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볼 위로 미미하게 홍조가 올라왔다.
제레미는 짧은 다리로 금세 방문까지 달려갔다. 발꿈치를 들고 고사리처럼 작은 손으로 문고리까지 덥석 잡아당겼다.
“그…….”
아이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 작게 웅얼거리며 엘리아를 돌아봤다.
“응 뭐라고?”
그 모습이 의아해 살짝 고개를 기울일 찰나였다.
“……엘리아 님이라고 부를게요.”
아이의 뒷덜미와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말? 그럼 이제 술래잡기는 끝난 거니? 마주치면 내가 인사해도 될까?”
“……모, 몰라요!”
아이는 후다닥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쩜 좋아, 너무 귀엽잖아!’
엘리아는 두 손 위로 얼굴을 묻은 채 크게 웃음 지었다.
제레미의 푸릇한 새싹처럼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떠올리던 엘리아는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침대 위에 누웠다.
‘천사 같은 내 아이. 처음부터 이렇게 돌봐줬어야 했는데…….’
제레미를 받아들이기까지 16년이라는 너무 긴 시간을 돌아왔다. 엘리아는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다시는 어리석은 행동 따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직 아픈 건가?”
“……?”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엘리아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펠릭스가 언제……?’
누운 상태 그대로 그를 바라보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민망한 기분에 절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펠? 아니 대공님, 언제 오셨어요?”
“문이 열려 있길래, 잠시 들렀어. ……그보다 그 펠은, 내 애칭인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
“네?”
엘리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펠릭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 근처까지 성큼 걸어왔다.
“술에 취해서도 그러지 않았나. 펠이라고.”
“아, 그게…….”
엘리아는 술을 먹고 혼자 잠들었던 첫날밤이 생각나 부끄러움에 머뭇거렸다.
“……흠, 안 듣는 편이 낫겠군.”
그 모습을 오해한 듯 펠릭스는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당신 애칭 맞는데…….’
그녀는 그 모습에 당황하며 미처 입 밖으로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보다, 아픈 건?”
“아,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방까지 저를 옮겨주신 거죠?”
“…….”
“감사해요.”
엘리아의 감사 인사에도 펠릭스의 구겨진 미간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감사 인사는 됐어. 그걸 바라고 한 게 아니니까.”
“네. 그래도 감사드려요.”
“어쨌든, 당신은 나와 결혼을 했으니까.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엘리아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
‘내가 북부로 온 걸 후회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엘리아가 고개를 들고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흠, 뭐가 아니라는 거지?”
“후회하는 그런 마음 절대 아니라고요.”
엘리아가 당당한 태도로 오해하고 있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리고 펠은, 대공님 애칭이 맞아요.”
엘리아는 그 말을 해놓고,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주로 애칭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편인가?”
날카롭게 들리던 그의 말이 느슨해졌다.
“네? 아, 불편하시면, 대공님이라고 부를게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생각해 보니, 계속 대공님이라고 하는 것도 남들 시선에 좋지 않겠군. 펠이라 부르는 걸로 하지.”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터벅터벅 걸어 문밖으로 나갔다. 적막해진 방 안에 엘리아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폭풍처럼 두 사람이 몰아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엘리아는 침대 위로 풀썩, 몸을 눕혔다.
이전에는 펠릭스나 제레미나 제가 먼저 다가섰던 적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둘 다 까칠하면서도 묘하게 다정했다.
‘먼저 다가서면 이런 반응이구나.’
엘리아는 똑 닮은 두 사람의 반응에 어이가 없는 한편,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아주 조금이지만, 한 걸음 그들에게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엘리아는 청아하면서도 푸른 눈동자를 굴려 잠시 창가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 있는 작은 창은 두꺼운 커튼에 가려져 있었다.
엘리아는 몸을 일으켜 커튼을 활짝 열었다. 창까지 열어젖히자 바람결에 부드러운 머릿결이 어깨를 타고 흩날렸다.
“어느 정도 적응도 했고, 이능을 써도 괜찮을 것 같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엘리아의 입가로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어느샌가 아침이 온 하늘은 여전히 구름에 뒤덮여 있었지만, 그래도 꽤 밝았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땐, 너무 추워서 진절머리가 났는데…….’
북부의 지평선 아래로 가득 쌓인 눈밭이 보였다. 하늘에선 펑펑 함박눈이 쏟아졌다.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참 아름다운 곳이야.’
* * *
“마님, 마님! 일어나세요.”
“으음.”
“일어나셔야 하는데…….”
다급한 유리의 목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유리알 같은 벽안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지금, 몇 시지?”
“아, 아직 아침까지 한참 남았어요. 그런데, 급하게 단장을 하셔야…….”
“단장?”
“황태자 전하께서 대공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북부까지 오셨어요.”
“아, 전하께서 오셨단 말이지…….”
엘리아는 몸을 일으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맘때쯤이었나.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네.’
“준비를 도와드릴게요.”
“그래. 고맙구나.”
하녀들은 새벽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엘리아는 목욕을 마친 후, 드레스를 입으려 했다.
엘리아 앞에 놓인 옷은 북부에서 주로 입는 간편한 드레스가 아니었다.
황실에서나 입을 법한 드레스로 기다란 소매와 치맛단, 심지어 코르셋과 속치마까지 착용한 후에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좀 더 무난한 드레스로 내오겠니?”
북부의 환경을 떠올리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네? 그렇지만…….”
“이런 화려한 드레스는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유리는 엘리아의 말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 뒤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아무리 보여주기식이어도,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라니…….’
생각만으로도 살짝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내 엘리아는 북부에 갑자기 들이닥친 황태자를 떠올렸다.
과거에도 황태자는 결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북부에 방문했다. 당시 그가 북부에 꽤 오래 머물렀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었다.
‘황태자가 아르티젠에 머무는 내내 펠의 표정이 안 좋았지.’
“하아…….”
이제야 조금 추위에 익숙해지고, 관계를 좁혀 가는 느낌이었는데. 원치 않은 상황에 왠지 한숨만 나왔다.
*H**
북부 성 앞, 황태자를 맞이하는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그 행렬의 맨 앞에 선 펠릭스의 안색은 오늘따라 유독 어두웠다.
엘리아는 내내 펠릭스의 표정을 살피면서도 추위에 새하얗게 질린 손을 모으며 몸을 떨었다.
“……추워요?”
아이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엘리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아이를 바라보았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거니? 괜찮단다.”
“거, 걱정하는 거 아닌데.”
아이가 손을 뒤로 모은 채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호호호, 제레미는 춥지 않니?”
“하나두요.”
그래도 곧잘 대답해 주기 시작한 제레미의 모습에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때,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가 북부 성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마차에는 금박으로 황실을 상징하는 날개와 아기 요정들이 그려져 있었다. 요정들은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나팔을 부는 중이었다.
끼이익, 쿵.
마차에서 황실 제복을 입은 노인이 나와 경건하게 허리를 숙였다.
“루프르브 제국의 황태자 체이스 로이드 전하이십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제법 키가 큰 미남자가 마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남자의 짧은 금발과 청회색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티 없이 맑은 피부와 부드러운 입매가 두드러지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황태자가 사근사근 인사를 전했다.
“오랜만이군.”
인사에 답하는 펠릭스의 표정은 전혀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형제라고는 하나, 태양과 그림자 사이처럼 묘한 기류가 흘렀다.
“하하. 오랜만에 뵙는데,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 혹시 언질도 없이 찾아와 형님의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요?”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