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61)
  •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봐요?”

    “당연히 황녀에게 들어온 혼담이니 황녀의 의사가…….”

    “…….”

    “중요하지 않겠군.”

    “그걸 이제 알았어요?”

    황제가 잘도 내 의견을 물어보겠다.

    제국에서 어떤 발언권도 갖고 있지 않은 나는 의견을 펼칠 기회조차 없었다.

    황권이 강력한 튜니아트 제국에서는 오직 황제와 차기 황제인 황태자만을 중심으로 모든 게 흘러갔으니까.

    하긴, 어차피 세이어드와 혼담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또 예전부터 생각한 것도 있지 않나.

    “뭐……. 그래도 아트레시아 제국이면 나쁘지 않겠네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까 여차하면…… 왜 그렇게 봐요?”

    “황녀는 혼인이 참 쉽나 봐, 그렇지?”

    “일단 저도 황녀니까 혼담이 들어올 수도 있죠. 그럴 거라고 어릴 때부터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럼 평생 혼자 살 줄 알았어요?”

    나는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까부터 대화가 통하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의 요점이 엇갈리고 있었다.

    ‘그러는 자기도 순수한 목적으로 다가온 게 아니면서.’

    내 대답을 듣고 있던 라히트리안이 차게 웃었다.

    “그러니까, 황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옆에 누가 있어도 상관없다는 거로군?”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황녀의 목적을 쉽게 이뤄 줄 사람이 여기 있지 않나?”

    “네?”

    라히트리안이 비뚜름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심사가 꼬이다 못해 정점을 찍은 모양이었다.

    무슨 뜻이냐며 당황스럽게 그를 보자, 라히트리안이 가까이 다가왔다.

    “황녀가 원하는 마룡도 곁에 두고.”

    “…….”

    “원하는 황위도 손에 얻고.”

    “…….”

    “황위를 원하지 않는다면 튜니아트를 내 손으로 직접 없애 줄 용의도 있는데. 이게 더 합리적인 선택 아닌가?”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어쩌면 사람을 홀리는 재주는 렘무트가 아니라 라히트리안이 더 탁월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말만 쏙쏙 골라 해 주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라히트리안의 목적은 맨 마지막에 한 말에 있겠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설명할 수 없는 공백에 의아함이 생겨날 때였다.

    “그건 불가합니다.”

    “……로이드?”

    “튜니아트 황실 문제에 이카르센 제도의 개입은 절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리즈벳 황녀님.”

    고요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로이드가 서 있었다.

    * * *

    확실히 튜니아트 제국의 몰락은 로이드가 원하는 일이 아닐 터였다.

    만약 벨리언 카드리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에테르온의 편으로 돌아서겠지.

    “왜 황녀님의 거처가 이카르센 본성에 있는 건지 설명부터 들어 볼까요. 게다가 바로 옆 방은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의 침실이라고요?”

    “흠흠, 그건 아주 깊은 사연이 있어요. 말로 하기에는 너무 길어요.”

    “시간은 많으니 괜찮습니다.”

    로이드는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이 강경하게 나왔다.

    “분명히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아무 사이 아니에요.”

    뭐, 정확히 설명하자면 아무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 작정하고 꼬시려고 하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걸 순순히 말하면 로이드가 화를 낼지도 모르니 생략해야겠다.

    “이카르센 측에서 튜니아의 가호가 깨졌다는 걸 알고 있더군요.”

    “네.”

    “황녀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로이드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 알려 주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헛기침하며 괜히 바닥에 깔린 카펫의 문양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 한 말이 무슨 뜻입니까.”

    “로이드가 들은 건 어디부터인데요?”

    “대충 황녀님의 목적을 이뤄 준다는 부분부터 들었습니다.”

    그럼 전부 다 들은 건……, 헉 설마 마룡 이야기도 들은 건가?

    무섭게 번뜩이는 로이드의 바다색 눈동자는 흡사 내 시험 점수가 처참하게 나왔을 때와 비슷했다.

    “그…… 사실 마룡은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인지 아닌지는 들어 보고 제가 판단합니다.”

    “그럼요. 당연하죠.”

    나는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로이드는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묻겠습니다.”

    “네.”

    “에테르온 황태자님 곁에 있던 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자가 마룡입니까?”

    “…….”

    내 불안한 시선 처리에 로이드는 생긋 웃었다.

    “황녀님, 대체 지금까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신 거지요?”

    “…….”

    “부디 수습 가능한 선이었으면 합니다만. 제가 더 놀라야 할 게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시죠.”

    어차피 여기에서 더 놀랄 것도 없어 보이지만.

    로이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아직 더 놀랄 게 남아 있는데. 그래도 말하라 할 때 전부 말하는 게 낫겠지.

    나는 배시시 웃으며 최대한 로이드에게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의자를 뒤로 물렸다.

    미리 도망칠 준비를 하는 내 태도에 로이드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설마 더 있습니까?”

    “그 마룡이랑 제가 계약했어요.”

    “…….”

    “그 마룡을 소환하는 걸 세이어드 아트레시아 황자가 봤고요. 또…….”

    “…….”

    “그 마룡이…… 제 목숨을 노리고 있다 정도?”

    정확히는 라히트리안의 심장이었지만 그거는 비밀로 하는 게 맞을 테니까.

    나는 최대한 사안이 가벼워 보이는 느낌을 주기 위해 목소리 톤을 낭랑하게 올렸다.

    싸늘한 정적이 방 안에 감돌았다.

    “하하, ……하하.”

    “…….”

    “이게 전부예요. 이제 정말 없어요.”

