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61)

* * *

누가 좀 살려 줘.

이안은 무척 살고 싶었으나, 이 상태로 가다가는 조만간 유언을 남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 포털은 라히트리안 님이 열라고 하신 겁니다.”

“알아.”

“그, 그런데 왜 저를 그렇게 노려보십니까! 전 라히트리안 님 명령을 따른 것뿐인데요!”

눈앞에 완성된 이동 포털을 가리키며 이안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하라는 대로 했더니 돌아오는 건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하란다고 정말 했어?’ 라는 살벌한 눈빛이었다.

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건지!

이안은 이동 포털을 보며 말했다.

“서번트 트리아가 하루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힘써 달라 요청했습니다. 완성됐으니 알릴까요?”

“…….”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알리고 오겠……. 나중에 말할까요?”

바로 어제, 나름 화기애애하게 담화를 잘 끝내고 난 후. 라히트리안은 볼일이 있다며 이안에게 먼저 가라는 말을 남겼었다.

그리고 지금. 라히트리안은 무척 기분이 저조했다.

이안이 따라붙지 않았던 그 공백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는, 라히트리안의 기분을 이토록 저조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카르센 성에 오직 한 명뿐이었다.

“리즈벳 황녀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면 튜니아트로 가시는 게 걱정되시는 겁니까?”

“걱정? 누가.”

“…….”

“황녀한테 무슨 일이 있든 말든, 별것도 아닌 일에 내가 왜 신경 쓰겠어?”

아니, 엄청 신경 쓰고 있는 게 너무 티가 나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뭘까, 이건.

라히트리안은 이동 포털을 성의 없이 훑어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뭐가 예쁘다고 이동 포털까지 마련하라 했는지. 괜한 짓을 했군.”

“그, 그러게 말입니다. 튜니아트 황녀가 이카르센 성에 머무는 것도 내내 골치 아팠는데. 뭐가 예쁘다고 이동 포털까지…….”

어떻게든 라히트리안의 기분을 풀어 보기 위해 어색하게 맞장구치던 이안은 서슬 퍼런 자안과 시선이 맞닿자 낑 하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내린 지시에 불만이 많았나 보군.”

“……그래도 손님인데 대우는 확실하게 해 드려야죠. 네, 그럼요.”

“대우? 과분할 정도군.”

그러니까 어떻게 대답해 주길 바라는 건지 설명 좀 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안은 간절하게 이 순간이 끝나길 바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 갑자기 찾아와 주기라도 하든가!

라히트리안은 이동 포털을 노려보더니 휙 몸을 돌려 첨탑을 나갔다.

“하아. ……차라리 황녀님한테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아니지, 그것보다 라히트리안의 마음부터 확실하게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리즈벳 황녀 앞에서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처럼 사근사근해지면서,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부정하고 있으니.

그 부정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역시 ‘튜니아트’라는 이름 때문이리라.

라히트리안은 튜니아트 혈통이라면 피가 끓을 정도로 증오했다. 리즈벳에 대한 감정을 쉽게 인정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튜니아 여신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불쾌감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라히트리안은 여신의 금기를 깨고 보란 듯이 영생을 얻은 인물이었다.

당연하게도 여신은 그의 영생을 빼앗고 싶어 했고, 둘의 대립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여신 튜니아가 보낸 수없이 많은 존재가 라히트리안을 거쳐 갔다.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없었으나……. 이안은 그 끝이 좋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차라리 이번에 모든 악연이 풀리면 좋을 텐데.’

그때까지 애꿎은 주변만 고생하게 생겼다.

이안은 투덜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라히트리안 님은 이성에 호감을 가진 적이 있으신가?”

한정된 수명을 지닌 이안이 라히트리안에 대해 아는 정보는 극히 일부였다.

그리고 그 한정된 정보에 애정 문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카르센 제도를 무사히 이끌어가기 위한 지식이 전부였고, 그 외에는 필요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괜찮은 건가, 이거.”

부디, 아무 일 없이 모든 게 무사하기를.

이안은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바랐다.

* * *

“아니카, 듣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황녀님, 지금 정말 모르셔서 물으시는 겁니까?”

“이상하잖아요! 안 그럴 것 같은 남자가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수상하죠? 갑자기 적극적으로 날 도와준다니. 이거 무조건 음침한 속셈이 있는 거라고요.”

팔찌에 대고 아니카를 부르자, 매듭지어진 짧은 백발이 반짝이더니 아니카가 응답해 왔었다.

