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르센 제도로 사절단이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접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게 얼마 전이었으나, 의외로 사절단의 귀환 소식은 빨랐다.
리즈벳을 맞이하는 인원 중에는 그녀를 줄곧 보필하던 리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트리아 백작이 힘을 쓴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개 시녀가 어찌 감히 이곳에 있을 수 있겠는가.
“리사, 내 말 잘 듣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알겠느냐? 언제까지 황녀의 시녀로만 살고 싶은 건 아닐 거라 믿는다.”
리사는 아버지가 한 말을 곱씹었다.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니.
그 말은, 아버지는 자신을 황후의 자리에 앉힐 생각이라도 하고 있다는 것인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설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자신이 황후가 될지도 모른다니.
튜니아트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황후 아틀레아도 에테르온의 곁을 맴도는 그녀를 그저 지켜볼 뿐이니, 더욱 자신감이 차올랐다.
어린 시절 백작 가문의 귀한 아가씨로 아무런 고생 없이 자랄 수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명령으로 황녀의 시녀가 되어야만 했었는데.
그동안의 시절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리사는 귀족들 사이에서 옥좌에 앉아 있는 에테르온을 힐끔거리며 뺨을 붉혔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쩜 저리 잘생기셨을까.’
언젠가 저 옆에 자신이 서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자부심이 차올랐다.
그때,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포털이 열리고 있어요. 저것 좀 봐요.”
“……태어나서 저런 신기한 문양은 처음 봐요.”
“불길함의 상징이잖아요. 저런 걸 허락하시다니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리사는 이동 포털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귀족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혀를 찼다.
마음속으로 리사는 이미 황족의 일원이 될 몸이었기에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매우 거슬렸다.
감히 황제의 결정에 토를 달다니.
리사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익히며 인상을 찡그렸다.
‘폐하께서 다 뜻이 있어 그러신 거야. 황녀님을 하루 빨리 데려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아버지가 그러셨어.’
그리고 이번 일만 무사히 해결되면, 백작가도 승승장구할 거라 들었다.
리사는 턱을 치켜올렸다.
자신은 저들과 달랐다. 황후가 되면 에테르온의 모든 결정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팟!
이동 포털이 강렬한 빛을 터트렸다.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리사는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아버지?”
정신을 잃은 자신의 아버지를 부축하고 있는 로이드 윈저와, 불경할 정도로 살갗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리즈벳.
그리고 그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웬 남자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리사는 당장 트리아 백작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 애가 탈 지경이었다.
“리즈벳 아니샤 튜니아트 무사히 돌아왔나이다, 폐하.”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리즈벳이 황제 카로스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나긋한 목소리였다.
“황녀의 귀환을 환영하지.”
카로스가 턱을 괸 채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천천히 리즈벳의 외양을 훑어보다 물었다.
“그런데 복장은 왜 그 모양이지?”
“아,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했거든요.”
“그렇군. 황녀의 마음가짐이 어떤지 짐이 심히 궁금한데.”
“그건 앞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바마마.”
리즈벳이 어깨와 손목이 드러나는 옷을 입은 채 생긋 웃었다.
그러자 카로스가 실내가 떠나가도록 크게 웃기 시작했다.
황녀의 기상천외한 귀환에 장내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황태자 에테르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거라, 리즈벳. 네가 오기를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단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발이 흘러내리며 에테르온의 외모가 한껏 빛났다.
리사는 그런 에테르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리즈벳이 시야에 걸리자 미소 짓고 있던 입매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어째서일까.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 왔는데.
리즈벳의 달라진 모습이 그녀의 불안감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그녀를 보자마자 가슴이 아래로 훅 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리즈벳이 돌아오는 날만을 기다렸는데.
“오라버니, 저도 무척 보고 싶었어요.”
다시 시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는 현실을 미치도록 부정하고 싶었다.
* * *
나는 작위적으로 내 귀환을 반겨 주는 에테르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렘무트와 한동안 떨어져 있어 보기 흉한 꼴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에테르온이 계단을 하나씩 밟고 내려왔다.
“그래도 이렇게 돌아와 다행이구나.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황실 경비에 힘쓰도록 하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오라버니.”
“됐다, 네가 무사하니…….”
에테르온이 가면같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뻗어 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에테르온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물렸다.
모든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손길을 거부당한 에테르온의 표정이 굳었다.
“오라버니도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 게냐.”
“그냥 말 그대로예요.”
내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자 에테르온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카로스는 여전히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만 있었다.
정말 방관할 생각인 거구나.
그때 황후 아틀레아가 입을 열었다.
“리즈벳, 이 자는 누구지?”
“아, 이 사람은…….”
“설마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인 게냐?”
“맞아요.”
내가 순순히 그렇다고 긍정하자 좌중이 고요해졌다.
아틀레아는 눈을 반짝이더니 의자 걸이를 세게 내려쳤다.
“어찌 감히! 본분을 망각하고…….”
