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07)

갈색과 금색이 한데 섞인 머리카락과 연갈색 눈동자로, 이목구비는 후작을 닮아 아름다웠다.

세레나 또한 마지막으로 봤던 얼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대공님이 오셨어!”

“대공, 님?”

세레나의 말에 엘리아가 기억을 더듬었다.

“응! 언니, 얼른! 대공님이 기다리고 계시잖아.”

세레나가 눈앞으로 드레스를 흔들어 보였다.

엘리아는 순간 놀란 마음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엘리아가 정확히 스물하나가 되던 날이었다. 대공과의 혼인이 정해졌던 그날, 그때와 똑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언니, 이 드레스로 갈아입고 빨리 나가자.”

세레나는 멍하게 서 있는 엘리아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훗, 하고 웃으며 드레스를 건넸다.

딱 보아도 관리가 되지 않은, 검고 칙칙한 드레스.

‘그때 이 드레스를 입고 그이를 만났었지…….’

당시 엘리아는 드레스의 해진 부분이 부끄러워 연신 옷자락을 만져댔었다. 지우고 싶은,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세레나.”

“응?”

“이 드레스가 나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잠시 생각으로 얼굴이 굳었으나 세레나의 비웃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흡, 당연하지.”

세레나가 눈동자를 한번 데굴 옆으로 굴리더니, 웃음을 참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하…….”

세레나는 천사 같은 얼굴로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엘리아는 잠시 차가운 눈빛으로 세레나를 바라보다 그녀를 지나치며 방문을 나섰다.

“응? 언니, 옷 아직 안 입…….”

평소와 다른 눈빛에 세레나는 당황하며 급히 드레스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엘리아를 뒤따랐다.

“어, 언니! 내 방은 왜…….”

이 층으로 곧장 내려온 엘리아가 향한 곳은 일 층 응접실로 이어진 계단이 아닌 세레나의 방이었다.

“언니!”

뒤늦게 들어선 세레나의 눈에는 옷장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옷을 고르고 있는 엘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 “대공님이 청색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어. 세레나, 빌려줄 수 있지?”

엘리아의 손에는 어느새 화려한 비즈가 빼곡하게 장식된 청색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세레나가 데뷔탕트 때 입었던 가장 아끼는 드레스.

“언, 언니 드레스는 여기 있잖아?”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들고는 당황해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글쎄,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은데. 난 이게 더 마음에 드는구나.”

“어? 그, 그렇지만, 그건…….”

세레나는 당황하여 어버버거렸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역시 넌 정말 좋은 동생이야. 고마워.”

엘리아는 세레나가 그다음 말을 하지 못하게 바로 말을 잘라 버렸다.

그리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설렁줄을 당겼다.

“안나!”

그녀에게는 전속 하녀가 없었지만, 곧 세레나가 부른 줄 알고 하녀 안나가 황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찾으셨……?”

막 도착한 안나는 엘리아와 세레나가 각기 드레스를 들고 대치하는 듯한 묘한 분위기에 주춤거리며 어정쩡하게 들어섰다.

“안나, 이 드레스 입는 것 좀 도와주겠니?”

“네?”

안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세레나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 천사 같은 동생이 허락한 일이니.”

엘리아는 안나의 얼굴이 아닌 세레나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동생아?”

“뭐? ……어, 그래.”

당장이라도 엘리아의 손에 들린 드레스를 낚아채고 싶지만, 황당한 상황에 애써 억누르는 표정이 그대로 보였다.

“아, 네!”

세레나의 답변에 눈치를 보던 안나가 엘리아에게 다가가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그 모습에 점점 더 얼굴이 일그러지던 세레나는 들고 있던 검은 드레스를 바닥에 던지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훗.”

사라진 인기척에 엘리아의 입가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빙의 전 세레나가 웃으며 데뷔탕트 때 빌려주었던 이 드레스가 그때는 순수한 호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엘리아는 이 드레스를 빌려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후작 부인에게 호된 매질을 당했었다.

‘더 이상 거짓된 모습에 속는 바보는 되지 말아야지.’

하녀가 드레스 옷자락을 마저 정리하고 끝내자 엘리아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세레나의 방을 나섰다.

* * *

일 층 복도 끝에 자리한 응접실.

