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안 돼, 리즈벳. 현혹되지 마.”
나는 뺨을 찰싹 때리며 재빨리 복도를 걸었다.
얼굴은 여전히 뜨겁고, 아까 전 라히트리안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허락도 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생생한 거야.
나는 고개를 붕붕 저으며 괜히 누가 따라오는 것도 아닌데 보폭을 크게 했다.
“……근데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나는 복도 창가를 내려다봤다. 황녀궁이 소란스러울 일이 없을 텐데.
의아하게 보자 황후궁의 문양이 새겨진 기사단이 포진해 있었다.
나는 오전에 봤던 붉은 봉투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카드리아 공작이 그런 편지를 보냈었지.
세간에 내가 마족과 계약했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카르센 제도에 머물렀던 사람들뿐이었고, 범인은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가장 유력했다.
그는 에테르온과 협조하는 사이였으니까.
나는 내 방문 앞에 멈췄다. 방문 틈이 살짝 벌어져 있는 게 보였다.
중요한 서류 같은 건 금고에 보관해 두고 있었지만, 황후가 마음만 먹으면 열어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찾는 건 지금 서류 같은 게 아닌 나와 계약한 마족의 존재를 찾고 있는 것일 테니…….
‘그런데 황성에 이렇게 빨리 소식이 도착했다고?’
나도 소식을 전해들은 게 불과 얼마 전인데.
황족은 기본적으로 저잣거리의 소문에 무관심했다. 일개 평민들이 무어라 떠들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작 짓고 있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을 베어 버릴 수 있는 게 황족인데, 근거도 없는 소문 따위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에테르온이 자신과 관련된 소문에 바로 대응하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니면, 이번 일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바깥소식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건가?
“어머, 황녀님. 어디 급히 다녀오시는 길이신가 봐요.”
나는 문을 열고 나오는 리사와 마주쳤다.
‘범인은 얘구나.’
백작가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곳 하녀들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하녀들은 소문에 빠르게 반응하니까.
바로 아틀레아에게 알리기 위해 황성으로 입궁한 모양이었다.
“리즈벳.”
“네, 어머니. 제 궁에는 어쩐 일이세요?”
나는 라히트리안과 렘무트가 최대한 늦게 돌아오기를 바랐다.
괜히 여기에서 마주쳤다가 렘무트에게 무슨 짓을 하려 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갑자기 나타난, 마족으로 가장 의심되는 게 렘무트이니 끈질기게 달라붙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오늘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네가, 마족과 계약을 했다더구나. 이카르센 제도에서 삿된 것에 빠진 게 아닌가 걱정이 되더라니.”
아틀레아의 표정이 슬프다는 듯 일그러졌다.
“부디 이 어미는 아니길 바라지만.”
철그럭 대는 갑옷 소리가 아래층부터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지.
리사가 의기양양하게 아틀레아의 옆에 딱 붙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제가 마족과 계약을 했다고요? 저는 바로 결백을 증명할 수 있어요, 어머니. 신성력을 가진 오라버니만 계시다면 얼마든지요.”
“이런 저질스러운 일에 에테르온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거라.”
“하지만 사실인걸요.”
리사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자신의 예상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으니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판을 더 키워 보기로 했다.
주변에 기사들이 모여드는 걸 보며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이런 이야기는 역시 저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겠어요. 차라리 황제 폐하가 보는 앞에서 해명할게요.”
“……하, 네가 정녕 폐하까지 나서게 만들 참이냐?”
“네, 부디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저는 결백해요.”
아틀레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반면 리사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모든 화가 그녀에게 향할 테니 두려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예정에 없던 황제까지 들먹이니 상당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이참에 트리아 백작의 입지를 좁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누가 황태자비로 거론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런데 어머니. 최근 로이드를 본 적 있으세요?”
“……네가 감히.”
“제가 듣기로 최근 공작위를 승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황제 폐하의 직인만 받으면 모두 해결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는데요.”
나는 리사를 보며 생긋 웃었다.
“당장 폐하를 모시기 어려우니, 제가 직접 알현을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연락이 갈 때까지 부디 기다려 주시길 바라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나는 리사를 완전히 무시한 채 방문을 열었다.
아틀레아가 분한 듯 나를 응시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말꼬리를 잡을 수 없었는지 우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그 연락이 하루라도 빨리 오길 바라마.”
나는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붉은 꼬리가 보이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다행히 눈치는 있는지 잘 숨어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안도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약 아틀레아에게 들켰더라면 렘무트는 그대로 끌려갔을테니까.
라히트리안의 사역마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어.’
나는 복도가 조용해지자 뚱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나와요. 둘 다.”
* * *
“내가 볼 때 리즈벳이 점점 널 닮아가는 것 같다.”
렘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감상평을 남겼다.
아무리 봐도 저 태도와 화법은 라히트리안의 것과 흡사했다.
처음 리즈벳과 만났던 날을 떠올린 렘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는 쫄보였는데.”
