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2/61)

“아하하……. 그러게요. 왜 기분이 별로일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라히트리안의 속내는 진작 파악한 뒤였으나, 그가 작정하고 구슬리려 하니 면역력이 한참 부족했다.

저 잘난 외모로, 서로가 이성임을 자각해 달라 하는데 누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냐고!

눈치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 같은데. 그럼 좀 물러나 주실까.”

“……윽.”

“발.”

라히트리안이 문턱을 막 넘으려던 내 발을 눈짓했다.

나는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괜히 고집부려 방 안에 들어가려 해도 라히트리안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 뒤로 넘어질 게 뻔하기도 했고…….

내가 크게 한 걸음 뒤로 가자, 라히트리안이 반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외쳤다.

“알겠어요.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니까 거기 가만히 있어요! 다가오지 말아요!”

이게 뭐라고 라히트리안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게 되는 건지.

나는 울상을 지으며 파드득 라히트리안과 멀찍이 떨어져 벽에 철썩 달라붙었다.

위험해, 엄청 위험했다.

하마터면 라히트리안의 의도에 휩쓸릴 뻔했어.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라히트리안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궁지에 몰린 초식동물 같이 행동하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라히트리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황녀?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말아요.”

나는 급히 복도 양쪽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남자가, 한번 해보자는 거지?

내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자 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라히트리안의 기분이 들떠 보이는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지금 본인의 수작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거겠지.

‘불공평해. 왜 나는 라히트리안의 감정을 알 수 없는 거냐고.’

이래서는 내 속내를 감출 수도 없으니 무척 곤란했다.

“그럼 찾아온 용건이 뭔지 들어 볼까.”

“제 용건은…….”

그래서 나는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얼른 해야 할 말을 대충 하고 침실로 돌아가자고. 나머지 볼일은 내일을 기약하면 되겠지.

“비밀로 해 달라고요.”

“무엇을?”

“제가 이카르센 성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 전부 로이드한테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어요. 트리아 백작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곳에서 있던 일이 알려지게 되면 또 로이드에게 붙잡혀서 몇 시간이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들어야 할 테니까.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전부 비밀로 해 달라?”

“네.”

“아, 그러니까 지금 황녀는 내게 부탁하러 온 거군?”

“맞아요.”

“내가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이유가 뭐지.”

라히트리안의 입매가 짓궂게 올라갔다.

드, 들어줄 이유는 없지.

하지만 살짝 억지를 부리면 할 말은 있었다.

“당신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는 바람에 이 시간에 돌아온 거잖아요. 제가 얼마나 곤란했는데요.”

“나는 로이드 윈저가 물어보는 것에 충실하게 답할 의무가 있어.”

“……이럴 때만 충실하기예요?”

“어쨌든 지금 그는 카로스 튜니아트의 대리인이니까.”

불가항력이라는 뜻이었다.

하, 참 나.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벙긋거렸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내 표정을 읽은 라히트리안이 얄밉게 덧붙였다.

“이제부터 신경 써 보려고.”

“……알겠어요. 그럼 적당히 돌려 말해 주세요. 그건 해 줄 수 있죠?”

“그럼 나한테 돌아오는 이득은?”

“…….”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라히트리안이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으며 생긋 웃었다. 확신에 찬 어조가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울컥해 입술을 그러 물었다.

분명 지금 내게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은 라히트리안인데, 어쩐지 상황이 반대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치사해요.”

“원래 세상은 치사한 법이야, 황녀.”

……아무리 봐도 이건 내 호감을 얻으려는 태도가 아닌데.

내가 잘못 짚은 건가?

그럼 왜 응접실에서는 손해 배상을 꼭 나한테 받아야겠다는 억지를 부린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 같으니.

골똘히 그의 의도가 무엇일까 고민에 잠겨 있는데 정수리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못 들어줄 것도 없는 것 같군.”

“네?”

“어려운 것도 아니니.”

“…….”

“불만이 많아 보이는 얼굴인데. 할 말 있나?”

아니요. 그런 게 있을 리가요.

나는 고개를 냉큼 저으면서도 긴장감에 손끝으로 손바닥을 꾹 꾹 눌렀다.

이제 깨달은 사실인데,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은 사람을 다루는 데 현란한 솜씨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 황녀도 마음 놓고 방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시간이 늦었으니.”

라히트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내 침실을 눈짓하다가 잊었다는 듯 ‘아’ 했다.

