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3/61)

“황녀님의 명령이니 따르기는 하겠습니다만, 굳이 제가 돕지 않아도 로이드 윈저는 공작위에 앉을 겁니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말입니다.”

카드리아 공작은 그 말을 남기고 황녀궁에서 정확히 한 시간이나 버티다가 떠났다.

“그럼 로이드는 공작이 되길 원하지 않는 건가?”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왜?

원작에서 로이드는 분명히 죽었다. 윈저 가문도 멸문했을 테고. 그러니 트리아 백작이 공작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염려해 카드리아 공작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카드리아 공작의 말에 의하면 로이드는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공작의 자리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드리아 공작이 나가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라히트리안이 말했다.

“아틀레아 튜니아트를 위해 지금까지 윈저 공작의 숨을 붙들어 둔 거겠지.”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길래 공작위를 마다한다는 말인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오히려 로이드가 공작이 되는 게 아틀레아에게도 더 좋은 일 아닌가?

그러나 라히트리안은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며 픽 웃었다.

“황후의 권력이 필요 이상으로 강해지면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윈저 가문은 그녀를 위해 납작 엎드리고 있던 거겠지.”

“로이드가 그렇게까지 황후를 위한다면 왜 저를 돕는 걸까요.”

“황후를 위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겠지.”

“네?”

“인간은 가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거든. 특히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막기 위해 반대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해.”

나는 그 말에 로이드의 입장이 바로 이해됐다.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려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뜻이었다.

“라히트리안은 그런 적 없어요?”

“없어. 단 한 번도.”

그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라면 원하는 게 무엇이든 발아래 둘 수 있게 해 줄 거야.”

그래서 그런 걸까. 마치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 * *

서로 꼭 닮은 두 남매가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평소와 달리 한쪽은 상석에 한쪽은 그 아래 부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리즈벳을 잘 데려와 주었구나. 고생했다, 로이드.”

“명령을 이행한 것뿐입니다.”

“할 말은 그게 끝인 거니?”

아틀레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침묵이 이어졌다.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로이드!!”

“저는 이제 공작이 되고자 합니다.”

강한 어조의 말에 아틀레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처음 보는 로이드의 모습에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저는 튜니아트를 아끼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럼 서로 다른 방법으로 제국을 만들어 가면 되겠군요.”

아틀레아는 초조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부터 로이드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던 걸까.

그녀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로이드가 자신을 등지다니.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아틀레아는 살살 달래듯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네 마음은 잘 알겠어. 그게 문제라면 다음 대부터 바로잡으면 돼. 지금은 에테르온이 황위에 오르는 게 먼저야.”

“정말 그렇게 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약속하마.”

“마마, 그럼 묻겠습니다. 튜니아트 제국을 위해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으십니까?”

“……뭐?”

“황실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협조한 자들은 모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대가는 목숨일 것이었다.

로이드는 지금 아틀레아에게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네가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나를 버리겠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할 수 있어!”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저도 달게 죄를 받을 것입니다.”

“네가 미쳤구나. 가문 사람들이 그걸 지켜볼 것 같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

그들은 이미 공작가에서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는 아틀레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로이드. 이제 어쩌면 좋지?”

“누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말라니? 아버지가 쓰러지자마자 다들 나를 업신여기잖아! 아무도 내가 황후가 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누님이 바라는 게 황후의 자리입니까?”

“맞아,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그리고 날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받은 치욕을 되돌려줄 거야. 그게 누구든.”

윈저 가문의 혈통에는 본디 여식이 없었다.

그러나 황후를 배출하길 원했던 윈저 공작은 방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아틀레아를 어린 나이에 윈저 가문에 입적시켰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가문에서 권위 있는 장로들을 제외하고도 몇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되었다.

이 세상에 아틀레아와 로이드, 윈저 공작만 알고 있는 것이 되었으니까.

“이제 와 나를 등지겠다고?”

아틀레아는 허탈함을 담아 웃었다.

“내가 황후가 되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너야. 로이드.”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이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만약 황후가 그런 자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저는 돕지 않았을 겁니다.”

“하! 웃기지 마.”

“제 실수이니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틀레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실수.

옆에서 그녀를 도와 꿈에 그리던 황후의 자리를 손에 넣은 것을 고작 ‘실수’라 치부하다니.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아틀레아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로이드는 결코 모르지 않았다.

