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61)

* * *

일단 리즈벳을 무사히 데려간 다음 천천히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의 혼담 문제를 해결하면 될 줄 알았더니.

‘의외의 복병이 여기 있었어.’

담화가 끝난 후, 로이드는 여전히 응접실에 남아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리즈벳과 라히트리안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과 달리 리즈벳을 대할 때만 유해지는 라히트리안의 태도나 주변에 흐르는 마나 파장을 보면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리즈벳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담화가 긍정적으로 끝나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소?”

“이게 어딜 봐서 좋게 끝났다는 겁니까?”

트리아 백작의 말에 로이드가 어금니를 사리물며 터져 나오려는 분통을 억눌렀다.

조금 전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 남기고 간 말의 속뜻을 정말 모르는 것인가.

로이드는 이런 자가 어떻게 사절단 대표로 선정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국혼이라……. 경사스러운 일이군. 조만간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갈 포털을 열어 주도록 하지.”

로이드는 담화가 끝나기 전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 중독을 피하기 위해 이카르센에서 제공한 해독제를 마시던 트리아 백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어쨌든 리즈벳 황녀님을 무사히 데리고 갈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동 포털도 열어 준다고 하고, 이렇게 친절하게 해독제도 주었으니 걱정할 것 없을 겁니다.”

투명한 유리병 속 검보랏빛 액체가 찰랑거리며 트리아 백작의 입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설마 저 해독제 하나로 이카르센에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가.

로이드는 미간을 구겼다. 본인이 시험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저리 속 편하게 웃다니.

저걸 아무런 의심 없이 들이켜는 트리아 백작을 보는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의 눈빛이 어땠는지 눈치채지 못한 걸까.

로이드는 확신했다. 저 액체는 단순히 해독 기능만 있는 게 아닐 거라고.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라는 인간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는 여신에게 대항해 마법사들을 위한 이카르센 마도 제도를 세우고 수천 년을 이끈 초월적인 존재였으니까.

“……이카르센 제도에서 포털을 열어 준다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이쪽의 편의를 봐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마탑주는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났으니 인간의 견해로 이해하려 하면 안 돼.”

그걸 아는 자가 저런 멍청한 말을 하다니.

로이드는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에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이카르센 제도에서 포털을 열어 준다는 게 정녕 무슨 뜻인지 몰라 이러는 겁니까?”

튜니아트 신성 제국을 보호할 여신의 가호가 깨졌다는 사실을 이카르센 제도는 알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일종의 경고였다. 게다가…….

“그런데 튜니아트 제국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황녀를 그저 황자비로 평생 지내게 하는 것도 괜찮은가 보지?”

얼마 전 이카르센 제도에서 갑자기 마법사들을 전원 귀환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아무래도 아트레시아 제국과 연관된 게 아니었을까.

로이드는 마른세수를 했다.

직접 리즈벳의 혼담을 거절할 사안을 알려 주는 걸 보면……. 로이드의 바다색 눈동자가 흐릿해지며 감겼다.

이카르센 성 안으로 발을 들일 때 느꼈던 원인 모를 불안감의 정체를 이제 알 것 같았다.

* * *

“아르고, 오늘 일은 비밀이에요. 알죠?”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만. 차라리 라히트리안 님에게 부탁해서 마룡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만나게는 해 줬겠죠.”

늘 거절할 것처럼 굴면서도, 라히트리안은 은근히 부탁을 잘 들어줬다.

아마 내가 말했다면 렘무트를 만나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게 성사됐을 것이다.

하지만 렘무트를 곁에 두고 싶다고 한다면? 그 부탁도 들어줬을까?

‘……절대 안 들어주겠지.’

“그래도 너무 곤란하면 말해도 돼요.”

“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

한 번의 거절도 없이 수긍하는 아르고를 황당하게 보았다.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나를 힐끔거리고는 먼저 호숫가로 나가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 주면 안 돼요?”

“황녀님과 제 사이가 그리 깊지는 않잖…….”

“왜 그래요?”

아르고가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하마터면 등에 부딪힐 뻔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아르고, 여기에서 황녀와 뭐 하고 있는 거지?”

“황녀님이 마룡을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배신해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

나는 슬쩍 아르고 뒤에 숨은 상태로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널찍한 어깨너머로 라히트리안이 호숫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르고의 옷을 꼭 붙잡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의 자안이 아르고의 어깨로 향하더니 설핏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시선을 정통으로 직면한 아르고는…….

