.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며 제국에서 들인 곡물과 말린 고기, 그리고 두꺼운 모직을 마을 안으로 옮겼다.
‘안 그런 척해도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늘 확실히 챙겼으니까…….’
엘리아는 펠릭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물자를 나르는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느라 한창 바빠 보였다.
“줄 서!”
펠릭스 옆에 서 있던 제레미가 조막만 한 손으로 제 팔을 걷어붙였다.
아이는 보급받으려 한데 뭉쳐 있는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이들은 제레미를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인지 금세 말을 따랐다.
‘시찰을 나오면서 자주 도와줬던 모양이구나.’
엘리아가 미소 지으며 제레미에게 다가갔다. 혼자 버거워 보이는 느낌에 도울 생각이었다.
“어? 세 번째 대공비다!”
“쉿! 그런 건 조용히 말해야지!”
그녀와 줄 서 있는 아이들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다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너무나 솔직한 반응이었다.
‘뭐, 내가 세 번째 대공비인 건 사실이니까…….’
엘리아는 픽, 미소를 지으며 포대 자루에 있는 빵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자. 양이 많으니, 조심히 들고 가렴.”
그녀의 말에 아이들은 입을 헤, 벌리더니 위아래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 대부분이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많이 춥나 본데…….’
옆을 바라보니, 제레미의 얼굴도 빨갛게 얼어 있었다.
‘음, 잠깐 온기라도 나눠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곰곰이 생각하던 엘리아의 다리에 퉁, 하고 작은 아이가 부딪혔다.
털썩.
고작 허리까지 오는 아이의 무게에도 엘리아는 쉽게 뒤로 넘어갔다.
“……헉! 죄, 죄송해요. 마님.”
“아, 아이고! 애니! 마님께 이게 무슨 짓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기 무섭게,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뛰어나와 용서를 빌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까지 사과할 필요 없어요. 괜찮습니다.”
엘리아는 바로 옆에, 엎드리듯 넘어져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주었다.
“괜찮니? 손이 아주 차구나. 이런, 온몸이 눈투성이네.”
엘리아와 함께 넘어진 아이는 작아서 그런지, 눈에 파묻혔다가 일어난 꼴이 되어 있었다.
“잘못했어요.”
“아니다. 아니야. 자, 눈부터 털어내야지.”
그녀가 아이의 옷에 묻은 눈을 툭툭, 손수 털어주었다.
순간, 아이의 작은 어깨가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아이의 어깨 위로 제 숄을 걸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