간단하게 안부를 물어보니, 아니카는 긍정적인 답변을 남겼다.

아르고에게 대충 전해 들었던 것처럼 몸 상태가 호전되어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열성적으로 아니카와 대화를 이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아니카?”

“…….”

“맨날 나 놀리기만 하고. 진짜 못됐어.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면 알은척도 안 할 거예요.”

어차피 연락할 일도 없겠지만.

나직한 한숨 소리가 팔찌에서 들려왔다.

“황녀님.”

“네.”

“혹시 두 분, 서로 마음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팔찌를 내려다봤다.

그럴 리가. 지금까지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마음이라니. 라히트리안과 내게 절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날 하루가 멀다 하고 괴롭히더니, 이제는 변덕을 심하게 부려대서 곤란한 지경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카르센 제도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면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어느 게 본심인지 헷갈렸다.

“제 말은…… 그게 아니었어요, 아니카.”

“제가 듣기로는 그렇습니다만.”

“어딜 봐서요?”

대체 어딜 봐서? 결론이 왜 그렇게 나오는 거지?

내 물음에 말문이 막혔는지 녹색으로 빛나고 있던 팔찌가 잠시 꺼졌다.

팔찌가 몇 번이나 반짝이다 꺼지는 게 반복되는 걸 보아하니, 아니카가 입을 열었다 닫는 걸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던 아니카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아트레시아 제국에서 혼담이 들어왔다고 하니, 라히트리안 님께서 불쾌해 하셨다면서요.”

“그건…….”

“하지만 황녀님께서는 아니라고 주장하시니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요.”

“어떻게요?”

침묵이 감돌았다.

“저도 경험이 없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경험은 나도 없었다.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이성과 엮일 일이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건 황녀님께서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카는 그 말을 끝으로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쉬러 가겠습니다.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어요, 황녀님.”

초록빛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뚝 끊겼다.

* * *

그러나 내 확인은 바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동 포털이 열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러 이안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황녀님, 이동 포털이 열렸습니다. 그 전에 튜니아트의 의복으로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아 준비해 봤습니다.”

이안의 뒤로 튜니아트 황족이 입는 양식의 의복이 줄줄이 걸려 들어왔다.

어차피 손끝까지 모두 가려야 하고, 허리는 따로 의대가 있었기에 치수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타인의 손길을 최소화하기 위해 튜니아트 황실이 줄곧 고수해 온 양식이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양식은 모두 황태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처음부터 튜니아트 황실이 온몸을 꽁꽁 감싸는 의복을 입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몸 곳곳에 술식이 새겨져 있으니 들키면 곤란하여 의복도 바꾼 거겠지.’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안, 준비해 줘서 너무 고맙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 옷들로 갈아입지 않을 거예요. 지금 입고 있는 그대로 갈 생각이거든요.”

“……네?!”

이안이 화들짝 놀랐다.

그만큼 내 결정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튜니아트 황실은 보수적이기로 정평이 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눈도장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저 이대로 갈 거예요. 그리고…… 혹시 제가 튜니아트 제국으로 떠날 때 라히트리안도 마중 오나요?”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습니다. 두 분 어제 무슨 일 있으셨지요?”

“왜요? 라히트리안이 뭐라고 해요?”

나는 설핏 미간을 좁혔다.

설마 고작 하루 사이에 또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

이안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도 말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입니다. 두 분 싸우셨어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로이드가 난입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대화가 단절됐었다.

“그럼……, 설마 혼담 때문에 혼자 화나신 건가.”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안이 고개를 젓더니 아쉽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그럼 저희는 이렇게 헤어지게 되겠군요.”

“네? 갑자기요?”

이렇게 아무런 기별도 없이?

내가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이자 이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서번트 트리아 백작이 마력 중독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난리를 피워서 말입니다.”

이번에는 트리아 백작이 문제였다.

하기야, 단련되지 않은 몸으로 이카르센 제도에서 오래 버티는 건 힘들 터였다.

아무리 해독제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매일 같이 노출되는 마력에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이안이 소곤거렸다.

“꾀병인 거지요.”

“아.”

“사절단 대표의 요청이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함께 온 나머지 사절단은 이미 튜니아트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참 빠르기도 했다.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돌아가야 한다니.

팔찌가 있었기 때문에 아니카와 아르고와는 언제든지 연락을 취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니지. 이건 분명 일부러 그런 거다.’

나는 그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라히트리안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리즈벳 황녀님의 준비가 모두 끝나면 바로 튜니아트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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