“우아앗!”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가 잡고 있던 어깨를 대충 털어내더니 앞으로 휘청이는 나를 툭 라히트리안에게 밀었다.

뭐야 지금 나를 제물로 삼은거야?

자기가 추궁당할까 봐, 날 제물로 삼았어?!

배신감에 치를 떨며 아르고를 쏘아보자 그가 모른 척 딴청을 부렸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의외의 면이 자주 보였다.

“하, 하하. 라히트리안,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담화가 엄청 빨리 끝났나 봐요.”

라히트리안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나서야 걸음이 멈춰진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아르고는 어느새 모습을 감춘 후였다.

‘나 버리고 튀었어?!’

어디 변명해 보라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내 몸은 삐걱거리며 굳어 갔다.

변명거리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데, 돌연 라히트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주우욱-.

“무, 뭐 하는 거예요?”

“말은 더럽게 안 듣지. 얌전히 있겠다고 한 사람이 어디 누구였지? 응?”

“……그럼 라히트리안도 좀 협조적으로 양해해 주면 안 돼요?”

뭉개진 발음이 입술 사이로 엉성하게 흘러나왔다.

알아듣는 데 문제는 없었으나 라히트리안은 들리지 않는지 대답 대신 볼을 죽 죽 늘어뜨릴 뿐이었다.

어딘가 심사가 꼬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만스럽게 울상을 지으며 올려다보자 그제야 손을 내려놓았다.

라히트리안은 내 뒤로 보이는 호숫가에 시선을 짧게 두며 물었다.

“만남은 잘 끝냈나?”

“……네, 뭐.”

“보나마나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갈 때 마룡을 데려갈 방법을 알아보려 한 거겠지.”

“헉.”

“말했잖아. 나를 속일 생각은 접어 두라고.”

“……그래서 화났어요?”

“아니.”

“그럼 우리 합의해요. 제가 잠시 렘무트를 데려가도 되는 걸로요. 아, 어떻게 방법을 알아냈는지는 묻지 말아요.”

나는 라히트리안이 물어볼 질문을 예상하며 벽을 쳤다.

역시나 그걸 물어볼 생각이었는지 입을 열던 라히트리안이 조용해졌다.

그와 나란히 걸으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라히트리안이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여기듯이, 나도 이카르센 성에서 지내면서 알게 된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정확히는 어떻게 하면 라히트리안의 심기를 건들지 않고 잘 구슬릴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이라고 하겠다.

“이번에는 잘 끝났어요?”

“일단은 그렇다고 하지.”

“뭐예요, 두루뭉술한 대답은. ……그래서 저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됐어요?”

내가 궁금한 건 이거였다.

사절단과 대화가 잘 끝나서, 내가 튜니아트 신성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여부.

그리고 그 시기가 언제인지도.

그 전에 아르고에게 받은 단검도 어디에 두었는지 알아봐야 하는데…….

돌아가면 에테르온과 아틀레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신성력을 전부 갈취하려 할 테니까.

“황녀는 왜 그렇게까지 돌아가고 싶어 하지?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텐데.”

“누구는 가고 싶어서 가요?”

“그럼 억지로 끌려가는 건가?”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내가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진지해지려는 분위기에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넘어가려는데 라히트리안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웃고 있던 표정을 지우고 라히트리안을 올려다봤다.

“그런 거라면?”

“……에?”

조금 멍청하게 들리는 반문이었다.

어, 왜 이렇게 순순히 수긍하지? 이러면 안 되는데?

원래 사람은 속내가 찔릴수록 부정하지 않던가?

그걸 노리고 한 말이었는데 예상외로 직진으로 꽂고 들어오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어……, 농담하지 말아요.”

“황녀에게 혼담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알고 있었나?”

“네?”

“몰랐군.”

나는 경악스럽게 입을 벌렸다. 혼담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로이드한테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은 없었다. 격앙된 내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세이어드한테 벌써 혼담 들어왔대요?!”

“혼담이 들어올 줄은 알았는데…… 너무 빨라서 놀란 거였나?”

“아,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세이어드라. 언제부터 그렇게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 남자가 저한테 혼담을 보냈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마족을 소환하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국혼을 추진하려는 걸까?

‘미쳤나 봐. 역시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어.’

그걸 감수할 만큼 세이어드도 황위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다는 방증이었다.

“그럼 황녀는 어떻게 하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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