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4/61)

* * *

아트레시아 제국의 황성.

근신 중인 2황자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체스 말을 들고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과하게 태평하신 거 아닙니까?”

“흠. 실력이 늘었네, 유스티아.”

“세이어드 님! 정말 튜니아트의 황태자를 도울 생각은 아니시지요?”

얼마 전 에테르온 튜니아트와 접촉한 일을 말하는 거였다. 세이어드는 가볍게 대꾸했다.

“일단은?”

유스티아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타국의 황권 다툼에 끼어들겠다니. 자칫하다가는 양국의 사이가 소원해질 수 있었다.

이카르센 제도에서 세이어드를 아트레시아 제국으로 날려 버린 사건은 이미 황성에서 유명했다.

그 일로 황후의 기세가 등등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1황자도 한결 여유로워졌는지 최근 귀족들 사이에서 유세를 떨고 다닌다 했다.

게다가 유일한 황실 마법사 아르고까지 잃게 됐으니, 제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만들었다며 세이어드는 거의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황제의 화를 풀기 위해서는 웬만한 노력으로는 안 될 것이다.

“이러다 정말 황태자 자리를 놓치게 생겼습니다.”

“정말 큰일이야. 이래서는 변방으로 쫓겨나는 쪽은 내가 되게 생겼으니까.”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본인 일을 너무 남일 대하듯이……, 하아.”

큭큭 웃는 세이어드를 보며 유스티아가 답답하다며 가슴을 내리쳤다.

“그런 거 알아?”

“모릅니다.”

“원래 정해진 흐름이 있는데 어긋난 것 같은 느낌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황녀를 보자마자 그런 게 느껴졌단 말이야. 혼자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것 같아. 꼭…….”

죽어야 하는 존재가 살아 있는 것처럼.

세이어드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카르센 성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그녀 주변으로 어긋난 흐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몸소 보여 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너도 분명 오망성을 목격했다 했지?”

“네. 세이어드 님이 들어가시고 바로 성 전체가 오망성으로 뒤덮였었습니다. 들어갈 수도 없었고요.”

“……어디에서 그런 재주를 얻은 걸까. 마력은 다룰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이제는 황위 계승권까지 얻었어.”

알 수 없는 여자다. 그래서 더 흥미가 돋기도 하고.

하지만 여신의 가호는 튜니아트의 황족 중 오직 한 명에게만 허락될 텐데.

이미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타국을 침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침략당하는 걸 허락하지도 않는 신성한 땅.

감히 누가 신성한 영역을 넘볼 수 있을까.

그런 신성한 땅의 주인인 튜니아트 혈족이 마족을 소환했다. 그 말을 믿는 자는 얼마나 될까?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겠군.”

“또 무슨 일 꾸미시는 거죠? 제발 저희 안전하게 움직이면 안 될까요? 에테르온 황태자와 접촉하는 것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얼마 전에는 암살자를 보냈더군. 그자의 목을 잘라 황후에게 보내 줬지.”

“……오, 맙소사.”

“네 말대로 튜니아트의 황태자와 친분을 이어가는 건 고려해 보는 게 좋겠어. 아무리 봐도 너무 멍청해 보여.”

에테르온 튜니아트를 처음 만났을 때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몸 안에 지닌 신성력은 분명 강대했으나, 정말 신성의 주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황녀에게 황위 계승권이 부여됐다는 건 오직 한 가지 의미밖에 없었다.

황녀도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

게다가 마침 튜니아트 제국 수도에 믿을 수 없는 소문까지 돌고 있지 않나.

“황태자가 신성력을 다루지 못한다던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어떻게 직접 확인합니까? ……저는 반대입니다.”

“같은 수법으로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어? 일단 황태자에게 점수도 딸 겸.”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이었지만 그게 두 명, 세 명이 되는 순간 진실이 되는 법이다.

“황녀가 마족과 계약했다는 소문을 흘려.”

“네?!”

“황녀가 바로 에테르온 황태자의 신성력을 손상시킨 주범이라고.”

그럼 답이 나오겠지. 세이어드는 느긋하게 웃었다.

* * *

리사가 황녀궁으로 돌아온 건 이틀이나 지난 후였다.

그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어 아예 돌아오지 않는 건가 했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수척해진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황녀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게 인사드리게 됐어요.”

