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예요, 라히트리안 님! 벌써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됐는지 아십니까?]
이안이 울먹였다. 라히트리안은 느긋하게 황성을 거닐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얼마 만에 튜니아트 신성 제국을 거니는 건지 헤아릴 수 없었다.
“황녀가 황제가 되면 돌아갈 것 같은데. 그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 이안.”
[농담도.]
“농담같이 들렸다면 유감인데.”
이윽고 절규하는 소리가 가득 귓가에 울렸다. 라히트리안은 픽 웃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멈춘 곳 앞에 튜니아 여신의 신전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유일하게 튜니아 여신이 강림할 수 있는 장소.
그날 이후 처음 본 것이었다.
그러니까, 천 년 전 그가 금단술을 제공해 주었던 날.
[아르고에게 아트레시아 제국 군사 정보는 왜 모아 오라고 하신 겁니까. 어디에 쓰시려고요?]
“황태자가 아트레시아 제국에 접촉했다고 하니까. 타국에 도움을 요청할 일은 쿠데타 말고 딱히 없지.”
[……튜니아트 제국을 싫어하시는 것치고 황녀님을 너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는 거 아닙니까?]
“네가 봐도 그렇지?”
이안이 보기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라히트리안은 이 감정을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지 아직도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불안감에 비롯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 황녀에게 마음이 생기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여신이 황녀를 보낸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헷갈리기 시작했어.”
어쩌면 그의 영생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접근하던 튜니아가 결국 성공한 걸지도 몰랐다.
그게 누가 되었든 전부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기는 건 왜인지.
‘여신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튜니아는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물어보고 난 다음에는?
만약 여신이 보낸 사람이 리즈벳이 아니라면 그때의 자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어느 쪽이든 리즈벳이 황제가 된 후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성력을 온전하게 얻은 리즈벳은 여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라히트리안은 지금도 불규칙하게 공명하는 심장 위로 손을 올려 보았다.
어느 순간 당연하다는 듯이 일상으로 스며들게 된 감각.
이제는 없으면 어색할 것 같은 감각이 오늘도 열심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라히트리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햇살 아래 눈부시게 서 있는 리즈벳이 보였다.
그녀는 라히트리안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라히트리안! 여기 있었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불규칙하던 공명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반가움과 애정 가득한 감정들이 밀려들자 라히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쥐며 신음을 내뱉었다.
“아.”
[라히트리안 님?]
“…….”
[라히트리안 님-. 제 말 듣고 계십…….]
“할 말 다 했으면 끊지.”
[아, 저 아직 할 말 남았……!]
라히트리안은 일방적으로 이안과의 연결을 끊어 버렸다.
그러고 싶어졌기에 그런 것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여기는 여신의 신전이잖아요. 앗, 설마…… 부수려고 온 거 아니죠?”
“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리즈벳의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하나 고민에 잠길 때 쯤, 그녀는 쉬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아 맞다. 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
“리사 해고하고 왔어요. 리사가 누구냐면 트리아 백작의 딸인데 지금까지 시녀로 절 감시하던 애……. 라히트리안?”
그는 조잘거리는 리즈벳을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자신은 저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걸 볼 수 있을까. 제 손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라히트리안은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다는 충동에 입을 열었다.
“계속해, 그래서 어떻게 됐지?”
* * *
오늘따라 라히트리안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방긋 웃었다.
“한 방 먹여 주고 왔다고요. 제가 ‘나가.’라고 했을 때 얼마나 멋있었는지 라히트리안도 봤어야 하는데.”
“못 봐서 아쉽게 됐어.”
“……어, 음. 그러게요. 앞으로 볼 일 많을 테니까 너무 서운해하지는 말고요.”
나는 낯간지러운 느낌에 뒷짐을 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길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 나란히 걷고 있었다. 큰 보폭으로 한 발 나아가자, 라히트리안보다 더 커진 내 그림자가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어 해실 웃는데 뒤에서 실소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라히트리안도 그림자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맞춰 왔다.
“왜 그렇게 봐요?”
“그러는 황녀는.”
