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50/61)
  • 그러나 카로스는 무슨 생각인지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럼 황녀는 피곤할 테니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

    “네,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돌아가기에는 본론도 꺼내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나는 이대로 궁으로 갈 수 없어 슬쩍 운을 뗐다.

    “아, 그런데…… 아직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이렇게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여있는 건 카로스가 판을 만들어 두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자신감을 얻어 허리를 펴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가 아시는 것처럼, 저는 납치된 게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황성을 탈출했던 거예요.”

    자고로 무슨 싸움이든 ‘선빵 필승’이었다.

    귀족들의 눈이 크게 뜨이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들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으나, 온 신경은 내게 집중하고 있을 것이었다.

    카로스가 손짓했다.

    “계속하도록.”

    “제가 탈출을 감행했던 건 황실에서 살아남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리즈벳. 어찌 그런 불경한 말을 입에 담아!”

    아틀레아가 더 이상의 말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끊어냈다.

    지금도 위험 수준의 발언인데 여기에서 더 노골적으로 말을 꺼낼까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귀족들의 반응을 천천히 살폈다.

    황녀가 황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탈출했다는 말이 귀족들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황실에 저희가 모르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귀족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황실의 문제는 곧 귀족들의 문제로 직결됐다.

    승계 다툼도 없는 황녀가 황성을 떠날 정도면 작지 않은 문제라는 뜻인데, 그동안 그 사실을 숨겨 왔다면 꽤 중요한 이슈거리였다.

    “아무런 문제없습니다. 리즈벳이 아직 어려……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게지요.”

    아틀레아가 경고의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아틀레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야 할 말을 꿋꿋하게 이어갔다.

    “그런 저를 폐하께서 직접 사절단까지 보내 부르셨다는 건…… 제게 황위 계승권을 부여하신 걸로 이해해도 될까요?”

    “당치도 않은!”

    아틀레아가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로스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가만히 있어, 아틀레아.”

    카로스의 명령에 제자리에서 몸을 움찔거린 아틀레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호흡이 가빠진 상체가 들썩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당연하게도 귀족들은 내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여신의 가호를 받지 못한 황족이 황위에 도전하겠다는 의미였으니까.

    여신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튜니아트의 혈통이 하고 있으니 믿기 어렵겠지.

    “황후 마마 말씀대로 아직 황녀님께서 어려 고집을 부리시는 듯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철없는 발언이 아닙니까.”

    “하지만 황실에 저희가 모르는 문제가 있는 거라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기는 해야 할 겁니다.”

    귀족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카로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카로스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황녀의 요청을 허락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리즈벳 아니샤 튜니아트에게도 황위 계승권을 부여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냉큼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숨죽이고 카로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에테르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아바마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리즈벳은 신성력이……!”

    그러나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에테르온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신성력이…….”

    그동안 내게서 빼앗아간 신성력으로 인해 에테르온이 발작했다는 것을 에테르온도 알고 나도 알았다.

    내가 생긋 웃어 보이자, 에테르온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점점 그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귀족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에테르온을 쳐다봤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에테르온의 편에 선 귀족 중 한 명이 나섰다.

    “황녀께서는 신성력이 없으시지요. 황태자께서는 그 말을 하시려는 겁니다.”

    나는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하나 풍채가 좋은 차가운 인상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삼대 공작 중 한 명인 나데로안 공작이었다.

    나데로안 공작가는 제국에서 가장 큰 사업체를 운영해 막대한 자금줄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방계 또한 막강한 권력을 보유하고 있는 튜니아트 제국의 실세 중의 실세인 가문이었다.

    또 나데로안 공작은 평판까지 좋아 귀족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가 나서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데로안 공작이 차갑게 황제를 응시했다.

    “황녀께서는 여신의 뜻을 거스르려는 생각이십니까? 황실의 안위가 심히 걱정되는군요.”

    나데로안 공작은 평소 황실에 협조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공작이 카로스에게 정면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뻔했다.

    ‘차기 황후 자리를 나데로안 공작가에서 노리고 있는 거야.’

    이번 대 황후는 윈저 가문 출신인 아틀레아였고, 현재 카드리아 공작가에는 여식이 없으니 당연히 나데로안 공작가로 차기 황후를 배출할 기회가 돌아갈 것이다.

    그런 유리한 상황에서 황녀에게 황위 계승권을 부여한다는 건 나데로안 공작에게 매우 거슬리는 사안일 거였다.

