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07)
  • 오랜 세월이 지난 탓에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언니, 가자! 내가 다 준비해 뒀어.”

    세레나가 엘리아의 손을 덥석 움켜쥐며 해맑고 순진한 웃음을 지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믿었는데…….’

    꽃같이 아름다운 아이였다. 그 겉모습에 현혹되어 가시를 품고 있었다는 걸 그 시절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세레나의 방 오른편에 배치된 테이블에는 찻주전자와 찻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엘리아의 다락방보다 몇 배는 넓은 방에 하녀 몇몇이 티 타임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했다.

    “언니는 항상 몸이 약하니까, 내가 특별히 타국에서 공수해 온 찻잎이야.”

    “그러니?”

    “그럼. 어서 마셔.”

    엘리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분홍 꽃잎이 그려진 찻잔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 차는 이미 제 온도를 잃은 지 오래였고, 찻잔조차 돌덩이를 만지는 것처럼 차가웠다.

    ‘옛날이었으면, 나를 위한 네 마음이 고마워서 의심 없이 다 마셨을 텐데.’

    엘리아가 잠시 시선을 들어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세레나는 하녀를 시켜 제 잔에만 뜨거운 차를 새로 우려서 따라 마시고 있었다.

    이제야 보이는 세레나의 본심이 엘리아의 심정을 어지럽혔다.

    달칵.

    엘리아가 마시지 않고 바로 찻잔을 내려놓자, 세레나의 눈길이 사뭇 차가워졌다.

    “……왜 안 마셔?”

    “……그냥. 그런데 이 찻잎을 어디서, 어떻게 구했다고?”

    “응? ……그러니까 아까도 말했잖아. 우리 가문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거, 언니도 알지? 어머니가 특별히 힘써주신 거야. 아, 언니 북부로 갈 때도 챙겨주신다고 했었는데!”

    엘리아는 찻잔에 띄워진 불그스름하면서도 작은 잎사귀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이전의 엘리아였다면 이런 모습에 고마워하며 눈물을 글썽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엘리아는 저 웃음 뒤에 숨겨진 속내를 알고 있었다.

    “나를 지독하게도 싫어하시는 그 어머님께서 직접?”

    예상치 못한 말에 세레나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비쳤다.

    “무, 무슨 소리야. 언니. 어머니가 왜 언니를 싫어해. 아, 그래! 제니. 그것 좀 가져와.”

    엘리아의 말에 세레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제니에게 눈짓을 보냈다.

    “언니도 이거 보면 엄청 좋아할 거야!”

    *** 그녀의 손에는 적색의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이전 삶에서 봤던 것만큼이나 지나치게 화려했고, 지나치게 얇았다.

    “이거 입고 북부로 가면, 완전 대공 부인으로서 체면이 설 것 같지 않아?”

    “하, 세레나, 지금 겨울이야.”

    세레나는 여전히 그녀를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악한 작은 온정에 대해 예전처럼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듯.

    “괜찮아! 긴팔이잖아. 지금 날씨에 딱인걸?”

    “북부는, 여기보다 훨씬 더 춥고, 척박해.”

    엘리아의 말에 세레나는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세레나의 새하얀 뺨 위로 물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언니, 너무 달라졌어. 내가 준 차도 안 마시고, 옷도…….”

    또다시 반복되는 착한 동생 코스프레에 소름이 끼쳤다.

    세레나가 울자, 주변에 있던 하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모는 세레나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비소가 새어 나올 거 같았다.

    곧이어 몇몇 하녀가 서둘러 세레나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녀는 익숙한 듯 받아 들며 눈물을 훔쳤다.

    “세레나. 이제 그만해.”

    “……무슨 소리야?”

    싸늘한 엘레나의 목소리에 당황한 세리나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무슨 소리일까?”

    “……?”

    “참 고마웠었지. 네가 먹다 남긴 오래된 빵도 고마웠고, 유행이 다 지난 것도 모자라 구멍이 난 드레스도 참 고마웠어.”

    “…….”

    “적선하듯 주던 목걸이를 어쩔 줄 몰라 하며 받기도 했고. 참 좋았어. 그때는 그것이 나를 아끼는 너의 마음이라고 생각했거든.”

    지금은 눈에 훤히 보이는데 그땐 왜 몰랐을까.

    “그,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세레나는 후작가 사람 중 엘리아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너의 그 호의 뒤에는 항상 후작 부인의 질책이 따라왔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내가 일부러 그러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언제나 그랬다. 세레나가 엘리아에게 무언가를 주면, 후작 부인은 어찌 알았는지 찾아와 지독하게 괴롭혔다.

    “언니 여태껏 그렇게 생각했던 거였어? 내가 언니를 위해서 했던 모든 일을? 고맙기는 했던 거야?”

