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방금 내가 대답 안 해서 기분 상했어요? 화 풀어요, 렘무트.”
“내가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결국 그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지하 식당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처음 내가 식당에 들어오자 화들짝 놀란 요리사들은 한 시간만 비워 달라는 명령에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마음껏 먹어도 돼요.”
“너 그 말 무르기 없기다.”
“당연하죠. 전 먹을 걸로 장난치지 않아요.”
매사 진지한 편이지.
음식으로 장난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어.
다소 진심이 담긴 내 말에 렘무트가 흡족하게 웃으며 후각을 사용해 신선한 고기가 보관되어 있는 저장소를 찾아냈다.
그는 아예 자리를 잡고 하나씩 부위별로 고기를 고르고 있었다.
‘……그냥 고기면 되는 줄 알았더니 취향인 부위도 따로 있나 보지.’
세심하게 이것저것 골라가며 확인하던 렘무트는 원하는 부위를 찾았는지 하나씩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요? 간도 안 되어 있고 요리가 된 것도 아닌데.”
“나는 이게 제일 맛있는데?”
“그동안 식당에 몰래 안 숨어든 게 신기할 정도네요.”
저렇게 몸집이 작아도 본인은 육식 동물이 확실하다는 듯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먹어치워 갔다.
……저장소에 고기가 몽땅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또 무슨 소문이 퍼질지.
나는 머리가 띵했지만 이걸로 렘무트의 기분이 풀어진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튜니아트 제국으로 와서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 것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계약자를 잘 보이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알려 주어야지.
“그런데 렘무트, 벨리언이 부탁하면서 또 다른 말은 안 해요? 나한테 위험한 일인지 아닌지 확인하면서 무슨 일인지도 들었을 거 아니에요.”
“아, 그거. 마을 몇 개가 사라졌다던데.”
“마을이요? 언제부터요?”
아무리 사람이 드문 국경이더라도 마을이 몇 개씩이나 사라지면 수도에 보고가 올라오기 마련이다.
황성에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몰라. 한…… 2주 전? 대충 그때쯤이라던데.”
“……2주 전?”
그 짧은 사이에 마을이 몇 개씩이나 사라졌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설마 황실이 알면서도 쉬쉬하고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모든 게 설명이 됐다.
신성 제국에서 신분이 확인되는 자라 하더라도 국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여러 개의 마을이 사라졌다면 적어도 백 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데, 그들이 모두 하늘이나 땅으로 꺼지지 않은 이상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라는 의미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황실이 뒤를 봐주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 과정을 단 2주 만에 해결할 수 있고, 흔적도 없이 이동시킬 수 있는 신분을 가진 존재.
아무리 생각해도 황족 말고는 가능한 신분이 없었다.
렘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배제할 수는 없지.”
“만약 배후가 황실이라면 카드리아 공작가가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해가 가요.”
보고를 받았는데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황실은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나는 신이 나서 이제 완전히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렘무트를 보며 턱을 매만졌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실마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확실히 알아보려면 카드리아 경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렘무트 옆에 같이 쪼그려 앉아 물어봤다.
“렘무트. 벨리언 카드리아는 또 언제 만나기로 했어요?”
“내일이 되는 자정에.”
“그럼 밤이라는 거네요?”
“응.”
“저도 같이 가요!”
나는 손으로 꽃받침 모양을 만들며 생긋 웃었다.
렘무트는 고민되는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가. 아, 너 라히트리안한테는 비밀로 해야 된다.”
“왜요?”
“나는 걔 얼굴만 봐도 기분이 나쁘다고.”
“하긴. 지독하게 엮인 인연이죠, 두 사람.”
“누가 인연이라는 거야!”
“사실이잖아요.”
나는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펼쳐 보였다.
“무려 오백 년이나. 이 정도면 인정해요. 적당히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싫어도 제가 황제가 될 때까지는 보고 지내야 할 텐데.”
물론 내가 에테르온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게 우선이었지만.
적어도 몇 달은 걸릴 터였다.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테니까.
렘무트는 조용해졌다.
“그거 얼마나 걸릴 거 같은데.”
“저야 모르죠. 그래도 그때까지 잘 부탁해요, 렘무트.”
내가 손을 내밀며 악수하는 시늉을 하자 렘무트가 빤히 바라보다 옆에 있던 타월에 작은 손을 슥슥 닦았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때까지 인내심 좋은 내가 잘 참아 보기는 할 테지만, 지루하면 그냥 가 버릴 거야.”
“네,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요.”
우는 척 눈가를 닦자 렘무트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다 먹었다며 재료 저장고 문을 미련 없이 꼬리로 후려쳐 닫았다.
나는 그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 걸었다.
식당을 나서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요리사들이 보였다. 그중 주방장 앞에 잠시 멈춰선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들어가서 놀라지 말아요. 무슨 일이 벌어졌든 상상 그 이상일 테니까. 앞으로 고기 주문은…… 세 배. 아니, 네 배로 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황녀님?”
“들어가 보면 알아요.”
왜냐하면 렘무트가 잔뜩 비워 버렸거든요.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멀어져 가는 렘무트 뒤를 얼른 따라갔다.
“근데 벨리언이랑은 어디에서 만났어요? 그동안 안 들키고 잘 숨어서 만났네요. 모습이…… 많이 튀잖아요.”
“별로. 어차피 네 궁 지붕에서 만나니까.”
“……그것참 놀랍네요.”
야심한 자정에 지붕 위의 만남이라니.
누가 봐도 수상쩍은 장소와 시간대였다. 재수 없어서 황실 기사단에 걸린다면 변명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배부르니까 졸려.”
방에 도착하자 늘어지게 하품하던 렘무트가 침대로 가더니 털썩 엎드려 누웠다.
