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2/61)

역시 대가 없는 호의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드리아 가문에서는 당연한 요구이기도 했다.

만약 나를 돕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복구하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수 있었다.

“카드리아 경, 그 전에 우리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

“어떤 걸까요.”

“당신은 아직 후계자잖아요. 저는 카드리아 공작이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니면 아무것도 믿을 수 없거든요.”

“확실히 그럴 수 있겠군요. 가문에서 저를 잘라낼 거라고 우려하시는 겁니까?”

그, 그렇게까지 멀리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게다가 자신이 꼬리 자르기로 버려질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게 조금 소름 돋았다.

“뭐, 대충은 그래요.”

“그럼 저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벨리언이 내 옆에 앉아있던 라히트리안을 바라보았다.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을 끌어들여 황녀님께 이득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오히려 귀족들의 반발만 사지 않을까 우려되는군요.”

“그건…… 카드리아 경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라히트리안은 오해를 풀게 되면 즉시 이카르센 제도로 돌아갈 예정이거든요.”

“그 범인이 잡히기는 하는 겁니까?”

예리한 인간 같으니.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그럴 줄 알았다며 벨리언 카드리아가 생글 웃었다.

처음부터 웃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말하는 뉘앙스에 따라 묘하게 달라지는 분위기가 긴장을 풀지 못하게 만들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카드리아 경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것도 그렇군요. 단지 저는, 황녀님께서 황위에 앉으셨을 때 이카르센 제도와 확실하게 연을 끊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벨리언이 라히트리안을 보며 이유를 설명했다.

“이카르센 제도와 과거에 쌓인 악연은 풀 수 없을 테니까요.”

한때 튜니아트 신성 제국이 마력을 타고난 인간을 탄압한 적이 있었다.

신성한 가호 아래 있어야 할 인간이, 삿된 기운에 의존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을 탐낸다는 이유에서였다.

정말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결국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존재들은 모습을 감추고 숨어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튜니아 여신은 놀랍게도 침묵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라히트리안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차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아 나는 걱정스럽게 라히트리안을 곁눈질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튜니아트 신성 제국 위에 있는 존재지, 고작 이런 땅덩어리가 아니야.”

즉, 여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튜니아를 따르는 튜니아트 제국의 귀족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었다.

쯧.

뒤에서 턱을 괴고 구경하고 있던 렘무트가 혀를 차며 이불 속으로 폴싹 뛰어 들어갔다.

라히트리안의 말을 듣던 벨리언이 안도했다는 듯 생긋 웃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이쪽은 튜니아트 위에 있는 존재는 관심 없어서.”

“……하?”

“그럼 튜니아트 제국에는 관심 꺼 주시길.”

……뭐 저런 불경한 말을 황녀 앞에서 해.

덕분에 카드리아 공작 가문이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는 너무 잘 알겠다.

“그래서, 황녀님께서는 저희 가문에 무엇을 제공해 주실 수 있으실는지?”

“나는…….”

* * *

“……그런 의미에서 좀 움직여 주시죠, 아버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시든가요.”

카드리아 공작가의 집무실.

벨리언과 무척 닮은 남성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목에 디밀어진 검날을 내려다봤다.

주륵.

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방울이 뚝 책상 위로 떨어졌다.

“아, 그만 자리에서 내려오신다고요?”

“윈저 가문 후계자랑 어울리더니 이제는 하극상이냐? 쓸데없는 물이 들었구나.”

“말은 바로 하셔야죠. 제가 물들인 겁니다.”

벨리언은 자신이 물들었다는 말이 불쾌한지 인상을 찡그렸다.

“미친놈.”

카드리아 공작은 생각나는 말을 순화 작업을 거치지 않고 툭 뱉었다.

공작이 손가락 끝으로 검날을 밀어냈다.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이 되바라진 놈을 어떻게 하면 좋지.

카드리아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이 원하는 게 뭐냐. 공작이 되고 싶은 거라면…….”

“에테르온 황태자가 우세해지면 바로 단두대로 올라갈 텐데 제가 왜 그 자리에 앉고 싶겠어요?”

“…….”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천천히 내려오시죠.”

하여간 말하는 꼴 하고는.

저놈의 화법은 아무리 충고해도 고쳐지질 않았다.

‘그리 정 붙이지 말라 어릴 적부터 훈련시켰거늘.’

날카로운 말투 속에 담긴 잔정을 읽은 그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드리아 공작 가문은 철저하게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었다.

후계자는 공작의 목을 치고 올라가야 하는 게 관례일 정도이니 말 다 한 셈이었다.

“난 널 그렇게 키운 기억이 없다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들 마음 상해요.”

