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화창한 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너무 갑작스러운 작별에 얼떨떨했다.
이안의 안내를 받아 이동 포털이 열린 첨탑에 도착하자, 이미 도착해 있던 로이드와 트리아 백작이 보였다.
여전히 이카르센 제도에서 입고 활동했던 복식을 입고 있는 나를 본 트리아 백작이 노골적으로 경박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가 그간은 황녀님께 감히 말씀 드리지 못했지만, 어찌 그런 의복을 입고 귀환하려 하십니까.”
“트리아 백작, 말이 너무 지나칩니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실 터인데, 저런 행색이라니…….”
트리아 백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첫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이제 와 저런 말을 하는 저의가 너무 잘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이카르센 제도에 머물 수밖에 없으니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로이드도 같은 입장인지 말을 보탰다.
“괜히 트집 잡힐 일 만들어 좋을 게 있겠습니까.”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요. 점수 깎일까 봐 그러는 거잖아요?”
보수적인 귀족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다. 나는 생긋 웃으며 트리아 백작에게 말했다.
“튜니아트 신성 제국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서예요. 그러려면 하나씩 틀을 깨뜨려 놔야죠.”
“……무슨.”
트리아 백작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그는 설명을 요구하듯 로이드를 보았다.
“황녀님을 데려가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까?”
“돌아가면 폐하의 뜻을 알게 되겠지요. 더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으니 슬슬 시작해 주었으면 합니다.”
로이드가 서둘러 달라는 의미를 담아 말했다.
나는 정말 떠나기 직전의 상황이 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라히트리안은 오지 않을 생각인 건가.
갑자기 날 피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와 이런 마무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불만스럽게 이안에게 물었다.
“라히트리안은 언제 와요?”
“일정이 바쁘신가 봅니다. 아마 이대로 떠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턱을 매만졌다. 정말 이런 방법까지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흐음. 그럼 하는 수 없죠. 바쁘다니.”
그렇다면 그것보다 더 바쁜 일을 만들어 주면 되는 일이지.
내가 라히트리안을 보지 못해 아쉬워한다고 오해한 듯한 이안이 혀를 쯧 찼다.
그의 시선이 얼핏 첨탑 건너편에 있는 성 어딘가로 향한 것 같았다.
나는 설마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라히트리안이 저기 있는 건가?’
근거는 없지만 왠지 저곳에 라히트리안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안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라히트리안 님께 전할 말씀 있으시면, 제가 대신 전달하겠습니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예?”
“직접 전하면 되니까요.”
직접. 그 말에 이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듯이.
나는 생글 웃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자기가 안 오면 어쩔 거야.
조금 무식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효과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나는 내 행동에 명분을 싣기 위해 일부러 로이드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로이드, 제국으로 돌아가는 거 많이 급한 거 아니죠?”
“대략적인 시간을 전달하기는 했습니다만. 조금 늦는다고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하긴, 바쁘신 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니. 그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어요. 그렇죠?”
“……그렇기는 합니다만.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
내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는지 로이드의 표정이 굳었다.
불안함을 느낀 그는 시한폭탄을 감시하는 사람처럼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보면 알아요. 트리아 백작이나 신경 써 주세요. ……아마, 다칠지도 몰라요.”
나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당부했다.
분명 이번에도 주변이 난장판이 되겠지. 아마 약간의 뒷감당도 해야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이안도 짐작가는 게 있는지 사색이 되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황녀님. 뭐가 됐든 그 방법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별 인사 정도는 저도 해야죠. 만날 수 없으니 멀리서라도 볼 수 있게요.”
“제, 제가 지금 가서 라히트리안 님을 모셔오겠습니다. 그럼 되지 않습니까?”
간절하게 내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는 이안을 외면하며 나는 큰 목소리로 이름을 외쳤다.
“렘무트!”
동시에 이안이 얼굴을 푹 가렸다. 낭패라는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아, 안 돼…….”
렘무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공기의 방향이 바뀌며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일대를 날려 버릴 듯 바람이 강하게 불어 닥쳤다.
로이드는 내가 렘무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상황을 파악했는지 조용히 트리아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트리아 백작은 건물 기둥에 바짝 붙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눈을 감고 있었다.
백작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로이드는 조용히 백작의 뒷목을 내리쳤다.
털썩.
백작이 그대로 쓰러졌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내가 고맙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자,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로이드는 가볍게 트리아 백작을 구석으로 옮겨 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말문이 막히는군요. 트리아 백작이 마룡을 보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신 겁니까?”
“그러는 로이드도 지금 공조해 준 거잖아요.”
이미 렘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라 놀라진 않은 듯했지만, 표정이 매우 착잡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모시는 분이 이러니…… 알아서 수습할 수밖에요.”
