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61)
  • * * *

    “으아아…….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카로스에게 돌아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황급히 길리트 궁을 나섰다.

    긴장감으로 어떻게 황녀궁 길목까지 도착했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벤치에 털썩 앉았다.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려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울먹이며 얼굴을 푹 감쌌다.

    “독살당할지도 몰라.”

    “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아, 아닌가. 그건 너무 티 나니까 사고사로 위장한다거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나데로안 공작에게 맞서다니!

    오만 가지 타살 방법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떤 방법이든 끔찍한 건 마찬가지인지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는 라히트리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겁이 많아서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그래도 황위 계승권을 무사히 얻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죠?”

    그렇다고 해.

    간절하게 라히트리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글쎄, 나야 모르지.”

    “진짜 이럴 거예요?”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황녀.”

    “……맞는 말이기는 하네요.”

    “그리고 뭐가 걱정인지 모르겠군.”

    나무에 기대어 있던 라히트리안이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납치까지 당해 줬더니.”

    “……납치까지는 아니거든요.”

    “아, 그럼 나를 강제로 불러서 끌어안았던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왜 말이 그렇게 튀어!

    라히트리안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으니 누가 봐도 납치하려고 작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심각하던 것도 잊고 그만 말하라며 라히트리안의 입을 막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라히트리안은 내 팔을 피하며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자안에 장난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황녀가 내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줄 미처 몰랐어.”

    “그만, 좀! 그런 거 아니란 거 알잖아요!”

    나는 울컥하며 폴짝 뛰어올랐다.

    비스듬하게 나를 내려다보던 라히트리안이 어딘가를 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황녀,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후회할 걸.”

    “후회는 무슨. 당신 입을 막지 않으면 그게 더 후회될 것 같거든요.”

    “난 분명히 말했어.”

    라히트리안이 느슨하게 잡고 있던 내 손목을 풀었다.

    ……어라?

    갑작스럽게 허공을 배회하는 팔에 중심을 잃고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라히트리안을 바라봤다.

    앞으로 기울어지는 몸이 무척 느리게 느껴졌다.

    “그러게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지.”

    무슨 이런 뻔뻔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순식간에 주변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라히트리안의 가슴팍으로 쏠림과 동시에 풀썩 잔디밭 위로 엎어졌다.

    가볍게 허리를 감싸며 다치지 않도록 몸을 지탱해 주는 손이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으으.”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내 아래로 라히트리안이 깔려 있는 게 보였다.

    나는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 해요? 손을 갑자기 놓으면 어떡해요?”

    “무겁군.”

    “무, 무거……, 하! 내가 무거워요? 정상 체중이거든요?”

    “그래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인데?”

    라히트리안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움찔거리며 재빨리 일어나려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 것은.

    나와 라히트리안이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부루퉁한 기색이 가득한 렘무트를 한 손으로 달랑달랑 들고 있는, 벨리언 카드리아가 서 있었다.

    “이것 참…….”

    벨리언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더니 곧 ‘아차’ 하며 나머지 한 손으로 과장되게 눈가를 가렸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노을빛 눈동자가 선명하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 옷자락을 털었다.

    “아……. 카드리아 경, 오해하지 말아요.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

    옆에서 느긋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라히트리안이 보였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는 모습에 나는 울컥해 그를 쏘아보았다.

    “왜 나 혼자 해명하고 있는 걸까요?”

    “그럼 내가 해명할까.”

    “……아니 됐어요. 하지 마세요.

    그에게 맡겼다가 더 난처한 상황이 될 것 같았다.

    벨리언 카드리아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게 보였다. 그는 일부러 헛기침을 하더니 공손하게 예법을 갖춰 인사했다.

    그 와중에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렘무트가 무척 시선을 끌었다.

    “리즈벳 황녀님을 뵙습니다. 사실 이걸 돌려드리려고 왔습니다만…….”

    “이거라니!”

    목덜미가 잡힌 렘무트가 바둥거리며 퉁퉁한 발을 마구 흔들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반항하다 잡힌 건지 곳곳에 잔상처가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벨리언의 상태도 영 좋지 못했다. 곳곳에 베인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꽤 난폭하기에 잡는 데 고생 좀 했습니다. 혹시 황녀님께서 아끼는 생물이라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당연하지! 리즈벳, 당장 이 인간을 죽여 버려! 이 몸을 발로 찼단 말이야!”

    아아, 머리야. 나는 이마를 짚었다.

    * * *

    탁. 탁. 탁.

    렘무트가 제 심기가 상했다는 걸 보여 주듯 꼬리로 침대를 쳐 댔다.

