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07)
  • 공금 갠소 하리

    “……엘리아.”

    낮고 굵은 목소리가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닿는 곳마다 피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자 뜨거운 시선이 곧바로 얽혀 들었다.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가 손등 위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허리를 받쳐 새하얀 침대보에 몸을 눕혀주었다.

    마치 유리로 된 조각을 어루만지는 사람 같았다.

    “……처음이군. 당신을 이렇게 안는 건.”

    안 그래도 낮은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그와의 첫날밤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런 밤이었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안타까웠다.

    ‘왜 하필 지금일까…….’

    창밖에는 수많은 횃불이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 비장한 표정의 기사단이 성 외곽을 에워싸듯 지켰다.

    오늘은 결혼한 지 16년 만에 그와 몸과 마음이 모두 맞닿은 날이자, 그들이 바다를 건너 북부의 섬 아르티젠까지 쳐들어온 날이었다.

    * * *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서서히 영역을 넓혀 두 사람을 비췄다.

    “엘리아.”

    귓가에 다급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숨결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펠릭스?”

    “이제 일어나야 해.”

    몽롱했던 시야가 걷히고, 결코 오지 말았으면 했던 현실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황제의 기사단이 아르티젠 영지까지 쳐들어왔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 왔다.

    “하, 이렇게 빨리…….”

    “제레미와 서둘러 이곳에서 나가야 해.”

    펠릭스가 엘리아의 슈미즈 드레스 위로 로브를 둘러주었다.

    “다, 당신은 어쩌려고…….”

    복도에서 다급히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침실 앞에서 멈추었다.

    쾅쾅쾅.

    “아버지! 서두르셔야 합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기사단장 루카스와 제레미가 들어섰다.

    “대공 전하! 황실 기사단이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벌써!”

    대공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빛이 보였지만,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린 듯 단단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당신 어서 제레미와 루카스를 따라가!”

    하얗게 질려 있는 엘리아를 일으킨 펠릭스가 아들 곁으로 그녀를 보내며 말했다.

    “엘리아. 어서.”

    하지만 엘리아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옷깃을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펠릭스…….”

    안타까운 그 모습에 펠릭스는 한 발 가까이 다가가 엘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내가 찾아갈게.”

    그는 흔들림 없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시간 없어요, 어머니!”

    “다, 당신…….”

    머뭇거리는 엘리아를, 제레미가 억지로 잡아끌었다.

    엘리아는 끝까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허억, 헉. 어디, 어디로 가는 거니?”

    안 그래도 몸이 허약한 탓에 엘리아는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찼다. 제레미는 엘리아를 자꾸만 잡아당기며 앞으로 달려갔다.

    “어머니, 조금만 힘내세요.”

    한참 동안 지하 계단을 내려가니, 북부 성을 빠져나갈 뒷문이 있었다.

    루카스가 단단히 잠겨 있는 자물쇠를 서둘러 열며 뒷문을 개방했다.

    대공 펠릭스를 포함해 믿을 만한 몇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 통로라, 제국 기사단의 손이 아직 뻗치지 않은 상태였다.

    제레미가 안도하며 엘리아를 뒷문 밖으로 이끌었다.

    “어머니. 먼저 가세요. ……전 아버지와 같이 갈게요.”

    “안 돼! 제레미. 너마저 그곳으로 보낼 수는 없어.”

    엘리아가 황급히 제레미의 손을 붙잡았다.

    남편을 두고 온 그곳에 아들까지 보낼 수는 없었다.

    “제가, 제가 아버지 모시고 금방 어머니를 뒤따라갈게요.”

    “하지만 제레미…….”

    “……어머니, 저 믿으시죠.”

    결연한 표정의 제레미.

    남편을 데려오겠다는 그 말에 차마 끝까지 제레미의 발길을 붙잡지 못했다.

    “흑흑흑…… 제레미.”

    뿌연 눈물이 시야를 가려 아들의 모습을 자꾸 흐리게 만들었다.

    * * *

    끼이익.

    굳게 닫혔던 뒷문이 다시 열리고, 엘리아가 다시 성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족을 두고…… 나만 떠날 순 없어.’

    엘리아는 마음을 다잡고 지하 계단을 올랐다. 일 층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고함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으아악! 팔이……!”

    “막아!!”

    북부 성 일 층은 팽팽히 맞서고 있는 제국 기사단과 북부 기사단으로 가득했다.

    쉴 새 없이 부딪히는 칼날들이 내는 소음과 역한 피 냄새……. 엘리아는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단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제국 기사단의 수가 월등히 많았으나, 검술 실력이 뛰어난 루카스와 제레미가 합류해 전세가 역전될 조짐을 보였다.

    그때 황실 기사 한 명이 조용히 제레미의 뒤로 접근하는 게 엘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제레미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 돼!!”

    엘리아는 칼날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제레미를 향해 달려갔다.

    “헉!”

    엘리아가 제레미의 등 뒤로 황급히 다가가 막아선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어, 어머니!”

    그제야 엘리아를 발견한 제레미가 황실 기사를 단숨에 베고는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헉, 헉. 제레미. 괜찮니?”

    “왜! 왜 여기에 계신 거예요!”

    엘리아는 감기는 눈꺼풀을 힘겹게 올리며 제레미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행이네. 다행이야…….”

    엘리아는 제레미를 지켰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꺼져 가는 미소를 지었다.

    “쿨럭!”

    그녀의 입가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안 돼요! 이대로 저를 떠나시면…… 어머니!”

    몸이 기울고, 제레미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아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으아악. 어머니!!”

    제레미의 비통한 절규가 전장을 가득 채웠다.

    * * *

    “으…….”

    선명한 시야 사이로 희뿌연 빛줄기 한 가닥이 내려앉았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기가 지고, 나른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나부꼈다.

    ‘뭐지? 여긴 어디지?’

    평소보다 몸이 축 가라앉고, 갈증이 일었다.

    엘리아는 상체를 겨우 일으켜 세웠다.

    끼이익.

    침대 스프링에서 끔찍한 소음이 들렸다.

    작고 좁은 방, 나뭇결이 툭툭 튀어나온 바닥, 깨어진 전신 거울.

    익숙한 구조의 방을 둘러보던 엘리아는 곧이어 깨달았다. 이곳은 결혼 전 아르네스 후작가에서 머물렀던 다락방이었다.

    아르네스 후작가의 첫째 딸이자 사생아였던 엘리아는 이곳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엘리아는 침대에서 벗어나 거울 앞에 섰다.

    균열이 일어난 거울 속에는 서른 후반의 대공비가 아닌 앳된 엘리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이게…….”

    엘리아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신의 뺨을 더듬거리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 다시 돌아온 거야?”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다시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삐걱.

    그때 낡은 문에 달린 경첩이 비명을 내지르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

    한껏 밝은 목소리가 엘리아를 불렀다. 세레나 아르네스였다.

    세레나는 엘리아보다 3살 어린 동생이었다.

    엘리아와 달리, 후작 부인의 배에서 태어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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