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61)

“렘무트, 앉아요.”

“……너, 언젠가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네네, 알겠으니까요.”

분함으로 가득한 얼굴과 달리 렘무트는 착실하게 바닥에 앉았다.

역시 계약은 확실하게 성립된 것 같았다. 내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으니까.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혹시 내 영혼 대가로 가져갔어요?”

“……으득.”

응, 못 가져갔구나.

운이 좋게도 일방적으로 내게 유리한 계약을 맺게 된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렘무트는 감옥에 갇혀 자유까지 잃고 말았으니. 얼마나 계약을 파기하고 싶을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게다가 렘무트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이미 한 차례 오백 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던가.

‘머릿속이 엄청 복잡하겠지.’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지 타오르는 적안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간절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물론 나는 렘무트를 자유롭게 풀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흥, 꼴좋다.”

“야.”

“뭐.”

“…….”

“지금 나한테 말 놓은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고.”

저렇게 꼬리를 말아 내리는 것만 봐도 내 말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도 알겠고.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렘무트는 내게 아주 든든한 존재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데려갈 수만 있다면 말이지.

물론 방법은 렘무트에게 직접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렘무트라면 지금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테니까.

나는 아르고를 힐끔거렸다.

“자리 좀 비켜 줘요, 아르고.”

“하지만 그건…….”

“렘무트가 절 해칠 수 없다는 건 방금 봐서 알잖아요.”

아르고의 은회색빛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내 요구를 들어주는 건 별로 내키지 않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긴, 자리를 뜨기에는 조합이 묘하기는 하다.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황녀와 마룡이 계약을 맺은 것도 모자라 은밀한 대화까지 하겠다는 순간이니까.

“그럼 잠깐만입니다.”

“네. 오 분이면 돼요.”

아르고가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나는 렘무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속셈이냐는 듯이 나를 노려봤다.

“렘무트, 계약 파기하고 싶지 않아요?”

“……해 줄 거야?”

“당연히 안 해 주죠.”

“하?”

동그랗게 떠진 눈이 당황스럽게 깜빡거렸다.

“물론 당신이 제 부탁을 잘 들어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요.”

“무슨 뜻이야.”

“제가 조만간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게 생겼거든요. 나 좀 도와줘요. 황위를 쟁취해야 해요.”

내 말에 렘무트가 비웃음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의아하게 렘무트를 바라보자 그가 정말 모르냐는 듯이 물었다.

“황위를 쟁취하려고 돌아간다고 하면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 잘도 그 꼴을 두고 보…….”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렘무트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비더니 떨떠름하게 물었다.

“근데 너, 어떻게 살아 있어?”

“……갑자기 왜 시비예요?”

나는 기분이 언짢아져 인상을 썼다.

살아 있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식의 말투라니. 누구라도 저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렘무트가 급하게 창살 가까이 다가와 나를 죽 훑어보기 시작했다.

“정말 멀쩡하잖아.”

“……지금 그거 무슨 뜻이에요. 내가 무사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미친, 이게 무슨 상황이야. 설마 전부 튜니아가 의도한 건가? 그럼 이카르센의 영생도 이번에…….”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알아듣지 못할 말투성이였다.

갑자기 여기에서 여신의 이름은 왜 언급되는 것이며, 라히트리안의 영생은 또 무슨 상관인지.

“여신이 튜니아트 신성 제국을 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렘무트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가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다시 원점으로 돌리고 있던 거였어?”

“렘무트, 알아듣게 말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군.”

“……당신 혹시 다시 갇혀버리는 바람에 미친 거 아니죠?”

나는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주 멀쩡해. 그래서 나한테 부탁하려는 게 뭐야.”

돌연 렘무트가 급속도로 차분해진 상태로 물었다.

갑자기 협조적인 태도에 내가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체스 말이 되었으니,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줘야지. 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결과는 뻔하잖아.”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벌써 오 분이 지난 모양이었다.

아르고가 오고 있는 방향을 잠시 보던 렘무트가 샐쭉 웃었다.

“일단 나부터 여기서 꺼내, 리즈벳 튜니아트. 그다음에는 뭐든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하지. 나를 꺼내는 방법은 간단해.”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내 이름을 불러.”

“무슨 소리예요. 그동안 몇 번을 불러도 앞에 안 나타나던데요.”

“아니, 그때는 될 거야.”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끝으로, 반대편에서 아르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륵.

화등이 꺼지고 사방이 어두워졌다.

* * *

라히트리안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러면 그렇지. 얌전히 있기는 무슨.

아침에는 라히트리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굴던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마룡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가 사역마를 통해 리즈벳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아르고가 바로 눈치채긴 했지만.

“알량한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입 다무시랍니다.”

사역마는 충실하게 그의 뜻을 전달했고, 아르고의 반응은 빨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재빨리 고개를 돌렸으니까.

라히트리안은 일전에 리즈벳이 마룡의 처리를 보류하자고 하던 제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기회를 엿봐 마룡을 찾아갈 거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걸 보니 뭐라고 해야 하나…….

기가 막혀서 오히려 화낼 의욕도 안 생긴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마룡의 기운에 밀려 중간에 연락이 끊긴 게 찝찝하기는 했지만, 우선은 리즈벳이 호수 밖으로 나올 때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라히트리안 님.”

“음?”

“관심 없으신 건 알겠지만 집중 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안이 거의 울먹이며 귓가에 속닥였다.

라히트리안이 맞은편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한껏 기분이 상해 보이는 로이드 윈저와 눈이 마주쳤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한다.’

황녀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거나 다름없었지만.

“……마탑주께서는 저희를 앞에 두고도 생각하실 일이 많으신가 봅니다?”

“실례했군. 부탁받은 걸 들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누구한테 받은 부탁이기에 저희가 하는 말에 답도 해 주지 않으시는 건지?”

로이드의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다.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 갈무리 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드러났다.

응접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이안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때였다.

“커흠, 흠흠.”

종일 침묵을 지키던 트리아 백작이 주먹을 쥐고 입을 막더니 작위적으로 헛기침을 뱉었다.

이에 응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트리아 백작에게로 쏠렸다.

라히트리안에게 기가 눌려 그 후로 제대로 된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던 서번트 트리아가 이제야 말문을 연 것이다.

이안은 내심 안도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트리아 백작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보군요?”

“사실 확실하지 않아 지금껏 말하지 않았지만…….”

답지 않게 기세등등했다. 이번에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불안하게 일렁이는 로이드의 기운이었다.

“트리아 백작,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꺼내서 좋을 게 없습니다.”

로이드가 언짢아하는 기색으로 만류했다.

리즈벳에게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저리 예민하게 반응하니, 라히트리안은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카르센 제도도 곧 알게 될 일 아니오?”

“뭘 알게 된다는 겁니까?”

그가 흥미로워하며 관심을 보이자 트리아 백작이 씩 웃으며 가슴을 폈다.

“윈저 공자가 아무리 아니라고 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이미 들어온 혼담 아니오?”

“혼담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자안은 트리아 백작을 보고 있었으나, 이안에게 묻는 것이었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트리아 백작은 역시 모를 줄 알았다며 득의양양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아트레시아 제국의 2황자가 이번에 은밀하게 리즈벳 황녀님에게 혼담을 넣어 왔으니까요.”

라히트리안의 표정이 쩍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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