그 앞까지 당도하자 엘리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 문 너머에 그가 있었다. 아르티젠 북부의 유일무이한 대공, 펠릭스 로이드.

엘리아가 응접실 문을 열자, 여러 개의 시선이 얼굴에 쏟아졌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엘리아 아르네스입니다.”

엘리아는 벅찬 마음을 애써 숨기며 인사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사랑했던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늑대가 먹잇감을 노려보는 듯한 잿빛 눈동자.

그리고 뺨에서부터 목으로 이어진 긴 흉터까지 모든 것이 펠릭스 로이드, 그였다.

“그대가 엘리아 아르네스로군.”

처음엔 다부진 체격에 선이 굵은 그가 두려웠다. 그의 앞에 서면 마치 초식 동물이 된 듯 벌벌 떨기 바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에게 확신이 있었다.

‘사실은 누구보다 부드럽고,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

그를 보자 휘몰아치는 감정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그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크흠.”

너무도 반갑게 그를 보면서 웃는 그녀의 모습에 펠릭스는 당황스러웠는지 살짝 헛기침을 했다.

“엘리아, 얼른 앉아야지.”

펠릭스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후작이 엘리아에게 애써 다정한 척 말을 걸었다.

그 옆에 자리한 후작 부인의 얼굴이 엘리아의 드레스를 보며 일그러졌다.

‘하, 그 눈빛 이제는 두렵지 않네요.’

잡아먹을 듯 쏘아보는 눈빛. 하지만 엘리아는 무시해 버렸다.

그녀는 다시 만난 대공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너무도 멋있는 남자였다.

엘리아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눈 속에 새기기라도 하듯 펠릭스만을 바라보았다.

“크흠.”

그 모습에 펠릭스는 살짝 의문스러운 빛을 내비쳤지만,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결혼에 대한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혼식과 지참금의 규모, 일정이 빠르게 정해졌다.

후작 부부가 펠릭스의 말에 굽신거리며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작 부부와 대화를 하던 펠릭스는 시선을 돌려 엘리아를 바라봤다.

“그대는, 이 결혼이 마음에 드는 건가?”

그가 훑듯이 엘리아의 몸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누군들, 대공 부인의 자리를 마다하겠습니까.”

황제에게 미움받는 대공의 부인 자리는 보통의 영애라면 꺼리기 마련이라 엘리아의 마음과 달리 사람들에게는 비꼬는 말로 들렸다.

“크흠, 큼. 그만. 이게 무슨 무례냐, 엘리아.”

후작이 탐탁지 않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펠릭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공 전하. 죄송합니다. 아이의 말은…….”

“됐네. 이 결혼이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나. 결혼식을 서둘러 준비해야 하니, 이만 가보겠네.”

두 사람의 만남은 생각보다도 더 빨리 끝이 났다.

엘리아는 한참을 그가 사라진 커다란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팔을 잡아챘다.

“이 도둑년, 감히 세레나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아르네스 후작 부인이 연갈색 눈동자를 치켜뜨며 말했다.

“세레나가 빌려줘서 입었을 뿐입니다.”

“하, 빌려줘? 네가 착한 동생을 이용해서 멋대로 입고 왔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기세등등한 그녀의 모습을 엘리아는 담담히 바라보다 후작 부인이 움켜잡은 손을 힘주어 떼어냈다.

“어, 어? 이 건방진 년이 감히 내 손을……!”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에게 자신이 밀린다는 생각에 후작 부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후작은 혀를 차더니 뒤로 돌아 집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언니가 일부러 그랬겠어요?”

여태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세레나가 천사 같은 얼굴로 후작 부인을 말리는 시늉을 했다.

“네가 너무 잘해주니까, 저년이 제 처지도 모르고 저렇게 건방지게 구는 거야.”

“아이, 어머니 오늘은 그래도 특별한 날이잖아요.”

“쯔쯔쯔, 넌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하지만 건방진 행동에 대한 처벌은 받아야지. 엘리아, 따라오너라.”

세레나는 더 이상 후작 부인을 잡지 않았다.

“언니, 너무 걱정 마. 별로 혼내지 않으실 거야.”

세레나가 위로하듯 웃으며 속삭였다.

“…….”

엘리아는 그런 세레나를 보지 못한 척 가만히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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