“그렇다고 너무 마음 놓지는 말고.”

“……해 주시면 해 주시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일 사절단과의 만남은 점심에 이어서 하기로 했으니……. 그 전에는 시간이 비겠어.”

나는 라히트리안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꺼내고 있는 건지 깨달았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위로 끌어 올렸다.

아무렴, 알아들었다.

“그럼 저랑 좀 놀아 주세요, 라히트리안. 제가 무척 심심할 것 같거든요.”

……정신줄 제대로 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라히트리안의 현란한 솜씨에 휘둘릴 가련한 양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황녀가 그렇게 부탁하니 들어주도록 하지.”

* * *

“……보통 내기가 아니잖아?”

나는 방문을 쾅 닫고 문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라히트리안에게 감겨 있었다.

“속내를 알면 뭐 해.”

아무것도 손쓸 수 있는 게 없는데!

나는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감쌌다.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라히트리안이 작정하고 나오니 속수무책이었다.

나한테 호감을 사려는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당하는 기분이란!

“아니지.”

본인이 나한테 잘 보이려고 저러는 건데, 내가 겁 먹고 고민할 필요는 없지.

“갑자기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도 나랑 붙어있는 시간을 늘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 틀림없어.”

나는 뒤늦은 깨달음에 이마를 탁 쳤다.

이런 바보 같은! 그걸 이제 눈치채고 라히트리안에게 놀아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왔다니.

이게 바로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거구나.

“후우. 아니야, 괜찮아. 원하는 건 얻어냈잖아……?”

방 안에 멍- 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오기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앞을 보자,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투명한 창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

결연한 표정과 푸른 벽안이 예기를 띠며 번뜩이고 있었다.

“누구는 못 구슬릴 줄 알고-.”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데 손목에 반짝이는 팔찌가 보였다.

“아, 맞아. 아니카한테 연락해 보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고. 시계를 확인하니 밤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 안부를 묻는 것도 실례일 텐데.

“하는 수 없지. 내일 해야겠다. 그리고…….”

렘무트를 만나러 가야지.

라히트리안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아르고에게 찾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흐물거리는 입꼬리를 거침없이 주욱 올렸다.

잠자리에 들기 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다가 잠시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거까지 받은 건 죽어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 확신이 얼마나 안일한 것이었는지 깨닫기까지는 채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 * *

“푹 잔 모양이지, 황녀. 안색이 좋군.”

“네, 그럼요. 라히트리안도 잘 잤어요?”

나는 가식적인 웃음을 얼굴에 한껏 띠며 답했다.

턱을 괴고 방긋방긋 웃고 있자 그런 나를 빤히 보던 라히트리안이 목울대를 울리며 웃었다.

“황녀.”

“네?”

“뒤로 좀 갔으면 좋겠는데. 거리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요? 전 우리 사이가 이렇게 가까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다 마르지 않아 물기가 송글송글 떨어지는 내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샴푸의 잔향이 진하게 남아 라히트리안과 나 사이에 맴돌았다.

음, 확실히 가깝기는 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와 라히트리안의 은근한 신경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딘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느껴지던 아침.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니 점심까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간담이 서늘했는지 모른다.

욕실에서 분주하게 씻고 급하게 방문을 나섰을 때, 문 앞에 서 있던 라히트리안과 맞닥트렸다.

그가 놀란 얼굴로 굳어 버렸던 것만 떠올리면 절로 민망해 뺨이 화끈거렸다.

그렇다고 눈까지 크게 뜨고 놀랄 필요는 없지 않나. 내가 과하게 덤벙대기는 했지만.

나는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턱을 괸 채 뒤로 쭉 물러났다.

“……좀 떨어지는 게 좋기는 하겠어요.”

“늦잠을 잔 모양이지.”

“네. 라히트리안이랑 아침부터 만날 거라 생각하니 너무 떨려서 잠이 안 오던 거 있죠.”

“…….”

“그러니까 늦잠 잔 건 이제 그만 말하면 안 될까요?”

민망해서 얼굴이 터질 것 같으니까.

라히트리안이 내 뻔뻔스러운 말에 멈칫했다.

그의 자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없었지만…….

‘보나 마나 이번에는 또 무슨 말로 놀릴지 고민하는 거겠지.’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무슨 말을 듣게 될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굳게 다물려 있던 라히트리안의 입술이 보기 좋게 열리며 나온 말은, 내가 예상했던 모든 것을 빗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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