그러나 아틀레아는 금방 본인의 위치를 상기했는지 아차 하는 얼굴로 다음 말을 억지로 이어갔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현재 황후의 위치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라히트리안의 앞에서만큼은 함부로 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화하게 변했다.
“……기별도 주지 않은 것이니, 리즈벳. 손님께 예의를 차리지 못해 곤란한 본국 입장은 생각지 않는 것이냐.”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경솔했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하거라.”
“네.”
모두 라히트리안의 심기가 불편한 게 아닐까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카로스가 나를 보며 물었다.
“함께 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어찌 된 일이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그것과 관련해서는 이쪽에서 설명하지.”
심드렁하게 가족 간의 상봉을 지켜보고 있던 라히트리안이 손을 들며 나섰다.
나는 당황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는 씩 웃더니 나를 가리켰다.
“황녀가 나를 납치했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예요?!”
불길함은 언제나 예상을 적중한다. 나는 그만 하라는 뜻으로 눈을 부릅떴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불가항력이었다고 할까.”
라히트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당함에 절대 아니라며 손을 내젓고 있는데 아틀레아가 하!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튜니아트에서 보낸 사절단은 내가 황녀를 납치했다고 잘만 주장하던데 왜 나는 그러면 안 되지?”
당연히 말이 안 되니까!
라히트리안의 억지스럽고도 황당한 주장에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를 데려오는 과정에 소란은 있었지만, 누가 감히 그를 납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라히트리안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생긋 웃으며 이제 막 정신을 차리려는 듯한 트리아 백작을 가리켰다.
“저자가 그러더군. 이카르센 제도에 리즈벳 황녀가 있으니, 당연히 내가 납치한 게 아니느냐고.”
“…….”
“억울해서라도 직접 황녀를 납치한 범인을 잡고 싶은데.”
이런 뻔뻔한 주장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당당하게 펼치다니.
아틀레아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의외로 에테르온은 라히트리안의 주장에 딴죽을 걸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기대감이 생긴 것 같았다.
“범인을 직접 잡겠다고 했습니까?”
“그래.”
“그럼…… 잡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겁니까?”
“튜니아트 황실에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지.”
라히트리안의 말에 에테르온의 벽안이 반짝였다.
“그럼 제가 협조하겠습니다.”
“……그대가?”
“황성을 어지럽힌 자가 아닙니까. 이카르센의 주인께서 직접 나서시니,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그리해도 되겠지요?”
에테르온이 허락을 구하듯이 카로스를 바라보았다. 카로스는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렘무트를 만나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대외적으로 내 납치를 시도한 사람이 렘무트였으니, 이번 기회에 에테르온은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나서는 걸지도.
발작에 대한 고통을 해결해 줬다는 것 자체로 렘무트는 에테르온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 테니까.
라히트리안을 통해서 렘무트를 잡고 싶은 것이다.
‘차라리 잘 됐어. 렘무트를 통해서 에테르온의 동태를 알아볼 수도 있겠는걸.’
에테르온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히트리안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튜니아트의 황태자가 협조한다니 덕분에 일이 금방 끝나겠군. 그럼 손 좀 빌릴까.”
“물론입니다. 제가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요.”
에테르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렘무트가 황실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동안 에테르온이 얼마나 그를 신뢰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렘무트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나는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심하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디로 갔는지 렘무트가 도착한 직후부터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로스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픽 웃었다.
“황녀가 만만치 않은 손님을 데려왔군. 라히트리안 이카르센,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폐하!”
아틀레아가 그럴 수 없다며 카로스를 만류했다.
그러나 카로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부디, 그 범인이 잡혔으면 좋겠군. 그때까지 당분간 튜니아트 황실에 머물러도 좋다.”
“고맙군.”
“그런데 황녀.”
카로스가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고 붉은 용이 날개를 파닥이며 일어나고 있었다. 어쩐지 작고 퉁퉁한 발이 걸을 때마다 ‘뾱뾱’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다들 이곳에 집중하느라 렘무트의 존재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도 한몫했고.
뒤뚱거리며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던 렘무트는 불만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나를 알아보는 인간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어.]
짜증 섞인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걸어온 렘무트가 짧은 팔을 쭉 뻗었다. 불만스럽게 바닥을 툭툭 치는 꼬리가 인상 깊었다.
[안아.]
“…….”
[다리 아프니까 안으라고. 이 짧은 다리로 설마 걸어 다니라고 하려는 건 아니지?]
“흐흡.”
나는 애써 웃음을 삼키고 몸을 숙여 렘무트를 안아 올렸다.
보기보다 무게가 꽤 나가 양팔로 안정적으로 안아 올리는데 라히트리안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라히트리안이 내 품에 안겨 있는 렘무트의 뒷덜미를 턱 잡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보내 버렸다.
정말 말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 별거 아냐. 생긴 걸 봐서 알겠지만 파충류 과야. 대충 사역마 비슷한 거라고 해 두지.”
카로스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