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6/61)
  • * * *

    “하아……. 힘들어 죽겠다.”

    카드리아 공작이 직접 황녀궁을 방문했다는 소식이 퍼진 후로 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독대를 요청해 왔다.

    그중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가문들은 카드리아 공작과 대화 중 나왔던 ‘신성력을 잃은’ 가문들이었다.

    황성에 입궁할 사정이 못 되는 귀족들은 서신으로나마 나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혀 왔지만…….

    ‘이걸로는 부족한 감이 있는데.’

    윈저 공작가와 카드리아 공작가가 나를 돕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아래 속한 가문들이었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큼직한 가문 한두 곳의 포섭만으로는 판이 뒤집히지 않을 것이다.

    “또…… 역시 제국민 평판이 제일 중요한데.”

    제국민들은 황제가 누가 되든 관심도 없을 것이다. 당장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해도 일상이 평화로우면 그걸로 끝이었다.

    ‘어떻게 나한테 관심을 끌어올 수 있지?’

    나는 최근 카드리아 가문에서 보내온 소식통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최근 수도의 동향이 담겨 있었다.

    내가 직접 황성 밖으로 나가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눈과 귀를 대신해줄 용도였다.

    나는 초록색 봉투를 먼저 풀어 보았다.

    “……국경 근처 마을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어?”

    이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느 국가든 국경 지대는 위험하기 마련이니.

    “흠, 다음은…… 어?”

    나는 붉은색 봉투를 풀어 내용을 확인하다 표정을 굳혔다.

    “봉투를 열 때마다 표정이 가만히 있지를 못 하는데.”

    라히트리안이 내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가져갔다. 곧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 봉투를 허공에 불태우며 말했다.

    “대충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로군.”

    “하아. 정말 머리 아파요. 어디 훌쩍 떠나고 싶다.”

    예를 들면.

    “바다라든가!”

    이 생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 말이야! 바다!

    내가 책상에 엎드리자 라히트리안이 멈칫하며 물었다.

    “바다가 보고 싶어?”

    “네에.”

    하지만 이게 어떤 일을 몰고 올지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신중하게 대답했어야 하는 건데.

    바다를 보고 싶다는 말에 라히트리안이 무엇을 가지고 올지, 이때의 나는 몰랐다.

    * * *

    “뭐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불경한 소문 돈 게 언제라고 이번에는 황녀님이 마족을 소환했다니.”

    “제국에 망조가 든 게 아닐까?”

    숙덕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리사는 그 말을 듣고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 한 명을 붙잡았다.

    그녀가 황녀에게 해고됐다는 불명예를 안고 트리아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의 수치감으로 숨어 다니던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거기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리사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아직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인데요.”

    하녀가 곤란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그 표정 위로 곤란함과 귀찮음이 뒤섞여 스쳤다.

    시녀로 일했던 아가씨는 이래서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

    리사는 치욕감에 손이 올라갈 뻔 했지만 방금 들은 말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잠이 일찍 깨서. 그것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해 봐.”

    “그게…… 얼마 전부터 돌던 소문인데요.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마셔요.”

    “너도 내가 우습니?”

    비록 쫓겨났다지만 리즈벳 황녀와 친분이 있을 리사에게 말하기엔 꺼림칙해 망설이던 하녀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가당치도 않아요, 아가씨. 저 같은 일개 평민이 어찌 감히 리사 아가씨에게 그런 마음을 품겠어요. 절대, 절대 아니에요.”

    “하, 일개 평민?”

    리사는 자존심이 상해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는 자신은 귀족씩이나 되어서 인생의 절반을 리즈벳을 위해 허비해야 했다.

    하녀와 자신이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모시는 이의 신분이 황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노데르안 공작이 벌써 에테르온에게 달라붙었다는 소식에 잠도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사방으로 힘을 쏟고 있는 것 같았지만 리즈벳이 황성에 버티고 있는 한 소용 없어 보였다.

    ‘리즈벳 튜니아트가 사라져야 돼.’

    그녀만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었다.

    그녀를 지지하던 세력들도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다시 평화로웠던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공로를 인정받은 자신은 황후가 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아틀레아 님이 나를 어여쁘게 여기셨으니까 분명 내치지 않으실 거야.’

    황성은 저잣거리의 소문이 흘러들기까지 시일이 걸렸다.

    그 전에 아틀레아를 찾아가 지금 이 정보를 알려 준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황녀님께서 마족을 소환했다니. 튜니아트의 귀족으로서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내용이야. 그런 게 괜히 날 리도 없고. 그렇지?”

    “그, 그런가요? 하지만 소문에 불과한데요.”

    짜악-!

    “꺄악!”

    결국 인내심의 한계가 온 리사가 손을 날렸다. 하녀가 가련하게 뺨을 감싸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하녀들이 하얗게 질려 덜덜 떨었다.

    오랜만에 본 리사의 성정은 날이 갈수록 흉포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으나 저택으로 돌아온 후 인내심의 기준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어제도 침실에 마련된 흰 캐노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전부 뜯어내고 최고급으로 가져오라 난리를 피워댔었다.

    바닥에 쓰러진 하녀를 내려다보며 리사가 거친 숨을 골랐다.

