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07)
  • “들어가는 건 아닌데요.”

    “음, 제레미 혹시 검술 수업이 싫어서 그런 거니?”

    “……가지 않을 거예요.”

    아이는 얼굴을 다시금 부풀렸다.

    “음, 그럼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그냥, ……루카스 싫어요.”

    ‘루카스라면, 마지막에 제레미와 나를 호위하던 그 기사잖아. 루카스 엘라드.’

    그는 북부 기사단 중 가장 검술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펠릭스와 유일하게 대련하는 사람이었고,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왜 싫을까?”

    “……말 안 할래요. 먼저 가요.”

    “싫은데…….”

    “네?”

    엘리아의 말에 제레미는 당황한 듯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 끝으로 쌓여 있는 눈을 휘저었다.

    “이 추운 곳에 어떻게 너를 혼자 두고 들어가니? 그냥 나도 검술 수업 끝날 때까지 여기 앉아 있지, 뭐.”

    세찬 바람이 불었다. 엘리아는 두꺼운 외투가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춥고, 살짝 어지러웠다.

    “왜 몸을 떨어요?”

    얼마나 멍하니, 아이를 보고 있었을까. 제레미가 고개를 들어 엘리아에게 뭐라 입을 열었다.

    분명 아이의 조그맣고 붉은 입술이 움직이는데, 전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웅얼웅얼.

    천천히 눈이 감겼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춥고 어지러워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제레미가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아이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분명 들렸는데, 정신이 몽롱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훅 하고 익숙한 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펠릭스, ……당신인가요.’

    주변이 살짝 시끄러웠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엘리아는 몸이 허공 위로 붕 뜨는 순간을 다시금 경험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몸이 많이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단단하고 따스한 품이 느껴졌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이미 차가워서, 상대적으로 따뜻하다고 느꼈던 걸지도 몰랐다.

    엘리아는 그 온기를 찾아 품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 * *

    제레미는 새파랗게 질린 엘리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아가 쓰러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풀썩.

    아슬하도록 가냘픈 소리였다.

    “어?”

    제레미가 엘리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엘리아 님!”

    어찌할 바를 모르고, 팔을 잡아 일으키려고 애썼다.

    그때, 눈에 가녀린 손목이 들어왔다.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이, 이건…….’

    제레미는 사람이 이리도 연약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제레미는 아버지를 닮은 건지, 뼈가 튼튼해 한 번도 부러지거나 삔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 님! 엘리아 님! 어쩌지……. 어떡하지…….”

    제레미는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엘리아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덜컥, 겁이 난 제레미는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흐어엉. 일어나 봐요. 내가 잘못했어요. 흐윽. 무서워…….”

    제레미가 울부짖으며 엘리아의 몸을 흔들었다. 이런 상황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때, 주변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제레미는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훌쩍, 살려주세요! 엘리아, 엘리아 님이…….”

    제레미의 울부짖음에 제일 먼저 뛰어온 건 펠릭스였다. 그 뒤로 집사와 하녀들이 따라와 쓰러진 엘리아를 살폈다.

    “……일단 안으로 옮기지.”

    “제가 옮기겠습니다.”

    “됐네.”

    제레미가 펠릭스를 바라보며 울먹이자, 잠시 망설이던 그는 엘리아를 한 손에 들었다.

    “아버지, 흐윽, 엘리아 님, 죽어요? 얼굴이 이상해……. 너무, 너무 새파랗게…….”

    엘리아를 안아 든 펠릭스는 울먹이는 아이의 포슬포슬한 머리카락을 괜찮다는 듯이 툭툭, 쳤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였다.

    제레미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펠릭스의 투박한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곧 멀어지는 펠릭스를 쪼르르 빠르게 쫓아갔다.

    “아버지, 같이 가요!”

    제레미는 제 아버지가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엘리아의 몸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나보다 너무 마르고, 약해…….’

    제레미는 흘러내렸던 눈물과 콧물을 손으로 쓱 닦았다.

