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61)

로이드 윈저가 공작위를 승계받았다는 소식이 황성에 도달했다.

최종적으로 황제의 승인을 요청한다는 서신에 카로스가 흥미롭게 직인을 만지작거렸다.

서신 안에는 윈저 가문의 장로들 전원의 동의서가 담겨 있었다.

재주도 좋지. 이들을 어떻게 한 명도 빠짐없이 협박해 자리를 얻어낸 건지.

“알 만하군.”

아틀레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기세등등해진 윈저 가문이 뒤에서 한몫 챙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제 몫을 지키기 위해서는 로이드 윈저를 따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을 터.

“로이드 윈저가 정말 아틀레아를 등졌다니. 충격이 상당하겠어.”

그토록 끔찍하게 아틀레아를 위하던 로이드 윈저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이건 카로스도 짐작하지 못한 행보였다. 직접 국경으로 보내 상황을 마주하게끔 유도하기는 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해내 주고 있었다.

카로스는 튜니아트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직인을 선명하게 찍어 남겼다.

이제 남은 건…… 리즈벳에게서 온 항소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그것을 내려다보다 동봉된 실을 풀어냈다.

그 안에 나름 깔끔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카로스의 입매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결백을 증명한다라.”

감히 황제를 끌어들여 상황의 주도권을 가져가려 하다니.

괘씸하기는 하나 처음으로 들어 보는 리즈벳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카로스는 직인을 찍으며 무료하게 중얼거렸다.

“튜니아의 목소리를 먼저 듣게 되는 사람은 누가 될는지.”

리즈벳의 마지막 각성까지 남은 날은 이제 겨우 보름 남짓이었다.

그때 둘 중 한 명은 온전한 신성력을 얻게 될 것이었다.

마지막에 여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자가 튜니아트의 차기 주인이 될 터.

카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빛바랜 함을 열어 보았다.

오래되어 보이는 보관함과는 달리, 안에는 새 것 같은 여신의 신탁이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한 벽안이 잠시 진해졌다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앞으로 보름 안에 이것을 손에 넣을 자에 의해 신탁의 내용이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 * *

“정말 공작이 됐어요?”

“그렇습니다.”

“뭐…… 행진 같은 거 안 해요?”

다른 데에서 보면 즉위하면 행진하고 꽃가루 뿌리면서 축하해 주고 그러던데.

이 세상에는 그런 게 없나?

이렇게 아무 기별도 없이 바로 공작이 되었다고?

물론 작위 승계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행진을 왜 합니까? 저는 황족이 아닌 것을요.”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네요. 그럼 앞으로 윈저 공작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예요?”

낯설다. 윈저 공작이라니.

“아직은 폐하의 직인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것도 허락받아야 하는 거구나.”

“네. 승인을 받으면 황실에서 일주일 내로 축하연이 열릴 겁니다.”

행진 대신에 축하연이 열리는 거구나.

까다롭네. 결국 카로스가 허락하지 않으면 공작이 될 수 없다는 거잖아.

그럼 만약 카로스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로이드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거절당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없다고는 안 하네요. 아, 근데 저 할 말 있어요, 로이드.”

“무엇입니까?”

오랜만에 본 로이드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헤헤 웃으며 슬그머니 의자를 뒤로 물렸다.

이미 이런 내 행동을 겪어본 적 있는 로이드는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이리 오시지요.”

“아니요. 거기에서 들어요.”

내가 고개를 젓자 로이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황녀님. 두 번 말 안 하겠습니다. 좋을 말로 할 때 가까이 오시지요.”

나는 우물쭈물 의자를 끌고 앞으로 가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인 내가 힐끔 로이드의 눈치를 보다가 이실직고했다.

“저 사고 쳤어요.”

“뭡니까.”

“……제가 마족과 계약한 게 아니냐고 어머니랑 리사가 찾아오는 바람에.”

그 바람에?

로이드가 계속하라며 생긋 웃었다. 어쩐지 웃음 속에 가시가 가득 돋친 것 같았지만.

“차라리 폐하까지 불러서 모두 앞에서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해 버렸지 뭐예요! 아하하, 참. 리즈벳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서 제가 많이 혼냈으니까 이제 안 혼나도 될 것 같아요.”

“허?”

“정말로요. 많이 반성하고 있다고 그러던데요.”

로이드는 낯선 화법에 말문이 막힌 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폐하께…… 오늘 이게 왔는데요.”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카로스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꺼내 보였다.

정확한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아마도 로이드의 축하연에서 이루어질 확률이 높았다.

