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61)

“설마. 아니카와 연락하느라 늦게 잔 거겠지.”

“……에?”

“사람을 봐 가면서 속여, 황녀.”

라히트리안의 자안이 어느 한 곳에 멈추어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바닥에 가볍게 괴고 있던 턱을 떼고 팔목을 들어 보였다. 아르고가 준 팔찌가 헐렁하게 위로 타고 올라왔다.

찰랑.

“내가 그 팔찌도 못 봤을까.”

“……어, 어떻게 알았어요?”

당연히 모를 줄 알았는데.

소매에 가려져 유심히 보지 않으면 팔찌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기 어려웠다.

“나를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져 무척 설레?”

어정쩡하게 굳어 버린 나를 보는 라히트리안이 여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위로 올라간 한쪽 무릎을 두 손으로 감싸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어디 한번 변명해 봐. 들어는 줄 테니까.”

“……아니카랑 연락하느라 늦잠 잔 건 아니에요. 정말로.”

“그렇군.”

라히트리안의 미소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해명으로는 턱도 없다는 거구나.

아마도 라히트리안은 방금 전에 한 말에 날이 선 것 같았다.

내가 그를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져 무척 설렜다는 그 말.

‘적당히 좀 넘어가지. 그러는 자기도 지금 연기하는 거면서.’

하지만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으니 급히 음료가 담긴 잔을 들어 꿀꺽 삼켰다.

“이참에 솔직해지는 게 좋겠는데.”

“전 항상 솔직했어요.”

“그럼 나한테 계속 말장난 하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건가?”

“……마, 말장난이요?”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나도 일부러 그러는 거였으니까.

그가 말하는 ‘말장난’은 내가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전략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히트리안이 내게 하는 것만큼, 나도 그대로 돌려주자. 나만 당하면 억울하니까!

“정말……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된 이상 웃자. 아니라고 잡아떼면 라히트리안도 끝까지 추궁하기 애매해질 테니까.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도 없을 테고.

나는 살살 라히트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할 말이 더 있는지 미간을 구기고 있었지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괜히 아까부터 먹고 있던 크림 파스타를 입 안에 가득 넣으며 오물댔다.

파스타는 내 취향에 꼭 맞춰 치즈가 듬뿍 얹어져 있었다.

“아, 이안이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고 있었나 봐요. 아닌 척 세심하다니까요.”

“…….”

“그런데 이안은 어디 간 거예요?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데. 항상 같이 다니더니 오늘은 웬일로 라히트리안 혼자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안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뭐, 그도 항상 라히트리안만 따라 다닐 수는 없겠지. 이안에게도 개인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왜, 이안이 보고 싶나 보지?”

“그건 아니지만…… 안 보이니까 허전해서요. 빈자리를 느낀다고 해야 하나.”

“……빈자리?”

어째서인지 라히트리안의 분위기가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아닌가?

포크로 돌돌 면을 말던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힐끔 라히트리안의 눈치를 봤다.

갑자기 왜 저러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일렁이는 자안이 무섭게 날 보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봐요?”

“이 음식들은 내가 직접 준비하라 이른 거야, 황녀.”

“…….”

“이안이 아니라.”

“…….”

“이안은 황녀 기호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거든. 답이 되었나?”

……네, 무척.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음식들을 전부 라히트리안의 지시로 준비된 거란 말이지.

왜? 어떻게?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라히트리안이 나한테 언제부터 내 취향을 꿰뚫고 있었지?

그의 치밀함이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카르센 제도에서 지낸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라히트리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음, 고마워요. 라히트리안. 당신이 지시했을 거라고는…… 당연히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기억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

“라히트리안은 모르는 게 없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불공평해.”

내가 어떤 음식을 먹을 때 들뜨는지 라히트리안은 금방 알아차렸을 테니.

근데 바꿔 말하면 라히트리안은 하루 종일 내 감정을 전달받고 있다는 건데.

피곤하지는 않은 건가?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만약 라히트리안이 아니라 내가 감정을 전달받는 입장이었다면, 그의 속내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까?

그걸 내가 감당할 수는 있을까?

문득 라히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사절단과 약속한 시간이 됐으니 가 봐야지. 그대와 말한 것도 지켜야 하니까.”

“아. 그럼…….”

“내가 자리 비웠다고 사고 치지 마, 황녀.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라히트리안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내 팔찌를 한번 내려다봤다.