    엘리아는 진실을 감춘 채 억울해하는 세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랬지. 어머니께서 그것들을 보고 네 물건을 훔쳤다며 매질을 하기 전에는 고마워했지.”

    그때의 기억들과 함께 깊이 가라앉아 있던 분노들도 되살아나는 듯했다.

    “기억나? 너는 항상 매질이 다 끝날 때 찾아와서 모든 것이 오해라고 했잖아.”

    “그, 그건 나도 무서워서……!”

    흥분한 세레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내 비밀, 어머님께 말씀드렸던 거지?”

    엘리아의 말에 세레나는 얼굴이 굳어지며 커다란 눈을 치켜올렸다.

    “아, 아니. 무슨 소리야.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고 했잖아.”

    자신도 모르게 세레나는 비명을 지르듯 큰 소리로 외쳤다.

    “쉬! 일단, 하녀들을 물리는 게 어때, 세레나.”

    “…….”

    “물론, 난 상관없지만, 네가 괜찮다면 그냥 이야기해도 되고?”

    “잠, 잠깐만.”

    당황한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잠시만 다들 나가줄래?”

    세레나가 뒤를 돌아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언니? 언니 이능에 대한 건 내가 아버지랑 어머니께 비밀로 해주기로 했잖아.”

    “그랬지. 네가 아버지께서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나를 어딘가로 팔아버릴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래, 그거야!”

    세레나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외치듯 대답하자 엘리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미 난 북부로 팔린 거나 다름없잖아.”

    “사생아 주제에 대공비가 되는 건데, 이건 언니한테도 좋은 기회 아니야?!”

    다급한 상황이라 그런지 세레나의 속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사생아 주제라……. 날 그렇게 생각했구나.”

    “어? 그……!”

    세레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당황스러움을 내비쳤다.

    “……그냥 말하고 시간을 좀 벌어볼까?”

    “안 돼!”

    세레나는 갑작스럽게 소리를 쳤다.

    “훗, 왜? 너한테만 쏟아지던 관심을, 내가 뺏어 갈까 봐?”

    그녀의 말에 세레나의 눈동자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언니, 지금 굉장히 이상해. 대공비 된다고 벌써 변한 거야?”

    “음, 내가?”

    엘리아는 찻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찻물에 떠오른 찻잎이 둥둥, 몸을 비틀었다.

    “그래,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 후작가에서 언니 사람대접해 주는 거 나밖에 없는 거 몰라?!”

    “아, 사람대접?”

    엘리아는 그동안 자신 앞에서 썼던 가면이 완전히 벗겨진지도 모르고 흥분해 소리치는 세레나를 응시했다.

    ‘이게 네 본모습이지.’

    털썩 주저앉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세레나의 머리 위로 식어버린 찻물을 들이부었다.

    “꺄아악!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멜라네시아.

    마나를 고갈시키는 이 차는 이능을 쓸 때마다 마나가 필요한 엘리아의 건강을 서서히 집어삼켰다.

    졸졸, 옅은 물줄기가 애매한 금발을 적셔 나갔다.

    “네가 한 짓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 무시무시한 차를 세레나는 꾸준히 건넸었다.

    “이익……, 내가 언니한테 대체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 거야?”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

    엘리아는 세레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세레나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파르르, 기다란 속눈썹이 떨렸다.

    “이 일은 함구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입을 여는 순간, 나도 아버지께 내 이능에 대해서 말씀드릴 생각이거든.”

    엘리아의 말에 세레나는 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세레나의 머리카락이 부분부분 젖어 우스꽝스러웠다.

    “난 먼저 일어나 볼게.”

    “언니, 기다려!”

    엘리아는 세레나가 뭐라 하든 몸을 일으켜 방문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자 안에서 잔뜩 흥분한 세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기다리라고!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녀가 나오자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하녀들이 당황한 낯빛으로 엘리아를 스쳐 지나가며 세레나의 방으로 분주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 진짜 힘들다. 하루라도 빨리 북부로 돌아가고 싶어…….”

    엘리아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복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내다보았다.

    제국도 북부처럼,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즈넉하고, 쌀쌀한 어느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 * *

    어느덧, 결혼식 날짜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엘리아의 협박 때문인지, 세레나와 후작 부인은 그동안 잠잠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엘리아가 한 일은, 멜라네시아로 인해 고갈된 마나를 회복시키는 것과 제니에게서 약재를 받는 것이었다.

    “많은 양을 한 번에 구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 고생 많았겠구나.”

    엘리아는 약재가 담긴 봉투를 제니에게서 받아 들었다. 꽤나 묵직한 양이었다.

    “제니, 여기. 이거 받아.”

    잠시 약재를 살피던 엘리아는 옆에 올려놓았던 보석을 들어 제니에게 건넸다.

    “이건…… 후작님께서 성년식 때 처음으로 주신 보석이 아니에요?”

    제니가 눈을 반짝이며 보석을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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