“……그래서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거냐?”

그러는 카드리아 공작도 딱히 벨리언의 공격에 반격하지 않았기에 지적할 입장은 아니었다.

벨리언이 검을 검집에 넣고 책상에 걸터앉았다.

“이번에 리즈벳 황녀를 보고 왔는데 꽤 재밌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카드리아가 협조하는 대가로 무얼 내놓는다고 하더냐.”

웬만한 제안으로는 저 콧대 높은 벨리언의 성에 차지도 않았을 텐데.

저리 유쾌한 얼굴을 하는 걸 보면 나름 황녀가 제대로 된 대가를 주기로 한 모양이다.

“‘이번에 카드리아 공작이 직접 움직여 준다면,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 드릴게요.’라고 전해 달라더군요.”

“……뭐?”

뭘 보장해?

카드리아 공작은 귀를 의심했다. 혹시 자기가 노망 난 건 아니겠지.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

그럼 방금 들은 말이 정녕 벨리언의 입에서 나온 게 맞는다는 건가?

여러 번 황녀의 제안을 곱씹어 보던 카드리아 공작이 집무실을 떠나가도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것참.”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긴 세월 동안 카드리아 가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으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얻지 못했던 것.

그리고 다음 날.

카드리아 공작이 황녀에게 첫 독대를 요청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 * *

“처음 뵙는군요, 리즈벳 황녀 전하. 바누스 카드리아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찾아올 필요는 없었는데.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찾아온 바누스 카드리아 공작을 보며 나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췄다.

그것보다.

‘정말 안락한 노후로 끝났다고? 이게 먹혔어?’

누가 들으면 황당하다고 욕할 정도로 허술한 제안에 카드리아 공작이 직접 나서다니.

바누스는 내 놀란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믿기지 않으십니까? 제가 황녀 전하 앞에 앉아 있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아요.”

“때로는 예상치 못한 것이 적중하는 법이니까요.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카드리아 가문의 결핍을 황녀 전하께서 현명하게 파악하셨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카드리아 공작 가문의 결핍이라.

단순히 가문을 존속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나는 예전에 렘무트에게 황성을 구경시켜 주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렘무트가 한 말이 있었다.

신성력을 다루는 자가 정말로 튜니아트 황족만 있었을 것 같느냐고.

신관도, 성기사도 본래는 신성력을 다룰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보면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신관과 성기사들은 모두 특정 가문에서만 배출됐었다.

그 의미는…….

“설마 카드리아 가문도 신성력을 잃은 건가요?”

“저희 가문 말고도 상당히 많은 가문이 잃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천 년 전, 황족 한 명의 욕심으로 얼마나 많은 것이 어긋났는지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아무도 그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던 거죠?”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못한 거지요. 당시 신성을 잃은 가문의 위상은 바닥으로 떨어졌으니까요. 지금은 세월이 너무 흘러 진실을 아는 자도 거의 없을 테고요.”

신성을 잃은 가문은 생존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을 것이고, 지금의 카드리아 공작 가문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카드리아 공작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선조가 황제와 친우여서 천만다행이었지요.”

“……하지만 제가 황제가 된다고 해서 신성력이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건 함부로 약속해 드릴 수 없는 문제예요.”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바누스 카드리아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제국에 내려온 마지막 신탁의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그건 황실만 알고 있는 건데.

나는 떨떠름하게 물어봤다.

“……황실에 사람 심어 놨어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바누스가 생긋 웃었다.

응, 심어 놨구나.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마지막 신탁 내용이 무엇인가요?”

“‘여신의 가호가 완전히 부서질 때, 모든 것이 돌아오리라.’”

너무 꺼림칙한 예언이었다. 가호가 완전히 부서졌는데 어떻게 모든 것이 돌아온다는 걸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든 것이 돌아온다는 문구였다.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과거 영광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로 들렸으니까.

“기회가 왔으니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습니다. 그게 무엇이든지요.”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하고 가요.”

“무엇입니까?”

“황실에 사람 심는 것 말이에요.”

지금은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는 독이 될 것이다.

게다가 제국의 마지막 예언까지 알고 있는 거라면, 꽤 오래된 일이지 않나.

카드리아 공작이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버릇은 고치도록 하지요.”

바누스 카드리아는 그리 말하며 느긋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그가 황녀궁에 도착한 지 삼십 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카드리아 공작이 황녀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귀족들은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었다.

“그럼 카드리아 가문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황녀 전하?”

그야 당연히.

“트리아 백작 측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트리아 가문은 왜 관심 가지십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수준일 텐데요.”

“윈저 가문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하루 빨리 로이드를 공작으로 만들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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