파벌이 다른 모든 귀족이 한 자리에 모이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그것을 멍하게 보던 로이드가 자포자기한 웃음을 지었다.

“참 실행력도 좋으십니다.”

“그렇죠?”

“하아. 정말 어떻게 되려는 건지.”

로이드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정수리를 보며 나는 침묵했다.

“제 축하연 명단에 어떤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포함돼 있더군요. 황녀님과 혼담 문제로 엮이기도 했고, 아트레시아 제국은 튜니아트 제국과 좋은 연을 이어 가고자 하니까요. 여기에서 문제되는 점 있습니까?”

“…….”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어색하게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없다고 간절하게 믿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 있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당장 의자에 앉으세요.”

무서워. 나는 울먹이며 반쯤 일어났던 몸을 제자리에 돌려놔야 했다.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를 맞이하러 가는 자가 나데로안 공작이라 하더군요.”

* * *

“……세이어드를 하필 나데로안 공작이 데리러 간다니.”

두 사람 간에 어떤 대화가 오갈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의 방문은 표면적으로 혼담을 나누기 위해 오는 거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수틀리면 나를 밀고하려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야. 자기랑 혼인하지 않으면 차라리 단두대로 가라는 거야?”

뭐 이런 잔악무도한 남자가 다 있어?

책상에 턱을 괴고 있던 나는 그대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옆에서 요란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얄밉게 사탕을 핥고 있는 렘무트였다.

어디에서 저런 걸 받았는지 몰라도 렘무트는 종종 저런 간식거리들을 손에 들고 있었다.

“대체 그런 건 누구한테 받아 오는 거예요?”

“가끔 벨리언이라는 녀석이 주고 가던데? 생각해 보니까 괜찮은 녀석 같더라고.”

간식 몇 개 가지고 평가가 갈리다니.

얼마 전만 하더라도 피 냄새 운운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난리를 피워댔으면서.

된통 당해서 그대로 손에 달랑 들려왔던 건 몽땅 기억에서 지워 버린 모양이다.

“……벨리언 카드리아는 어디에서 그렇게 만났어요?”

“가끔 밤에 나가면 주던데.”

“언제요?”

“밤에.”

밤에 벨리언 카드리아가 황녀궁에 드나든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밤에는 어느 귀족이든 황족이 기거하는 장소 근처는 모두 출입 금지였다.

“밤에 어디에서 만나요?”

“몰라 기억 안 나.”

“그게 왜 기억이 안 날까요? 마룡도 망각을 하던가요?”

나는 생긋 웃으며 쏘아붙였다.

벨리언 카드리아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저런 간식거리를 사다 나를 리 없지.

그것도 야밤에. 둘이. 접선하다니. 이건 누가 봐도 수상한 냄새가 나잖아.

“……너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인간이랑 내가 잘 지낼 수도 있지! 악연으로 오백 년이나 엮인 라히트리안이랑도 지내고 있는데!”

아. 그렇긴 하네.

나는 가식적으로 웃던 표정을 지웠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수상하네요. 바른대로 말 안 해요?”

“……합당한 대, 대가를 주고받은 거야. 이건 전부 내 거라고.”

렘무트가 소중한 보물단지를 품에 안듯 과자더미를 품에 안았다.

오호라. 대가.

“제가 생고기 구해 줄까요?”

“그건 이미 받기로 했는데.”

“얼마나 받기로 했든 그거의 배로 줄게요.”

희번득. 렘무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벨리언 카드리아가 뭘 부탁했어요?”

망설이는 듯하던 렘무트가 입을 열었다. 참 얄팍한 관계가 아닐 수 없었다.

“알아볼 게 있는데 출입할 수 없다고…… 내게 어떤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어봤어.”

“그 인간이 누군데요?”

“몰라. 정말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국경 근처 마을로 간다고 했어.”

렘무트는 슬그머니 외면하며 자신이 들은 것들을 하나씩 알려 주기 시작했다.

“카드리아 공작가에서 입수한 정보 중 하나를 알아보러 간다고 했어. 이게 정말 다야.”

카드리아 공작가에서 입수한 정보. 국경 근처의 마을.

나는 얼마 전 받은 초록색 봉투를 떠올렸다. 국경 근처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 사건.

그런데 렘무트에게 마법까지 부탁하면서 잠입을 시도한다니.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너한테 피해가 되는 일은 아니라고 했어. 내가 그거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니까?”

그러나 내가 생각에 잠겨 대꾸하지 않자 들고 있던 간식들을 내게 들이밀며 렘무트가 투덜거렸다.

“아 씨. 안 먹어.”

그의 꼬리가 혼이라도 난 것처럼 축 처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