나는 낮잠을 자는 렘무트를 지켜보다가 새로 온 시녀가 방에 들어오려 하자 조용히 하라며 입가에 검지를 올렸다.
* * *
라히트리안은 지루한 표정으로 튜니아트의 황태자를 응시했다.
그저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 머무를 명분에 불과한 것에 이리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 하니…….
‘성가시군.’
황태자 옆에는 나데로안 공작이 버티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제가 범인을 잡는데 협조하겠다고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리 시간을 내었습니다.”
“아, 그렇군.”
“범인의 인상착의는 아시다시피,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을 지닌 자입니다. 키는 180cm이 조금 넘고, 골격은 성인 남성보다 더 체격이 크고…….”
에테르온은 구체적으로 범인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렘무트’에 대한 인상착의를.
느긋하게 식은 찻잔을 내려다보던 라히트리안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봐도 렘무트를 잡아 달라고 하는 모양새였다. 그가 웃자 에테르온이 설명을 멈췄다.
“왜 웃으십니까?”
“너무 자세히 알아서. 내가 알기로 황태자는 황녀가 납치될 때, 아니지.”
납치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리즈벳이 벌인 납치극이었다.
“황녀가 납치되길 자처하던 그 상황에 여신의 궁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꼭 본인이 본 것처럼 말하는군?”
“무슨 말씀이신지.”
에테르온이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요. 제가 그런 자와 어찌 친분이 있겠습니까?”
“그건 모르지. 세상에는 온갖 일이 벌어지니까. 뒤에서 그자와 내통하고 있었는지도.”
“불쾌하군요.”
에테르온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 마탑주께서는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 보이나?”
그렇다면 제대로 본 거였다.
실제 라히트리안은 에테르온 반 튜니아트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가능하다면 당장 저 멀리 치워 버리고 싶을 만큼.
“저를 이토록 싫어하시니 궁금해지는군요. 리즈벳은 어디가 마음에 들어 황녀궁에서 지내시는 겁니까? 그곳은 손님이 머물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외지고, 허름하고, 볼품없으니까요.”
외지고, 허름하고, 볼품없다.
하나같이 라히트리안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단어들이었다.
“확실히 손님을 맞이할 때 튜니아트는 튜니아 신전이 가까이 있는 중앙 별궁을 내어 주었지.”
라히트리안은 과거 초대되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찻잔을 무심하게 기울였다.
그때는, 여신의 궁에 황녀가 지내고 있었는데.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여신의 궁도 지금과 같이 탁한 색을 띠지 않고 신성으로 반짝거리고 있을 시기였다.
그걸 정작 본인은 알지 못하니 당당히 여신의 궁을 거처로 삼아 황태자 노릇을 하고 있는 거겠지.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 방문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잘 알고 있다는 라히트리안의 대답에 에테르온의 미간이 의아하게 좁혀졌다.
“물론, 예전에.”
라히트리안은 나데로안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별것 아닌 짧은 대화에도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황태자가 설명한 자는 내가 최선을 다해 찾아보도록 하지.”
어차피 리즈벳도 그럴 생각일 테니까.
에테르온 반 튜니아트가 애타게 찾고 있는 존재이니 곁에 수족으로 앉혀두기 수월하겠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렘무트가 알려 준다면 그녀는 조금 더 수월하게 황위에 앉게 될 테고 그 후에는…….
아마도 말도 안 되는 그 계획을 같이 이루어 나가겠지. 그리고 그다음은?
라히트리안은 머릿속에서 명확하기보단 막연하게 그려지는 수에 멈칫했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데.’
설마 사람을 홀릴 대로 홀려 놓고, 볼일 끝나면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하고 미련 없이 등 돌리는 건 아니겠지.
라히트리안은 급격히 기분이 저조해지는 걸 느꼈다. 눈앞에 리즈벳과 닮은 얼굴을 보니 더욱 그랬다.
일단 방해물인 에테르온 튜니아트부터 치워내야 리즈벳과 다음 단계를 밟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가능한 빨리 찾아 주십시오. 그자의 목을 당장이라도 치고 싶군요. 중간 과정에 관해서도 가능하다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범인을 찾아 준다는 긍정적인 답에 에테르온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반면에 라히트리안의 입매는 불쾌함으로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대는 황녀를 끔찍하게 아끼나 보군.”
“당연하지요. 제 하나뿐인 동생 아닙니까.”
에테르온이 꾸며진 미소를 지어내며 찻잔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표정을 본 라히트리안은 여신의 궁에 더 머무를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럼 이쯤 끝내는 걸로 하지.”
적당히 시간을 끌어 렘무트를 찾는 척하다가 던져 주면 되겠지.
당사자와 합의도 없이 라히트리안은 결정을 내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테르온이 마주 일어났다.
그러다 라히트리안의 찻잔이 전혀 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상대가 성의를 담아 준비한 대접을 어느 것 하나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는 예의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 준비가 부족했나 봅니다.”
“아니, 충분히 고맙다고 해 두지.”
“그런데 왜 차를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차를 별로 안 좋아해서.”
라히트리안이 생긋 웃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던 에테르온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데로안 공작이 라히트리안에게 물었다.
“……예전에 튜니아트 신성 제국을 방문하셨다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글쎄. 그건 공작이 직접 알아보는 게 어떨지?”
라히트리안은 자리를 완전히 뜨기 전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아, 이 말을 깜빡했군.”
“하실 말씀이 아직 남으셨습니까?”
“여신의 궁은 그대와 어울리지 않아.”
에테르온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라히트리안은 문제 있냐는 듯이 입매를 당겨 웃으며 노데르안 공작을 돌아보았다.
“범인은 잡는 대로 보내 주도록 하지. 그 정도 일은 어렵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