    로이드는 미동조차 없었다. 숨을 쉬고 있기는 한 걸까.

    후폭풍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로이드를 보고 있는데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위를 쟁취하셔야겠군요.”

    “그, 그런 셈이죠?”

    “마룡이야 신성력이 온전해지면 문제될 것 없으니 제쳐 두고.”

    로이드는 이를 으득 갈았다.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마룡과 계약했다는 걸 알고 있다니 큰일이로군요. 이건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황제가 되면 포기하지 않겠어요?”

    “그자가 최근 에테르온 황태자와 접촉했습니다.”

    나는 머리가 띵했다.

    세이어드가 에테르온에게 접근했다니? 어쩐지 조용하다 했더니 뒤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구나.

    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감쌌다.

    로이드가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저는 황녀님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제가 모든 것을 해 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살 길은 알아서 찾으라는 거죠?”

    이미 렘무트에게 한 차례 들은 말이었다.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매일 같이 겪게 될 일이기도 할 테고.

    “어떤 길을 선택하시든 전 황녀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제가 라히트리안의 도움을 받아도요?”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요. 물론, 그 뒷감당도 황녀님께서 해 주셔야 합니다.”

    * * *

    “계속 개인행동을 하는 게 여간 수상한 게 아닙니다. 아무래도 로이드 윈저는 황녀를 도우려는 것 같습니다, 황후마마.”

    아틀레아는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꾹 쥐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분노로 짙게 물들었다.

    “설마, 그럴 리, 있겠어요. 로이드가 그럴 리…….”

    “하지만 황후 마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황녀가 어떻게 몰래 도망갈 수 있었을까요? 무슨 재주로요?”

    “그건…….”

    당연히 그 붉은 머리 남자의 도움으로 탈출을 한 게 아니던가.

    당연하다는 듯 반박하려던 아틀레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리즈벳이 황성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 ‘진실’을 마주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진실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던 걸까.

    리즈벳의 주변은 온통 아틀레아의 사람들로만 가득했다.

    황실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접근할 수 없도록 감시역이 붙고, 만약 진실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도록 철저하게 눈과 귀를 가려가며 키웠다.

    아니,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로이드가 나를 배신했구나.’

    아틀레아가 가장 믿었던 존재. 그랬기에 리즈벳의 눈과 귀를 가려 달라 부탁했던 존재.

    아틀레아가 윈저 가에서 유일하게 아끼고 믿었던 가족, 로이드 윈저가 배신한 것이다.

    황성을 탈출하기 전, 리즈벳이 황실 도서관에 들렀다는 사실을 입수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외면하려 했다.

    리즈벳이 고대어를 익혔을 리 없다고.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트리아 백작.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 로이드를 잘 감시하도록 하세요.”

    “네, 그리 하겠습니다. 저어…… 그런데 황후 마마.”

    “네, 말씀하세요.”

    아틀레아는 얼른 영상구를 꺼 버리고 싶은 충동을 내리누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트리아 백작이 손을 비비며 하하 웃었다.

    “제 딸, 리사가 황태자비로 책봉되는 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중인지요?”

    “폐하께 잘 말씀드려 볼 터이니 기다리세요.”

    “황후 마마의 뜻에 따라 리사는 십 년이 넘게 팔자에도 없던 시녀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그 가여운 아이를 위해서라도 보상을 해 주셔야 마땅…….”

    “트리아 백작.”

    아틀레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서번트 트리아는 금세 꼬리를 말며 그녀의 눈치를 봤다.

    로이드의 배신을 알리며 당연하다는 듯이 차기 공작위를 넘보는 간사한 자.

    아틀레아는 주먹을 꾹 쥐었다. 방계이긴 했으나 혈족이라는 자가 자신의 잇속만 챙기기 바쁘다니.

    “로이드가 배신했다는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으니,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

    “윈저 공작의 병환이 깊으니 곧 그 아이가 공작의 자리에 앉게 될 터인데. 그리 함부로 입을 놀려서야 되겠습니까.”

    아틀레아는 그 말을 끝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영상구를 던졌다.

    쨍그랑!

    “꺄아아악!”

    그녀의 폭력적인 태도에 놀란 시녀가 비명을 지르다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아틀레아가 천천히 시녀를 돌아보았다.

    하얗게 질린 시녀가 덜덜 떨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경박하게 소리를 지르다니.”

    “자, 잘못, 잘못했습니다. 황후 마마, 한 번만 선처를…….”

    “다시 교육을 시켜야겠구나.”

    교육. 그 말에 시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래졌다.

    교육실에서 살아 나온 시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닿도록 숙인 시녀가 애원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황후 마마. 교육실에 가면 전 죽습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데려가거라.”

    “황후 마마! 살려 주십시오!”

    방 안에 있던 시녀들이 애원하는 시녀의 팔을 양쪽으로 잡고 끌고 나갔다.

    그러다 마침 아틀레아를 찾아온 황제 카로스가 재밌다는 듯 그 장면을 보고 픽 웃었다.

    “성질 머리 하고는.”

    “……폐하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그대가 원하는 대로 황녀가 돌아오게 되었는데 함께 기뻐해 주러 왔지.”

    “…….”

    “그런데 안색이 별로군.”

    카로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깨진 영상구 파편을 발로 밟으며 아틀레아 앞까지 다가온 카로스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내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이럴 작정으로.

    아틀레아는 허탈하게 웃었다.

    카로스는 전부 알고 있던 것이다.

    로이드가 아틀레아를 배신했다는 사실도. 서번트 트리아가 공작위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전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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