    공작의 적극적인 두둔에 에테르온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리고 아틀레아는…….

    지그시 주먹을 쥔 채 로이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테르온을 두둔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로이드의 태도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는 내가 황위 계승권을 인정해 달라는 말을 했을 때부터 로이드만 보고 있던 것 같았다.

    복잡해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 위로 짙은 분노가 스쳤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로이드는 여전히 정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로이드도 마음이 심란하겠어.’

    나는 얼른 상황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나데로안 공작 앞으로 걸어갔다.

    내 뒤로 라히트리안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공작 앞으로 걸어가 서자, 귀족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양옆으로 갈라졌다.

    “공작께서는 제게 신성력이 없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공작께서는 에테르온 오라버니가 신성력을 사용하는 걸 본 적 있으신가요?”

    나는 웃으며 에테르온을 돌아봤다.

    “아니면 여기 계신 분들 중 한 분이라도 에테르온 오라버니께서 신성을 다루는 걸 본 적 있으신지요?”

    장내가 조용해졌다. 당연히 있을 리 없지.

    게다가 에테르온은 성년이 지났음에도 제국민 앞에서 여신의 가호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귀족들이 내 말에 흔들리는지 표정을 흐렸다.

    “하긴 최근 수도에 도는 소문이 있더군요.”

    “……여신의 가호가 깨졌다는 말 말이지요?”

    “황태자가 신성력을 다루지 못한다고도…….”

    마침 이 시점에 적절히 나준 소문이라니. 나는 저 소문을 누가 퍼트렸는지 알 것 같았다.

    로이드와 카드리아 경이 퍼트린 거겠지. 두 사람 말고는 저런 위험한 소문을 일부러 퍼트릴 사람도 없었다.

    나는 나데로안 공작에게 들었냐며 고개를 까딱였다.

    “들으셨지요? 제가 신성력을 증명하기보다는, 오라버니부터 저 해괴한 소문을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 같은걸요.”

    에테르온이 동요했다.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초조하게 마른 입술을 축이는 게 보였다.

    나데로안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녀의 지금 발언은 지나치게 선을 넘었습니다. 겨우 저잣거리에 나도는 소문을 신경 쓴다니요.”

    “그럼 왜 가만히 있는 건가요? 신성력 한 번 보여 주면 끝나는 간단한 일을. 저라면 진작 했을 텐데요.”

    할 말은 이걸로 끝이었다.

    이 정도 휘저어 놨으면 다음은 귀족들이 알아서 움직여 주겠지.

    나는 로이드를 힐끔거렸다. 그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부터 아틀레아와 대립해야 하니 심정이 말이 아닐 테지.

    나는 카로스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럼 폐하,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폐하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 * *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에요! 황녀님께서 계승권을 얻는다니요?!”

    “진정하거라, 리사. 어차피 황후 자리는 네 것이니까. 너는 황태자 마음을 얻는 데에나 신경 쓰거라.”

    리사는 조금 전 목격한 장면을 믿을 수 없었다.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온 리즈벳은 예전의 소심한 리즈벳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황제에게 계승권을 요구하고, 보란 듯이 귀족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 유유히 떠났다.

    게다가 황제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나데로안 공작을 상대로…….

    “저는 황후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 누군가의 시녀로 살아가는 건 이제 그만두고 싶단 말이에요.”

    평생을 백작가의 영애로 귀하게 대접받아도 모자랐을 시기를, 트리아 백작의 명령으로 어린 나이에 리즈벳의 말동무가 되기 위해 입궁해야만 했다.

    계획이 틀어져 분통이 터지는 건 백작도 마찬가지였기에 이를 갈았다.

    “이렇게 된 이상 공작위부터 얻어야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국에는 이미 공작 가문이 세 개잖아요.”

    “그럼 치워 버리면 될 거 아니냐.”

    어차피 지금쯤 황후도 로이드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로이드 윈저. 그를 치워 버려야 할 것 같았다.

    트리아 백작이 간사하게 웃었다.

    “그렇게만 되면 황후 자리는 네 것이다.”

    “……그럼 나데로안 공작가는요?”

    “거기는 기껏해야 방계 여식을 데려올 거 아니냐. 우리 가문이 공작가가 되면 네가 유일한 직계인데, 감히 방계 혈족 따위를 들이밀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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