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07)
  •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부인과 못다 한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아, 그렇군요.”

    그들은 엘리아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봤다.

    ***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었는데 다음 기회에 드려야겠네요. 형수님, 다음에 다시 찾아오지요.”

    황태자는 미간을 찌푸린 펠릭스가 재밌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

    엘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엘리아 님…….”

    그때 뒤편으로 졸음 섞인 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레미는 두 눈을 비비며 다가와 엘리아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어머, 제레미?”

    엘리아는 두 사람의 등장에 당황했던 좀 전 상황을 잊어버리고 그들로 인해 제레미가 잠에서 깼다는 것에 살짝 짜증을 느꼈다.

    “다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아이가 낮에 많이 놀랐습니다. 내일 다 함께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차가워진 목소리로 제 할 말만을 내뱉은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문을 닫아버렸다.

    그녀와의 이야기 소유권을 주장하던 두 사람은 꽝 닫힌 문을 바라보며 서로 어색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 * *

    “어? 일찍 돌아오셨네요.”

    앤드류는 음흉한 시선으로 펠릭스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마님과 좋은 시간 보내실 줄 알았는데? 벌써 끝나신 겁니까?”

    “…….”

    앤드류는 펠릭스가 상념에 잠긴 채 말이 없자 고개를 갸웃했다.

    “뭐, 설마 대공 전하께서 체력이 부족하여 급하게 끝나신 건…….”

    “그 입 좀 다무는 게 좋지 않겠나.”

    펠릭스의 말에 앤드류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은 거두지 못했다.

    ‘평소라면 시답지 않은 말이라고 불같이 화를 내셨을 텐데? 차였나?’

    그래서 제 추측이 정말인가, 싶어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정력에 좋은 약재라도……?”

    “……진짜 미친 건가?”

    펠릭스 주변으로 검은 오라가 일렁이는 것처럼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마침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차라 앤드류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며 살기 위하여 바쁜 척을 해야만 했다.

    “앤드류, 쫓겨나고 싶나?”

    “힉.”

    제 주인은 이미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대공 전하! 그런 소리는 섭섭합니다! 여태 10년 동안 이곳에서 노총각 신세로 청춘을 바치고 있는 접니다. 제국과 북부를 오가며 온갖 정보를 얻어 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앤드류는 애써 웃음으로 무마하려 노력했다.

    앤드류가 장황한 설명과 함께 슬쩍 펠릭스의 눈치를 살폈다.

    “글쎄, 비단 그게 나 때문은 아니지 않나?”

    한참 앤드류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이내 앤드류의 맞은편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 그럴 리가요. 하하, 무슨 소릴…….”

    “뚫린 귀가 있으니, 아예 모르진 않지. 제국에서 만난 어느 여인과…….”

    탁탁!

    앤드류가 급히 서류를 정리하며 헛기침을 했다.

    “주군, 이곳에 있는 서류는 제가 싹 다 처리해 두겠습니다! 오늘 밤은 푹 쉬십시오!”

    앤드류의 태세 전환에 픽, 웃음 짓던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 대공의 모습에 앤드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앤드류.”

    “힉, 네.”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제 주인이 침실로 돌아가지 않아 투덜거리던 앤드류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속을 짐작한다는 듯 혀를 차던 펠릭스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네가 보기엔, 대공비는 어떤 사람이지?”

    “음, 글쎄요. 일단 도련님께 지대할 정도로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뭐 다른 건 없나?”

    “다른 거라? 아! 이거 하나는 확실합니다.”

    앤드류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펠릭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뭔데?”

    “전하보단 도련님께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는 겁니다.”

    “…….”

    앤드류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호응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펠릭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나저나 부인께 조금은 관심이 가십니까?”

    “관심?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그을쎄요. 그게 아닌 거 같은데? 뭐, 어떻게 제가 조언이라도 해드릴까요?”

    “하, 무슨 말을 못 하겠군. ……일이나 해.”

    재미있어하는 앤드류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펠릭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처음 아이를 볼 때도 어쩔 줄 몰라 했던 것 같기도 하군.’