    잔뜩 올라간 눈매가 벨리언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어, 카드리아 경. 렘……, 을 무사히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어디에서 찾았어요?”

    이름을 말 하려다가 ‘렘’이라고 말하자 렘무트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는 멋대로 ‘렘’이라 불린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몇 번이고 제 이름을 중얼거렸다.

    “화단에 처박……. 아니, 화단 근처에서 길을 잃은 걸 발견했습니다.”

    “아.”

    화단에 처박혀 있었나 보다. 그래서 뿔 끝이 저렇게 흙투성이인 건가.

    나는 토라진 렘무트의 상태를 천천히 살폈다.

    무의식중에 입꼬리가 흐물흐물 풀어지려는 걸 애써 자제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퉁퉁하면서 짧은 손발. 이마에 뭉툭하게 솟아 있던 양 뿔과 볼록하게 살이 오른 배.

    그 뒤로 제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바닥을 툭툭 내리치던 꼬리까지.

    ‘진짜 안 어울리게 귀엽잖아.’

    성질내며 난리를 피우던 그 사나운 렘무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리즈벳, 나는 저 인간이 싫어. 피 냄새가 진하게 난다고. 가까이 둬서 좋을 게 없어.”

    “네네, 알겠어요. 조금 있다가 상처 치료해 줄 테니까 기분 풀어요.”

    “저 인간이 싫다니까?!”

    고집을 부리는 렘무트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벨리언 카드리아가 픽 웃었다. 명백한 조소였다.

    나는 이러다가 벨리언 카드리아가 날 찾아온 용건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끝날 것 같아 단호하게 말했다.

    “렘, 조용히 해요.”

    렘무트가 조용해졌다.

    좋아, 한 명은 처리했군.

    벨리언 카드리아가 의외라는 듯 신기하게 나와 렘무트를 번갈아 바라봤다.

    “저건 신기하게 말도 하는군요.”

    “네, 라히트리안이 선물한 사역마거든요.”

    “아아. ……사역마라고 했었지요.”

    이해했다며 벨리언 카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절 찾아온 이유가 뭐예요?”

    “로이드에게 듣지 않으셨는지요?”

    로이드. 친근하게 로이드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나는 내심 놀랐다.

    두 사람이 원래 친했던가? 그런 것 치고 로이드는 꿋꿋하게 ‘카드리아 경’이라고 부르던데.

    “네, 듣기는 했어요. 카드리아 가문에서 절 돕기로 했다고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런 건 제대로 전달했나 봅니다.”

    “……두 사람 사이 안 좋아요?”

    “저희는 항상 사이가 좋습니다만.”

    아니, 전혀 안 좋아 보이는데. 친하다는 기준이 너무 낮은 거 아니야?

    나는 로이드가 왜 벨리언 카드리아를 언급할 때마다 언짢아하는 기색을 내비쳤는지 조금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둘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벨리언은 황녀궁 내부를 둘러보다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봤다.

    “그런데 시녀가 보이지 않는군요.”

    “……아마 트리아 백작을 보러 간 거겠죠. 그가 리사의 아버지거든요.”

    사절단으로 갔던 트리아 백작이 반 기절해서 도착했으니 걱정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벨리언은 오히려 잘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아 가문을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요즘 백작가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까요.”

    “……트리아 백작가가 어떻게 심상치 않은가요?”

    트리아 백작이 원작에서 공작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벨리언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공작이 되고 싶어 하지요. 아마도 윈저 가문의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닌가 싶은데. 지금 공작도 병환이 깊으니까요.”

    “……그럼 위험한 거 아닌가요? 로이드가 황실을 배신했다는 걸 황후가 알고 있잖아요.”

    불안한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배신감에 분노하던 아틀레아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믿었던 존재에게 배신당한 사람은 가끔 잔인할 정도로 가차 없어지기도 했다.

    벨리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로이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아까 두 사람 사이가 좋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건 좀 앞뒤가 다른 거 아닌가.

    하긴, 카드리아 공작 가문의 사람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일지도 몰랐다.

    방금 렘무트가 그에게서 진한 혈향이 진동한다고 했던 것처럼.

    그것이 벨리언 카드리아의 본 모습일 테니까.

    내가 조금 경계하듯 자세를 바꾸자 기민하게 변화를 알아차린 벨리언이 생긋 웃었다.

    “오늘 제가 황녀님을 찾아온 건, 한 가지 여쭙기 위해서입니다.”

    “물어볼 게 뭔가요?”

    “만일 카드리아 공작가에서 황녀님을 돕게 된다면, 황녀님께서는 저희 가문에게 어떤 보상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