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1/61)
  • “아, 그런 참혹한 일이 있었구나……?”

    나는 콕콕 양심이 찔렸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선을 허공으로 올렸다.

    벨리언은 심각한 분위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여신의 궁에 시녀가 사라지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를 않아서 국경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 같습니다.”

    “당연히 황실은 조용하겠네요.”

    “맞습니다. 범인은 에테르온 황태자일 테니까요. 하지만 최근 실종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꼭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요.”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머릿속에 렘무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신성력을 증명하려는 거다.]

    ‘신성력을?’

    [일시적으로 몸에 새겨진 금단술을 훼손하면 신성력을 보일 수 있어. 내 주술이 아직 에테르온의 신체에 남아 있으니 미리 발작을 감당해 줄 인간들을 모으고 있는 거야.]

    이번에 열릴 로이드의 즉위식 축하연에서 신성력을 선보일 생각인 건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물약도 더는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벨리언이 허탈함을 담아 말했다.

    그동안 마을에 잠입하기 위해 많은 작업을 했을 텐데 순식간에 헛수고로 돌아갔으니 그런 기분을 느낄 만도 했다.

    마을에 섞여 들어가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완벽하게 그 사람인 척 행세하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황태자의 꼬리를 잡을 계획이었으리라.

    “그래도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렘무트가 손안에 있던 물약을 손으로 굴리며 말했다.

    “아직 그 인간이 살아 있거든.”

    그가 액체를 보란 듯이 흔들어 댔다. 나와 벨리언이 동시에 유리병을 바라봤다.

    “당사자가 죽었다면 진작 가루가 됐을 거야.”

    “그럼 이걸로 혹시 추적도 가능하다거나?”

    벨리언이 기대감을 내비치며 물었다. 렘무트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쭉 폈다.

    “이 나를 뭘로 보고. 당연히 가능하지.”

    벨리언이 비장하게 제안했다.

    “기존에 제공하던 간식 다섯 배.”

    “난 이미 오늘 생고기를 잔뜩 먹었거든. 그런 건 성에 차지도 않아.”

    “……벌써 그런 고급 음식을 주셨습니까?”

    벨리언이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출처가 수상한 간식을 들고 다니는데 알아보려면 더 후한 걸 내어 줄 수밖에.

    “그럼 보석은 어때요? 렘 보석 좋아하잖아요.”

    내가 살살 달래며 예정에 없던 보석까지 패로 꺼내 들자 벨리언이 진심이냐며 정색했다.

    하지만 이것만큼 잘 먹히는 것도 없었기에 나는 벨리언을 향해 생긋 웃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물론 보석은 카드리아 경이 준비하세요-.

    그 입 모양을 하나씩 따라 읽던 벨리언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렘무트의 예상치 못한 반응이 상황을 뒤바꿨다.

    “보석?”

    “네.”

    “나는 이제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졌는데.”

    “에이, 거짓말.”

    “진짜.”

    이건 말도 안 돼!

    렘무트가 다른 것도 아니고 보석에 관심이 없어지다니.

    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것과 반대로 벨리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지 말고 이번만 그냥 도와줘요. 평소에도 원하는 건 충분히 먹게 해 줄게요. 매일은 무리지만 일주일에 두 번 어때요?”

    이건 무슨 어린 애 설득하는 것도 아니고. 먹는 걸로 다 큰 성체 마룡을 설득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고작 두 번?”

    “……세 번.”

    하여간 욕심은 많아서.

    내가 이 이상은 안 된다며 단호한 눈빛을 보내자 렘무트가 바닥에 주저앉아 턱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고민하는 척 하는 건가 지금.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보니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는 현재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그시 그의 발을 지르밟았다.

    “아! 아파.”

    “재밌어요?”

    “어, 엄청 재밌어.”

    “순순히 협조하는 게 어때요? 사람들이 집단으로 실종되고 있다잖아요.”

    네가, 에테르온에게 알려 준 사술 때문에!

    심지어 계약자의 명령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그간의 정을 생각해 봐주고 있는 거였다.

    렘무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특별히 세 번으로 협조해 주…….”

    ……주?

    기대감으로 차 있던 벨리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렘무트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렘무트는 하던 말을 멈추고 내 뒤쪽 어딘가를 보며 중얼거렸다.

    “야, 너…….”

    “왜요?”

    “너 제대로 먹였다며?”

    “뭐를요?”

    귓가로 들려서는 안 될 타인의 걸음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지금 지붕 위에 나와 렘무트, 벨리언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텐데?

    너무 소란스러웠던 건가. 들켜도 할 말 없는 상황이기는 한데.

    나와 벨리언이 서로 얼굴을 맞댄 채 빠르게 시선을 교환할 때였다.

    누군가 내 몸을 뒤로 끌어당겼다.

    “어, 어어라?”

    이게 무슨 일이지?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멀어져가는 렘무트에게 손을 뻗었다. 그 사이, 익숙한 체향이 훅 끼쳤다.