    잠시 멈췄던 눈이 꽃잎처럼 흩날리며 떨어졌다. 엘리아의 파리한 안색에도 꽃잎이 스며들었다.

    * * *

    정신을 차려 보니 아이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며 졸고 있었다.

    눈두덩이는 퉁퉁 부어 불그스름했고, 기다란 속눈썹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이런.”

    그 모습이 너무도 애처롭고 사랑스러웠다.

    높은 의자 위에 앉은 아이의 다리가 허공에서 살짝씩 흔들렸다. 고개는 곧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어어, 저러다가 큰일 나겠는데?’

    엘리아가 손을 뻗을 때쯤, 아이의 상체가 무너지듯 침대로 향했다. 엘리아는 아이를 받쳐 들며 조심스럽게 눕혀주려 했다.

    “아.”

    하지만 제레미를 눕히느라 힘을 줬더니, 채 낫지 않은 손목이 울리듯 시큰거렸다. 앓는 소리를 낸 엘리아가 살짝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제레미는 깨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모습은 또 처음 보네.’

    엘리아는 아이의 통통한 볼살에 시선을 던졌다.

    ‘저 말랑말랑한 볼살 한 번만 만져보고 싶은데.’

    후후, 웃던 엘리아가 이내 제레미의 볼을 살짝 꼬집듯이 매만졌다.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우웅…….”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아이가 귀찮다는 듯이 몸을 뒤척거렸다. 그에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손을 가까스로 치웠다.

    “좋은 꿈 꾸렴, 제레미.”

    제레미 옆에 얼굴을 대고 눕자, 갓 짜낸 우유처럼 고소한 향내가 코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아이의 가슴팍 위에 손을 얹고 살짝씩 도닥여 주었다.

    ‘이렇게 해줄 수 있는 날이 오긴 오는구나.’

    엘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방 한편에 자리 잡은 벽난로가 타닥, 거리며 자장가를 대신 불러주는 듯했다.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 엘리아의 눈도 서서히 다시 감기기 시작했다.

    *** 이미 밤이 깊은 시각, 펠릭스는 엘리아의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기를 몇 번 반복한 후에야,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건가?’

    몇 번의 노크에도 답이 없었다.

    의문스러운 생각과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 환자니까, 확인차.’

    고민하던 펠릭스가 이내 문고리를 돌려 살짝 문을 열었다.

    끼이익.

    타닥타닥, 벽난로가 타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붉고 희미한 불빛 너머 침대 위에 두 인영이 보였다.

    그는 잠시 문턱에서 서성이다가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아는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그 품에 안긴 아이의 입가 가득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펠릭스는 두 사람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고 서 있었다.

    ‘단순히 애를 좋아하는 건가? 아무 꿍꿍이 없이?’

    그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느 귀족 가문의 여인이 애를 데리고 잘까.’

    그런 삐딱한 생각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풀어져 있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제레미와 엘리아를 바라보며 침대 곁을 지켰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의 미소가 발길을 내내 붙잡았다.

    ‘정말 이상한 여자야.’

    펠릭스는 벽난로 안의 불쏘시개가 다 타들어 갈 때쯤 방을 나섰다.

    * * *

    제레미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자신의 모습과 똑 닮은 여인이 도닥여 주고, 노래를 불러주는 꿈이었다.

    동시에 희미한 분 냄새와 아무도 밟지 않은 눈덩이 위에 누운 것처럼 푹신한 품이 느껴졌다.

    ‘따뜻해…….’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볼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길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아이가 잠시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눈을 번쩍 떴다.

    “……?”

    “아, 안녕? 제레미, 잘 잤니?”

    엘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떴다.

    “내, 내가 왜…….”

    붉고 통통한 입술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가 말을 더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이 의아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엘리아는 픽,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의 곱슬머리를 쓰다듬었다.

    “피곤하면 이곳에서 더 머물러도 된단다.”

    “……시, 싫어요! 내, 내가 왜 여기서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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