나는 팔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얌전히 있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물론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 * *

“아르고! 여기예요.”

“그러다가 들키겠습니다. 이번에 걸리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거든요.”

나는 아르고의 투덜거림을 가뿐하게 무시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만나자고 한 거예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뜬금없게도 북쪽 산책로가 있는 호숫가 앞이었다.

렘무트와 만나고 싶다는 부탁을 하니 이곳으로 나오라고 해서 오기는 했지만…….

어디를 봐도 지하 감옥처럼 보이는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아르고는 궁금증을 해결해 주듯 호숫가 아래를 가리켰다.

“이 아래 있습니다. 죄인이 탈출을 시도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거기까지만 말해도 알 것 같아요, 아르고.”

죄인을 절대 살려서 내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아르고가 호숫가 앞으로 걸어가 손바닥에 얕은 상처를 냈다.

피부를 따라 흘러내리는 붉은 방울이 호수의 수면 위로 떨어지자, 출렁이던 물결이 잠잠해지더니 반으로 확 갈라졌다.

“와.”

놀라 그것을 보고 있는데 중앙에 물길로 만들어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깁니다.”

“……어, 가도 되는 거 맞죠?”

“네.”

“무, 물이 갑자기 덮쳐 온다거나?”

내가 인위적으로 갇혀 있는 물길을 가리키며 묻자 아르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일 없으니 들어가지요. 시간도 얼마 없으니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라히트리안은 지금 사절단을 만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네?”

“뭐, 걸려도 괜찮은 건가. 봐주시겠지.”

아르고가 특정한 방향으로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아르고가 보고 있던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른 뒤를 따라갔다.

감옥은 튜니아트에서도 가 보지 않은 낯선 장소였기 때문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해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분위기가 으스스하지 않아요?”

“황녀님.”

“네?”

“……그렇게 꽉 붙잡으시면 제가 걷기 불편합니다만.”

바짝 붙어 꼭 쥐고 있던 아르고의 소맷단을 슬쩍 놓았다.

그가 목을 쓰다듬더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 목숨을 귀하게 여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충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남들 사는 만큼은 살고 싶거든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

장황하게 말한담.

그러나 아르고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진중한 눈빛이었다.

게다가 은근하게 안색이 희게 질려 있는 게…….

“어디 아파요?”

“아니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요?”

아르고의 말을 순순히 믿기에는 과하게 창백했다.

“황녀님께서 저와 거리를 두시면 안전할 겁니다.”

“…….”

“그럼 가시죠.”

아니, 아직 설명이 부족한 것 같은데. 무슨 뜻이야 방금 저 말.

미묘하게 신경 쓰였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기에 우선 넘어가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도 푸른빛이 일렁이며 길을 비추고 있어 걷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이윽고, 아르고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아르고?”

“도착했습니다.”

“……음? 아무것도 없는 걸요.”

“당연합니다. 상대는 마룡이니까요. 그 눈을 보면 누구든 홀리기 십상이거든요. 그래서 평소에는 어둠으로 가려 두고 있습니다.”

어둠.

아마도 그것 때문에 아르고가 렘무트의 감시를 담당하게 된 것 같았다.

그가 손을 허공에 젓자 순식간에 벽에 설치되어 있던 화등이 일제히 타올랐다.

어둠 속에서 요요한 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목줄을 하고 있는 렘무트가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제야 날 만나러 오다니. 기다리다가 죽는 줄 알았잖아, 리즈벳.”

“오백 년도 갇혀 있어 봤으면서 고작 며칠 가지고 호들갑은요.”

나는 심드렁하게 창살 앞에 다가가 섰다.

“나랑 계약이 성립됐다고 하던데.”

“아, 그거 관련으로 할 말이…….”

“그럼 렘무트, 손.”

척.

렘무트가 홀린 듯 손을 내놓았다.

한 차례 정적이 일었다.

충격으로 굳은 얼굴이 꽤 볼 만했다. 균열이 일던 적안이 크게 뜨이더니 이내 일그러졌다.

“너!”

“조용히 해야죠, 렘무트.”

그러자 렘무트의 입이 다물렸다.

분하다는 듯이 으드득 갈리는 잇소리가 들려왔다.

그 옆에서 아르고가 당혹스럽게 나를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무렴 어떨까.

이곳까지 나를 안내해 준 아르고를 향해 방긋 웃자, 그가 흠칫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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