    그 향기엔 오늘 내가 라히트리안에게 잔뜩 먹인 찻잎 향도 어렴풋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상대방의 정체를 깨닫고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올렸다.

    머리카락이 뒤로 살랑 넘어가며 동그란 이마가 완전히 까이고, 눈을 위로 도르륵 굴리자 라히트리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안 자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쯤 세상모르고 푹 자고 있을 줄 알았다.

    준비했던 찻잎이 부족했나.

    하지만 내가 방으로 돌아갔을 때 쏟아지는 잠 때문에 하루가 전부 날아갈 만큼 효과가 강했는데.

    “황녀가 주는 차를 마셨을 거라고 생각해?”

    “안 마셨어요?”

    “차를 마시자고 하는 것부터 수상하잖아.”

    속았구나.

    나는 볼을 부풀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마시는 척 한 거였다니.

    그럼 라히트리안은 차를 마시는 내내 마법으로 차를 다른 곳에 버리고, 나만 해맑게 그가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 마신 거였나.

    불만 있느냐며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에 슬쩍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어쨌든 라히트리안을 몰래 재우려고 했다는 죄는 변함없으니까.

    “조합이 상당히 흥미로운데.”

    “튜니아트 제국 내의 문제입니다. 저희가 해결할 겁니다.”

    “그렇게 해. 나도 끼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라히트리안은 경계하는 벨리언을 무시하고 오히려 목적은 내게 있었다는 듯이 나를 빙그르르 돌렸다.

    얼결에 마주 보는 자세가 되자 그는 못마땅하게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죽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혀를 차며 입고 있던 겉옷을 내 어깨 위로 걸쳐 주었다.

    품이 남기는 했지만 따뜻한 온기가 밤공기에 차갑게 식은 몸을 녹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럼 황녀는 내가 데리고 가지.”

    “엇, 잠깐만요! 저도 저 일을 해결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왜?”

    나는 그에게 가까이 오라며 작게 손짓했다. 라히트리안이 몸을 숙여 왔다.

    나는 그래도 닿지 않는 높낮이에 발꿈치를 쭉 올려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에테르온이 곧 신성력을 공식적으로 증명해 보일 것 같다고 해요.”

    “그런데?”

    “그럼 사람들이 죽을 텐데, 막아야죠.”

    “그들이 황녀와 무슨 상관이기에.”

    “그뿐만 아니라, 축하연에서 신성력을 보이지 못하면 쌤통이잖아요! 그리고 그날 담판을 지을 거예요.”

    그러려면 로이드의 축하연이 열리기 전에 신성력을 모두 되찾아 와야만 했다.

    그러나 그건 허튼 희망이라는 듯이 파삭- 소리가 들려왔다.

    “어?”

    나는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렘무트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병의 액체가 가루가 되어 저절로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에테르온 튜니아트, 이 미친 자식.

    그가 황성을 벗어난 게 아니라면, 황성 어딘가에 국경 마을에서 잡혀 온 사람들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 * *

    “하, 하하. 성공했어. 봤습니까, 공작?”

    여신의 궁의 어둑한 지하.

    에테르온이 자신의 팔에 새겨진 금단술 일부를 훼손하자 신성력이 반짝이며 몸 주변을 에워쌌다.

    처음으로 제 의지로 다뤄 보는 힘에 희열을 느낀 에테르온이 눈을 번뜩였다.

    그가 원하는 대로 신성력은 팔등에 난 상처를 회복시켰다.

    이런 힘이었다니. 신성력을 다룬다는 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이었다.

    “네, 멋지게 성공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황녀도 별말 하지 못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테르온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을 툭 발로 찼다.

    총 열 다섯. 몸에 새겨진 금단술을 훼손하고 필요로 하는 희생양의 수였다.

    그는 손목에 새겨진 거뭇한 문양을 매만졌다.

    “조만간 마탑주가 범인을 잡아 오기만 하면 완벽합니다.”

    “그 범인을 왜 그렇게까지 잡고 싶어 하십니까?”

    “그가 있어야 리즈벳의 신성력을 온전하게 가져올 수 있습니다. 리즈벳에게는 지금 라히트리안이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선은 라히트리안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감히 내게 여신의 궁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다니. 제가 황제가 되면 이카르센 제도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모든 건 그 적발의 남자만 찾아내면 됐다.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에테르온을 발작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 존재였다.

    그가 신성력을 빼앗아 올 방법만 알려 준다면 모든 건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었다.

    나데로안 공작은 생명력을 잃고 숨이 끊어진 주변의 시신들을 보며 낮에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예전에.”

    여신의 궁에서 에테르온과 라히트리안이 나눈 대화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데로안 공작이 아는 한,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튜니아트 황실은 새롭게 변모했다.

    만약 황실에 금단술을 넘겨준 사람이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라면?

    나데로안 공작은 다른 출구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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