카로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최선을 다하셔도 됩니다.”

“…….”

“저도 그럴 테니까요.”

“…….”

“그럼 황후 마마, 부디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탁.

문이 닫혔다. 아틀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 * *

방에서 나온 로이드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아틀레아와의 연은 끝이었다.

로이드는 황후궁을 나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는 무슨 볼일로?”

“…….”

“대답 좀 해 주면 안 되나.”

로이드는 벨리언을 무시했다.

그가 볼 때 벨리언 카드리아는 악독한 취미가 있었다. 바로 상대의 기분을 긁어 반응을 보고 즐기는 거였다.

어쩌다 저런 취미를 갖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벨리언 카드리아와 마주쳤다는 사실 하나로 로이드의 기분이 지하 끝까지 내려갔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벨리언은 걸음을 빙글 돌려 로이드 옆에 붙었다.

“……황후 마마께 볼일이 있어 찾아온 거 아닙니까?”

“지금 저기를 들어가라고 한 겁니까? 농담도 참.”

“농담 아닙니다만.”

“……매정하기는.”

미치지 않고서 지금 황후와 만나려는 자는 없을 것이었다.

“에테르온 황태자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아아.”

벨리언의 입매가 씩 올라갔다.

“귀족들이 줄지어 알현을 요청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황태자는 잔뜩 겁에 질려서 신성력을 증명할 방법을 아득바득 찾고 있지요.”

* * *

에테르온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알현 요청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진정하십시오, 황태자 전하.”

“……나데로안 공작! 카드리아 공작가가 리즈벳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소식도 못 들었습니까?”

“카드리아 가문만이 아닙니다. 윈저 가문도 그렇지요.”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해야겠습니다.”

에테르온은 주변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굳이 나서서 무얼 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먼저 해결해 주는 것에 익숙해진 탓이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황위 다툼을 이제 와 하라니? 그는 불안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일단 귀족들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아틀레아라면 무언가 해 줄 것이다. 그녀는 한 번도 에테르온을 위험에 빠지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데로안 공작은 그래서는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황후 마마를 찾아가 어쩌시려고요? 모든 행동이 귀족들의 귀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말에 에테르온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데로안 공작이 검지를 세웠다.

“첫째. 수도에 나도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신성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럼 귀족들도 잠잠해질 터이니 급한 불은 해결되겠지요.”

“신성력을 보여 주는 방법이라니…….”

에테르온은 선뜻 그러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몸에 새겨진 금단술을 훼손하는 방법은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 제국민 앞에서 발작이라도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제물을 미리 준비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최근 발작의 고통을 대신 해 줄 육신을 구하기 번거로웠으나, 다른 방법을 모색해 두었기에 에테르온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다음 방법은 뭡니까.”

공작은 두 번째 손가락을 펼쳤다.

“둘째. 하루라도 빨리 황태자비를 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데로안 공작의 진짜 목적이었다.

에테르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 상황에서 국혼이라니 제정신입니까?”

“황녀를 생산하면 모든 게 끝납니다.”

신성을 지닌 후계자가 태어나면 그들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에테르온의 벽안이 흔들렸다.

“나데로안 공작가의 여식을 황태자비로 맞이하라는 겁니까?”

“그렇게 해 주셔야 저희 가문도 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나데로안 공작은 불확실한 일에 가문을 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적어도 황태자비의 자리는 얻어야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거짓으로 만들어진 황태자를 데리고 모두의 눈을 속여 황위에 올리는 일은 무척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공작가에는 여식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방계의 여식을 찾아보겠습니다.”

방계. 그 말에 에테르온이 멈칫했다.

황후의 자리에 방계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리즈벳의 마지막 각성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건 안 되겠군요.”

“그럼 명목상으로라도 올려 두시지요.”

“……고려는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에테르온은 나데로안 공작의 말을 들어줄 의향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아트레시아 제국이라는 패가 남아 있었다. 만약 리즈벳을 이길 수 없다면 군사력으로 밀어 붙이면 된다.

그다음 리즈벳을 손에 넣은 후 영혼을 종속시키기만 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시기가 늦어 그녀가 2차 각성을 끝마쳤다 하더라도 금단술을 이용해 다시 가져오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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