    생각해 보면 엘리아는 처음부터 아이에게만큼은 서슴없이 다가가며 따뜻한 미소와 애정을 표현했었다.

    ‘대체, 왜……?’

    복잡한 마음으로 앉아 있던 펠릭스의 앞으로 앤드류가 슬그머니 그의 승인이 필요한 서류 뭉치를 건넸다.

    ‘슬슬 제국으로 갈 시기인데.’

    펠릭스는 주로 루프르브 제국에 병력을 지원해 얻은 자원과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한 귀족들에게서 걷은 세금으로 북부를 꾸려 나갔다.

    영지민들에게 세금을 걷기는 하지만, 그저 형식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안 그래도 생계가 힘든 그들을 착취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출정을 떠날 시기이시군요.”

    한데 뭔가 자꾸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흐음…….”

    체이스 로이드.

    지금 바로 제국으로 가게 되면 엘리아를 그와 같이 있게 해야 하는데 그게 꺼림직스러웠다.

    엘리아 홀로 두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출정도 이젠 지긋지긋하군.’

    루프르브의 황제이자, 펠릭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라페시아 데 로이드’는 전쟁에 미쳐 있었다.

    그는 세력을 확장시키며 끊임없이 제국의 국토를 넓혔다. 그 모든 게 펠릭스와 북부 기사단의 분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앤드류, 루카스를 불러와.”

    “……네. 출정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르티젠 기사들이 하나같이 자유분방해서 루카스 님도 시간이 좀 걸리실 것 같습니다.”

    “알아. 나와 함께 진흙탕을 구른 이들 성격을 왜 모르겠나. 이 주 정도면 될 거야.”

    빡빡한 일정에 앤드류가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 주입니까?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것 같은데…….”

    “그 정도 못 하면, 기사단장 자리 내놓아야지.”

    “이런, 이젠 루카스 님이 가여워 보일 지경입니다.”

    펠릭스의 말에 앤드류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잔소리 말고, 불러오기나 해.”

    “네, 네.”

    펠릭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오늘따라 앤드류의 목소리가 계속 자신을 놀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자, 앤드류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펠릭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앤드류가 짧게 인사를 마치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아, 내일 아침 식사에 참석하도록 하지.”

    펠릭스의 말에 앤드류가 히죽 웃다가 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이고 저렇게 서툴러서야. 아 남자는 힘. 오늘 팍팍 밀어붙었어야지. 하이고 답답한 양반아.’

    앤드류는 펠릭스가 들었으면 정색했을 법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속으로 생각했다. 입 밖에 내고 싶긴 했지만 그의 생각을 한 번만 더 말했다간 정말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 * *

    엘리아는 제레미의 손을 붙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지난밤, 그녀는 아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

    ‘새근새근 잠든 얼굴이 진짜 천사 같았는데…….’

    잠을 자던 제레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닫힌 눈꺼풀 위로 촘촘히 자리 잡은 속눈썹이 새근거릴 때마다 새가 날갯짓하듯이 파르르 떨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이의 오물거리는 입술은 작은 부리를 열어 먹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앙증맞았다.

    제레미의 여러 모습을 이렇게나 자세히 볼 수 있다니.

    엘리아는 이 모든 순간이 벅차고, 감사했다.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게, 신일까? 헬리오스 신께서, 나를 가엾게 여기신 걸까.’

    신의 힘이 아니라면, 16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홀로 결론을 짓던 그녀가 식당 문을 열고, 제레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펠릭스와 황태자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뭐지? 그이는 원래 아침을 먹지 않았을 텐데…….’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제레미와 함께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전하 그리고, 대공님……?”

    “좋은 아침이군요. 배고프실 텐데, 어서 드시지요.”

    “…….”

    황태자가 식탁을 향해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리에 털썩, 앉은 아이는 뭐가 불만인지 볼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어느 때보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펠릭스는 무던한 표정이었고, 황태자는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체할 것 같아…….’

    일어나자마자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앤드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앤드류 휴버트입니다. 식사 중 죄송하지만, 대공님께 급한 서신이 도착하여……”

    펠릭스는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실례하지.”

    “그러시지요, 형님. 많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황태자의 말에 펠릭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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