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07)
  • 펠릭스는 뒤돌아서기 전 황태자의 얼굴을 한번 응시하고는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 다 먹었어요.”

    식사 내내 뚱한 표정이었던 아이가 엘리아의 드레스 소매를 살짝 집으며 말했다.

    엘리아는 그런 아이의 행동에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전하, 아이 수업 때문에 저희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 식사하시고, 평안한 하루 보내십시오.”

    제레미가 일어서자, 엘리아 역시 따라 일어나며 황태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황태자가 스쳐 지나가는 엘리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 “전하……?”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녀는 손을 빼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야기 좀 나눌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우선 손은 놓아주시겠어요?”

    황태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 싱긋 웃을 뿐이었다. 엘리아의 낯이 점차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어 갈 때였다.

    “만지지 마!”

    찰싹.

    아이의 작은 손이 황태자의 커다란 손을 때리듯이 밀쳤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깜짝 놀란 건지, 아이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을 살짝 떨었다.

    “제레미……!”

    엘리아가 놀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하, 괜찮습니다. 아이가 그럴 수도 있죠.”

    잠시 굳었던 그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짜증 나.”

    “제레미!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아이의 중얼거림에 엘리아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치만 저 사람은…….”

    “제레미. 정중히 사과드려야지.”

    그녀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야만 아이가 잘못을 인지하고, 이런 행동을 다시 저지르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

    한참을 기다려도 아이는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당황한 표정을 짓던 엘리아가 이내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정중히 고개 숙여 황태자에게 사죄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아이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괜찮습니다. 제레미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나 보군요.”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쉽게 용서하시다니? 어젯밤 나와 펠에게 보였던 무례한 모습이 아니네?’

    엘리아는 입안의 여린 볼살을 짓씹으며 잠시 생각했다.

    이내 엘리아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다시 한번 타일렀다.

    “제레미, 폭력은 나쁜 거야. 알겠니?”

    “……죄송해요.”

    제레미는 엘리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황태자에게 건성으로 사과했다.

    아이의 불량한 태도에 엘리아는 재빨리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괜찮습니다. 사과도 받았고, 그리 아프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그렇게 미안하시다면, 함께 나들이 어떠십니까? 미인과 북부의 오로라를 바라본다면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미소 지었다.

    “네……?”

    당황한 엘리아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되물었다.

    그 모습에 황태자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농담입니다. 정말 괜찮으니 더는 아이를 혼내지 마세요.”

    그는 아이의 일은 벌써 잊었다는 듯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아, 이 말을 깜박할 뻔했군요.”

    “네?”

    “당분간 성내에 머물지 못할 것 같아 미리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 방문은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북부에 일이 있어 온 것이라.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아이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부디 무탈하게 지내시길 바랄게요.”

    “하하, 그래요. 그대 역시 무탈하시길 빌지요.”

    황태자가 일어서 정중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엘리아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뒤로하고 제레미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잔뜩 볼을 부풀리며, 팔짱을 낀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엘리아는 무릎을 구부려 제레미와 시선을 맞췄다.

    “제레미.”

    “……네.”

    “오늘 잘못한 거 알지?”

    “…….”

    “응?”

    거듭되는 그녀의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잘못 안 했는데…….”

    “응? 뭐라고?”

    엘리아는 아이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해서 되물었다.

    아이의 분홍 머리카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몰라요!”

    제레미가 고개를 치켜들고, 빽 소리쳤다. 아이의 두 눈에는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제레미?”

    아이는 작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복도로 뛰쳐나갔다.

    “제레미! 그러다 넘어지겠어!”

    쿵!

    엘리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가 미끄러져서 바닥에 엎어졌다.

    “제, 제레미……? 괜찮니?”

    “……아무것도 모르면서…….”

    몹시 화가 났는지 엎어진 아이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리 와. 다치진 않았니?”

    엘리아가 아이에게 다가섰다.

    “싫어요!”

    아이는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벌떡 일어서서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로 다시 달려 나갔다.

    제레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다.

    곤란해 보이는 자신을 도와주려고 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북부의 후계자이니만큼 그에 맞는 예의와 품위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엘리아는 한참 침음을 흘리며 고심했다. 쫓아가서 달래는 게 제레미를 위해서 과연 좋은 일일까.

    “아이는 어렵구나.”

    그중에서도 내 아이는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엘리아의 귓가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펠릭스였다. 그는 식당 문 바깥쪽에 가만히 서서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혼자 그러고 서 있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은 다 끝났나요? 마저 식사하러 오셨군요?”

    “……뭐.”

    뜸 들이며 말하는 그의 태도에 엘리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어서 식사하세요.”

    “……다들 어디 가고 혼자 있지?”

    “……으음. 그게 그러니까…….”

    아까부터 근심 가득했던 엘리아는 그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어차피 그도 알아야 하는 사항이었다. 엘리아는 펠릭스가 아이를 잘 타일러 주길 바랐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네, 그래서 지금 제레미가…….”

    “역시, 내 아이답군.”

    “……네?”

    펠릭스의 말에 엘리아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칭찬해 주지 못할망정, 왜 혼낸 거지?”

    “맙소사, 펠. 진심이에요?”

    “……그래. 당신을 지켜주기 위해 그런 거잖나.”

    “…….”

    엘리아는 잠시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휘청거렸다.

    펠릭스가 그런 그녀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왜 말이 없지?”

    “……아이에겐 적당한 훈육도 필요해요. 전하께서 아이의 무례를 지적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엘리아가 펠릭스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런 모습에 그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일은 없어.”

    “……아무리 전하가 용인한다고 해도 아이 교육상…….”

    “당신은, 아이가 왜 그랬는지 생각해 봤나?”

    엘리아의 말에 펠릭스가 살짝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절 도와주려던 거였죠. 그리고…… 아이가, 전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좋아하지 않는 것에는 늘 이유가 있는 법이지. 어쨌든, 당신도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겠군.”

    “무슨 이유가 있는 건가요?”

    “그건 내가 말할 수 없는 부분이야.”

    그는 이야기하는 내내 담담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엘리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유조차 알려줄 수 없는데,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지?’

    그와 대화를 나누는 엘리아의 마음이 영 좋지만은 않았다.

    말없이 엘리아의 얼굴을 살피던 펠릭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제레미와 함께 시찰을 나갈 거야.”

    “그렇군요. 곧 출정을 떠나시는 건가요?”

    “……?”

    펠릭스의 얼굴에는 작은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인식하지 못했던 엘리아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건 그와 결혼한 지 1년쯤 지나서야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매번 제국으로 떠나기 전 시찰을 나가 북부를 살피곤 했다.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 북부 대공 자리에 오른 그가 이곳에 큰 애착을 두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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