    “판단은 내가 해. 네가 말하지 못한다면, 너. 네가 자세히 말해 봐.”

    “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황녀께서 마족을 소환해 황태자님의 신성력은 물론 튜니아트 제국에 깃든 여신의 가호가 훼손됐다고 합니다. 오망성을 봤다는 자도 있고. 직접 봤다는 증인도 있다고 합니다.”

    “증인?”

    “네. 그런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소문을 전해 주던 자의 행색을 보아하니 허름한 것이, 황실과는 거리가 멀어보였습니다. 분명 정신 나간 자가 헛소리를 하는…….”

    리사의 머릿속에 붉은 생물이 스쳤다. 소름 끼치는 붉은 눈을 가진 드래곤.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의 사역마라고 했으나 리즈벳이 아끼며 친히 안고 돌아다니는 생명체였다.

    가끔은 직접 먹이까지 준다고도 들었다.

    “그자를 불러 내 앞으로 데려와.”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리즈벳의 평판을 손상시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지금까지 에테르온과 관련된 모든 소문을 그녀에게 뒤집어씌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분명 황후 마마도 자신을 어여삐 여겨 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그날 이후 라히트리안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그러니까 여신의 궁 앞에서 라히트리안과 산책하던 날 이후로 말이다.

    일단 무엇이든 수용한다는 게 무척 두려운 점이었다.

    “……저, 정말 여기가 코랄라우스 섬이라고요?”

    “황녀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바다를 옮기는 건 시간이 걸려서 황녀궁의 방문이랑 좌표를 이었어.”

    “그, 그래요? 정말 고마워요.”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바다를 옮겨 주려고 했다니. 그게 어려워서 코랄라우스 섬과 내 방의 좌표를 이었다니.

    하지만 사실이었다. 방금 나는 황녀궁의 가장 끝 방에 있는 방문을 열자마자 이곳에 도착했으니까.

    그러니까 라히트리안이 이렇게까지 열과 성의를 다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외쳤다.

    “와아, 바다다.”

    한편으로는 혹시나 누가 방문을 열고 이곳으로 오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렘무트는 신나서 모래사장으로 파묻혀 뒹굴었다.

    마계에서도 습한 지역에서만 살았다더니, 따뜻한 날씨에 기분이 들뜬 듯했다.

    평소 힘없어하던 모습과 달리 모래 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바닷물에 맨발을 담그면서도 하루아침에 달라진 라히트리안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그는 영생을 사니까 소멸 위기를 맞이하기라도 한 건가?

    정말 심심하다는 말 한마디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말이야?

    ‘아니지. 라히트리안은 세계관에서 가장 강대한 마력을 갖고 있잖아.’

    바다로 데려오는 것쯤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 있는 바다도 아니고 대륙의 끝이라니!

    잠시만 황성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이 있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 벗어난 거 아니냐고.

    “리즈벳! 이거 봐라. 내가 잡은 먹이다.”

    “윽.”

    “맛있겠지?”

    아직 핏기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징그러웠다.

    흐린 눈으로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는데 라히트리안이 나를 이끌었다.

    “황녀는 여기.”

    “이거 다 라히트리안이 준비한 거예요?”

    각종 다양한 해산물로 가득한 테이블을 보며 나는 놀라 물었다.

    옆에 있던 요리사가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하루 여러분을 모실 주방장 헨리라고 합니다.”

    “아,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즉석에서 시작되는 요리가 현란하다.

    그것을 구경하며 열심히 박수를 보내자 요리사는 더 화려하게 손을 움직이며 열중했다.

    어느새 옆으로 와 앉은 렘무트도 턱을 괴고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딴 것쯤은 나도 할 수 있어.”

    “쉿, 렘무트.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거든요.”

    “……내가 사냥하는 게 더 멋있어. 넌 멋도 모르냐.”

    방금 자기가 잡은 사냥감을 제대로 봐주지 않아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의외로,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잘했다며 렘무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네, 참 잘했어요, 렘무트. 사냥하는 것도 너무 멋있었어요.”

    됐냐. 그런 표정으로 렘무트를 보자 그가 휙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지. 나중에 또 보여 줄 테니까.”

    “네, 그거 참 기대되네요.”

    또 봤다가는 속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에 또 오게 되면 절대 사냥을 할 수 없는 곳으로 가게 해 달라고 해야지.

    요리사가 접시에 올려 주는 음식을 하나씩 먹고 있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나는.”

    “네?”

    “저건 잘했다고 하는데 나한테는 할 말 없나?”

    …….

    나는 포크로 들고 있던 생선을 툭 떨어뜨릴 뻔했다.

    라히트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답을 대촉했다.

    “응?”

    아. 정말 해롭다.

    나는 아찔하게 라히트리안의 얼굴을 보다가 포크를 들고 있던 손을 그의 입 가까이 가져다 댔다.

    라히트리안이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벌렸다. 포크 끝이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가 나왔다.

    혀가 입술 끝에 묻은 것을 핥고 지나가는 것으로 모든 행위가 끝났다.

    모든 게 반 박자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은 착각에 멍하니 보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이 말했다.

    “칭찬 고맙군.”

    “…….”

    미쳤나 봐.

    나는 쿵 떨어져 내리는 심장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나를 보는 라히트리안의 눈가가 접혀 들어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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