“황족이라면 응당 저래야지.”
“저래야 하는 게 뭔데?”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고 역으로 때려 주는 거? 렘무트는 씩 웃었다.
“하긴, 내 계약자면 저 정도는 해 줘야지.”
라히트리안이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몸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지?”
올라갔던 렘무트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한 달? 아니면 두 달?”
“뭐야. 너 알고 있었던 거냐?”
“그럼 몰랐을까.”
라히트리안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런 몸으로 잘도 돌아다니는군.”
“두 사람, 안 나와요?!”
리즈벳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벽에 기대 있던 라히트리안이 먼저 방에서 걸어 나갔다.
렘무트는 그 뒤를 느리게 따라 걸었다.
한껏 지저분해진 꼬리를 털어내자 그가 걷는 복도 길을 따라 모래가 흘러내렸다.
얼마나 놀아댄 건지 발바닥은 물이 흥건해 제법 동그라면서도 세모 모양의 뾰족한 발 모양이 찍혔다.
짧은 손에는 리즈벳이 만들어 준 작은 모래성 모양이 들려 있었다.
“두 달은 무슨.”
한 달도 아슬아슬했다. 이런 몸으로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서 버티려던 것 자체가 무리였다.
리즈벳이 팔짱을 끼고 렘무트를 보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올 때 다 털고 왔어야죠. 이게 뭐예요. 목욕해야 되잖아요.”
“그럼 네가 시켜 주면 되잖아.”
“……하? 내가 왜 렘무트 목욕을 시켜 줘요? 마법으로 씻으면 되잖아요.”
“물로 씻고 싶어!”
고집을 부리는 렘무트를 성가시게 보던 라히트리안이 그에게 그대로 물세례를 날렸다.
물로 흥건해진 복도를 보며 다시 손가락을 휘젓자 언제 난장판이 됐었냐는 듯 복도 전체가 말끔해졌다.
“저게.”
렘무트가 씩 웃으며 뽈뽈뽈 달려 나갔다. 그리고 보란 듯이 리즈벳의 침대 위로 날아가 털썩 누웠다.
라히트리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게 보였다.
[뭘 봐. 넌 이런 거 못 하지? 하고 싶어도 못 하지?]
“…….”
[리즈벳이 나 따뜻하다고 맨날 옆에 두고 자거든. 너는 이런 거 꿈도 못 꾸지? 아니 꿈꾸면 그건 변…….]
혀를 내밀며 라히트리안에게 몰래 전언을 날리던 렘무트는 살기가 어리는 자안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입이 산 걸 보니 두 달은 거뜬하겠군.”
라히트리안이 렘무트를 덥석 들어 올렸다.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리즈벳이 의아하게 묻자, 라히트리안이 생긋 웃었다.
“이것도 수컷이잖아. 앞으로 내가 잘, 돌보도록, 하지. 괜히 황후가 들이닥쳐서 들키면 곤란하기도 하니 말이야.”
* * *
“이게 대체 무슨 수치인지!”
황후궁으로 돌아온 아틀레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 분을 터트렸다.
“폐하를 직접 부르겠다니. 고작 소문 따위에 흔들렸다는 게 알려지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될지 아느냐?”
“……자, 잘못했습니다. 황후 마마.”
리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죄를 빌었다.
기사단까지 직접 대동해 리즈벳의 거처까지 찾아 가기로 결정한 사람은 아틀레아였다.
그러나 리사는 억울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눈물을 흘리며 사죄할 뿐이었다.
“이 일은 트리아 백작이 직접 책임지도록 할 것이다.”
“……네? 아버지께요?”
“너는 트리아 가문의 사람이 아니더냐. 그러니 그 책임은 네 아비인 서번트 트리아 백작이 져야지.”
아틀레아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제, 제가 수습할 수 있습니다. 방법을 알려 주신다면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그러니?”
“네, 황후마마.”
아틀레아는 리사를 내려다봤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고 한들, 무언가에 현혹되면 이성을 잃고 달려들기 마련이다.
방대한 지식을 쌓은 현자로 명성이 자자한 자들도 결국 삿된 종교에 빠지지 않던가. 스스로를 망치고 결국 잠식당하여 숨이 멎을 때까지.
갓 성인식을 치른 어린 영애에 불과한 리사 트리아가 사리 분별할 힘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깨달았을 땐 이미 거미줄에 걸린 후일 것이다.
특히 주제를 넘는 욕심을 가진 사람만큼 다루기 쉬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아틀레아는 그것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할 테냐?”
“제가 무엇을 하면 되나요, 황후마마?”
“이번 일만 무사히 성공하면 내가 너를 황태자비가 될 수 있게 온 힘을 다할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속삭여 주기만 하면 그건 아주 쉬웠다.
아틀레아는, 리사의 모습이 어린 시절의 그녀를 제법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역한 불쾌함이 올라왔으나 내리누르며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