아주 좋은 말이었다. 나는 들었느냐며 이안을 보고 생긋 웃었다.
“지금 들었죠, 이안? 라히트리안 같은 상사를 둔 운명이니 어쩌겠어요.”
“이, 이제 어쩌시려는 겁니까?”
이안은 울먹이며 렘무트가 소환되고 있는 모습을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렘무트의 형상이 선명해지더니 완전한 형체를 갖추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내 예상대로 소환이 성공했잖아? 보아하니,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려는 상황인 건가?”
“맞아요. 나 도와준다고 했던 거 안 잊었죠?”
“걱정 마. 내가 직접 약속한 건 지키니까.”
“그럼 그 전에…….”
나는 이카르센 성을 가리켰다.
“여기 전부 부숴 버려요. 저번에 보니까 잘하던데.”
“호오?”
“이왕이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 * *
리즈벳의 예상대로 라히트리안은 첨탑 건너편 성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안에게 알아서 사절단과 황녀를 돌려보내라는 지시를 내리고서.
“……마룡을 데려갈 생각은 변함이 없군.”
라히트리안은 복잡한 심경을 지우지 못했다.
마룡이 그녀 옆에 있는 걸 내버려 두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하지만 계약자는 엄연히 리즈벳이었기에 그가 간섭할 영역이 아니었다.
마룡이 완전히 첨탑에 모습을 드러낸 것까지 감지한 라히트리안은 그 다음을 예상했다.
슬슬 돌아가겠군.
어차피 황녀를 다시 데리고 오고 싶다면, 그때 움직이면 됐다.
그가 붙잡아 둔다고 이카르센 제도에 순순히 있어 줄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튜니아트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 건 전부 하도록 둔 다음…….
“아르고.”
그가 나직하게 아르고의 이름을 불렀다.
라히트리안의 부름을 받은 아르고가 순식간에 그의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카르센의 마법사들은 모두 라히트리안의 부름을 언제든지 들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라히트리안 님.”
“아트레시아 제국의 군사 정보 하나도 빠짐없이 가져와.”
“……네? 아, 알겠습니다.”
아르고는 앞뒤 모두 잘라먹은 명령에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아르고는 곧바로 창가의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우중충하게 변한 하늘에서 불덩이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그것을 본 라히트리안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여자가 끝까지…….
그의 입매가 건조하게 올라갔다.
곧이어 라히트리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홀로 남아 있던 아르고는 잠시 후 마력과 마력이 충돌하며 하늘이 맑아지는 모습까지 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습을 감췄다.
* * *
나는 눈앞에 나타난 라히트리안을 보고 반갑게 웃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날 보고 있었다.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본인을 불러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가벼운 손짓 하나로 렘무트가 난사하는 마법을 무효화시켰다.
“생각보다 늦게 왔네요?”
“이게 무슨 짓이야, 황녀.”
“당신 부르려고 이러고 있던 거잖아요.”
한쪽에서 이안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카르센 성을 마음대로 부수라는 명령의 속내를 듣게 된 렘무트가 질린 얼굴로 날 돌아봤다.
나는 방긋 웃으며 라히트리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피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화났어요?”
“아니.”
“렘무트도 멋대로 불러서 막 거슬리고 그러지 않아요? 신경 쓰여서 옆에서 보고 싶다거나.”
“전혀.”
“아, 아직 당신이 말 한 손해 배상 못 한 건요? 줄지 안 줄지 모르잖아요.”
“본인 걱정이나 하는 게 어때?”
라히트리안이 비웃음을 흘렸다. 아마도 내가 허무맹랑한 이유를 드는 까닭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점점 올라가는 입꼬리가 얄미워 나는 입이 툭 튀어나왔다.
하는 수 없지.
나는 라히트리안이 물러나지 못하도록 허리를 덥석 팔로 끌어안았다.
주변에서 경악 섞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한 라히트리안이 내 팔을 풀어내려 할 때였다. 나는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비밀로 잘 지켜 주려고 했는데.
그의 정신을 쏙 빼놓을 다른 말은 지금으로서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기에, 결국 써먹어야 할 것 같았다.
“자꾸 그러면 돌아가자마자 아무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할 거예요. 당신도 그건 곤란하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내 감정이 당신한테 다 전달될 텐데.”
라히트리안의 말이 끊기고 놀란 자안이 크게 뜨였다.
그의 표정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겠지.
나는 씩 웃으며 속삭였다.
“어제 라히트리안이 말했던 거, 아직 유효한 거 맞죠?”
“하. 당해낼 수가 없군.”
“그럼 이제 힘 그만 빼고 가요.”
나는 이안에게 손짓했다. 의미를 알아들은 이안이 이동 포털을 발동시켰다.
팟.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