“아니, 괜찮아. 정말…… 안색이 좋지 않은데. 아직 트리아 백작이 일어나지 못했니?”

“아니요. 아버지는 건강하세요.”

대화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하겠다는 분위기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흠, 완전히 돌아섰네.’

나는 간단하게 리사에 대해 판단을 내렸다.

섭섭함은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애틋한 감정은 없었다.

게다가 황후의 명령으로 내게 접근한 시녀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방을 간단하게 정리하던 리사가 렘무트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황녀님. 그런데 그 생물은 뭔가요?”

“아. 라히트리안의 사역마야.”

“……이카르센 마탑주의 사역마를 왜 황녀님께서 데리고 계세요?”

나는 렘무트를 내려다봤다.

신기하게도 그는 내게 닿아도 화상을 입지 않았다. 처음 길리트 궁에서 잠시 품에 안았을 때부터 그랬다.

개인적인 추측으로 더는 렘무트가 나를 해칠 수 없으니 신성력이 발휘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신기하기도 하고 귀여워서 내가 데리고 있겠다고 했어.”

[누구더러 귀엽다는 거야! 그런 치욕스러운 말은 처음 들어 본다! 당장 취소하지 못 해?!]

캬악.

렘무트의 꼬리가 바짝 섰다. 나는 통통한 꼬리를 혼내듯 엄하게 톡 내리쳤다.

어디서 반항이야.

움찔한 렘무트가 분한 얼굴로 꼬리를 말아 넣었다. 그는 의외로 꼬리에 약했다.

“조물거리면 얼마나 귀여운데?”

나는 머릿속에 울리는 렘무트의 말을 무시하며 볼을 덥석 잡고 이리저리 주물거렸다.

“캬악!”

“봤지?”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물끄러미 보던 리사가 정리 중이던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두 분 깊은 관계이신가 봐요. 마법사와 사역마의 사이는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응? 아…… 어쩌다 보니 조금 친해지게 됐어.”

아마 라히트리안이 이 말을 들었더라면 바로 부정하겠지만.

그나저나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아침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황녀님.”

“응.”

“정말 에테르온 황태자님과 황위를 겨룰 생각이세요? 황녀님은 한 번도 그분께 대드신 적 없잖아요.”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리사도 아차 하며 입을 막았다.

그럼 저건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이 튀어나왔다는 건데.

나는 옆으로 렘무트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리사? 지금 내 시녀가 그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는데.”

당연히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방금 리사가 한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리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당장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꼭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리사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해요, 황녀님.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차라리 내가 아트레시아 제국의 황후가 되었으면 하는 거지?”

움찔.

리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모두에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리사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 모두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걸. 너는 내 시녀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

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태도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제는 명령으로도 내 시녀로 있는 게 싫은 거구나. 시녀가 아니라 더 높은 자리를 원하기 시작한 거다.

이틀 동안 트리아 백작이 옆에서 바람이라도 넣은 모양이지.

나는 생긋 웃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리사, 너 설마 튜니아트 제국의 황후가 되고 싶은 거야?”

“……제, 제가 어찌 감히.”

그러나 열망으로 일렁이는 눈동자는 숨길 수 없었다.

“당치도 않아요. 저는 황녀님께서 위험해지실까 봐 걱정되어…….”

“정말로?”

“정말이에요.”

믿어 달라며 간절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미 조금 전 보인 눈빛이 진실을 알려 주었으니까.

아틀레아에게 이용당했다는 것도 모르고 진심으로 황후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난 고작 황후 자리에는 관심이 없거든.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데 내가 왜 황후 자리 따위에 관심을 보이겠어?”

리사의 눈이 흔들리며 크게 뜨였다.

나는 그런 리사에게 가까이 다가가 해사하게 웃었다.

황성으로 돌아온 이상 리사를 곁에 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겠지. 관계를 정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트리아 백작에게 가서 전해. 그가 그토록 바라던 공작위는 절대 얻을 수 없을 테니 헛수고하지 말라고. 이건 그간의 정을 생각해 특별히 하는 말이니까 꼭 전해야 한다?”

“……황녀님?”

“아, 그리고 이제부터 황성으로 출근할 필요 없어.”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멍하게 올려다보는 리사에게 명령했다.

“나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