“……지금 유치하다고 생각했죠. 이건 유치한 게 아니고 동심이 남아 있는 거거든요?”
“그렇다 치지.”
졌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볼을 부풀리며 그가 옆으로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냥 신기해서 그랬어요. 우리가 나란히 걷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이카르센 제도에서는 언제나 내가 먼저 쫓아다니기 바빴었다.
그것도 아니면 따돌리는 걸 포기한 라히트리안이 나와 짧게 대화를 끝내고 일방적으로 마법을 사용해 보내 버리든가.
오늘처럼 아무런 목적 없이 나란히 걷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있잖아요. 내가 만약에 황제가 되는 것까지 이루면, 나를 돕는 대가로 튜니아트를 요구할 거예요?”
“처음부터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음. 사실 그 전에…… 저한테 일 년만 시간을 줄 수 있을까 해서요.”
“…….”
“알겠어요. 선심 써서 열 달.”
“…….”
“아, 알겠어요! 그럼 6개월.”
라히트리안의 집요한 시선이 이어질 때마다 내 손가락은 하나씩 접혔다.
이게 아닌데.
벌써 네 개나 접힌 손가락을 보며 울상을 짓자 라히트리안이 느리게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라히트리안은 내 보폭을 맞춰 주고 있었다. 새로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왜 그런 기간이 필요하지? 갑자기 욕심이라도 생겼나?”
“네.”
대답을 듣자마자 라히트리안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나는 그가 이상한 오해를 할까 얼른 해명했다.
“실은, 그렇게 하다 보면 라히트리안도 언젠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자유?”
“이카르센 제도에 묶여 있는 거잖아요, 당신.”
튜니아트 신성 제국이 언제 다시 시작할지 모르는 탄압을 견제하기 위해서.
내 말에 라히트리안이 무표정하게 응시해왔다.
“그래서. 황녀가 무슨 재주로 나를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거지?”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 마법을 전파할 거예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인간은 금방 적응해요.”
“웃기는군. 그동안 마법이 어떤 이유로 배척받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런 말이 나오나?”
이런 반응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을 시도했다.
“알아요. 언젠가 또 마법을 숭배하는 집단이 생겨날지 모르죠.”
튜니아트 신성 제국은 겉으로는 신성력과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마력이 불길한 것이라며 마법사들을 탄압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편리한 마법에 현혹된 인간들이 마력을 숭배했기 때문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여신의 가호를 직접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마도구는 돈만 있다면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불을 피우는 것도 마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마도구야 말로 신의 은총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라히트리안의 오른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 봐요, 라히트리안.”
“말도 안 되는…….”
“당신이 없더라도 마력을 타고난 자들이 대륙에서 배척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요.”
“…….”
“네?”
라히트리안의 입술이 지그시 다물렸다.
일단은 좋을 대로 그 의미를 해석한 나는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던 방법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들어 봐요. 제가 방법을 몇 가지 생각해 봤는데요. 우선은 간단한 마도구부터…….”
동시에 한쪽 뺨을 감싸는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져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툭.
라히트리안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에 힘이 빠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리며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의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런 말을 하는데 그럴 리 없나.”
나를 보는 자안이 복잡한 감정들로 일렁였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어, 손 좀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말을 하는데.”
“……라히트리안? 제 말 들려요?”
심장이 떨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당황스럽게 그를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저 시선을 언제까지 감당해야 할까 곤란하게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였다.
“황녀가 원하는 대로, 6개월 주지.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마음대로’라는 부분이 묘하게 강조된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났다.
“당연하죠. 그때는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그게 무엇이든?”
“네! 무엇이든지…… 네?”
라히트리안의 입매가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갔다.
“지금 황녀가 동의한 거야. 그렇지?”
“어어, 그렇기는 한데요. 우리 조건 몇 개만 더 붙여요. 특약! 계약에는 특약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네?”
“안 돼.”
어쩐지 불공정 구두 계약에 동의해 버린 것 같은데.
‘이렇게 마음 돌린 것만으로 다행이라 해야 하나.’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감을 지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