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61)

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라도 된 양 무릎 위에 양손을 가지런하게 올려 두고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트리아 백작님.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십시오.”

“……그래요, 그러지. 그럼 황녀님,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트리아 백작이 남아있어 주길 간절히 바랐으나, 로이드의 기세에 눌린 백작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정말 둘만 남게 되자 로이드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황녀님.”

“네.”

“이제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게…….”

말하자면 너무 길고 걸리는 게 많았다.

로이드가 물어보는 게 단순히 라히트리안과의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튜니아트 제국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부터 시작해 이카르센 제도에 오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등등 이 사태의 모든 걸 묻고 있는 거였다.

“저에게 설명하셔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요. 우선 황실에서 본 붉은 머리 남자부터 이야기해 보는 걸로 하지요.”

로이드가 무섭게 생긋 웃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하, 하하하…….”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어색하게 웃어 넘겼지만 로이드는 어림도 없다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로이드, 한 번만 모른 채 해 주면 안 돼요?”

결국 울상을 지으며 부탁하자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로이드는 마음이 약해졌는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꺼내는 것도 의미 없으니까요.”

“정말이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도 하고요.”

더 중요한 일이라니? 웃고 있던 얼굴 근육이 굳어 가는 게 느껴졌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그 전에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 거짓 없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무엇인데요?”

“황성에서 직접 도망가셨으니 황실의 비밀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되겠고.”

그는 내 표정을 보고 답을 얻었는지 굳이 맞느냐며 되묻지 않았다.

“라히트리안 이카르센과 엮인 것을 보면, 그 붉은 머리 남자가 이카르센 제도와 관련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거겠지요.”

또 이미 확신을 가진 상태에서 확인만 하는 것처럼 보여 아니라고 잡아떼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나는 순순히 수긍하기로 했다.

“……네, 맞아요.”

“그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부정은 안 하시겠지요.”

끄덕끄덕.

“황녀님, 대체……!”

움찔. 내가 어깨를 움츠리자 로이드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속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로이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자의 행동이 매우 악랄합니다. 황태자님의 발작을 시녀에게 옮기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하더군요. 황태자님께 전조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돌을 만지신다고 하고요.”

알고 있었냐는 듯 에메랄드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역시 렘무트가 에테르온의 발작을 막은 거였구나. 내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드는 반쯤 포기한 것 같았다.

렘무트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손을 잡았다고 시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디에서 이런 정보를 얻은 거지?’

분명히 마지막에 마주쳤을 때 로이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어디에서 정보를 수집했는지 몰라도 로이드는 황실의 비밀과 최근에 일어난 사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자가 누군지 알고 따라나선 겁니까?”

“……아니요.”

“모르셨다고요?”

그때는 몰랐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로이드는 내 대답에 잠시 멍한 얼굴을 하다가 울컥했는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해도 그렇지 아무나 따라가면 위험하다는 걸 모르십……!”

“잘못했어요.”

하지만 그때는 진짜 그 방법 말고는 없었단 말이야.

내가 의기소침하게 잘못을 시인하자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날 응시하던 그가 툭 말했다.

“그래도 무사히 탈출하셔서 다행입니다.”

“네?”

“덕분에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요. 적어도 최소한의 대책은 마련할 수 있겠지요.”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의 말은 꼭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폐하께서 사절단을 보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나는 소파 끝을 꾹 쥐었다. 지금까지 방관하던 황제 카로스가 갑자기 개입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렘무트가 에테르온에게 내 행방을 알려 주었으니, 카로스의 귀에도 진작 들어갔을 텐데.

그동안 잠잠하다가 이제 와서 사절단을 파견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게 있어 나는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이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이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사절단을 보낸 것도 그 이유 때문이겠네요.”

“누가 되었든 황위를 물려받을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황녀님께서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오셔야 하고요.”

“제국에는 온전한 신성력이 필요하니까요.”

“맞습니다.”

로이드가 수긍했다. 그래서 사절단을 보낸 거였다.

카로스는 직접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황위를 물려받을 후계자는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 일을 꾸민 것이다.

이 사실을 다른 공작 가문도 모르지 않을 터. 이미 귀족들도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제가 귀족들의 사냥감이 되지 않으려면 더더욱 튜니아트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귀족은 황실이 건재해야 유지될 수 있으니 말이지요.”

다른 국가는 몰라도, 튜니아트 신성 제국은 황실이 건재해야 귀족들도 신분을 유지하며 군림할 수 있었다.

튜니아 여신의 가호 아래 세워진 제국인 만큼 황실이 무너지게 되면, 튜니아트 황실에서 직위를 하사받은 귀족들을 제국민이 인정하려 들 리 없으니까.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위를 손에 얻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싫으십니까?”

“당연히 싫어요. 저는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를 꿈꾸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높은 자리는 한 번도 원한 적 없었다. 하지만 생사가 걸린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일단 황위부터 얻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할지 고민해 봐야지.

그 전에 나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게 있었다.

“그런데 로이드는 선택권이 없는데 어떡해요?”

좋든 싫든 나를 도울 수밖에 없으니까.

뜬금없는 내 말에 로이드가 무슨 뜻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저한테 고대어 알려 줬던 거 걸리면…….”

나는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로이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 도움의 보답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시다니요.”

“어쩔 수 없잖아요. 내 편이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라도 포섭해야죠.”

내가 생글거리며 웃자 로이드도 바람 빠진 소릴 내며 픽 웃었다.

“그런 자라면 이미 한 명 더 있습니다.”

“누구요?”

“벨리언 카드리아입니다.”

나는 멍하게 입을 벌렸다.

카드리아 공작가라면 이미 에테르온에게 충성을 맹세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 이름이 왜 로이드 입에서 나와?

황실을 비운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나 보다. 카드리아 가문이 에테르온을 배신하다니.

“의외로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 복병이군요. 그자가 허락하지 않으면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이카르센 제도는 라히트리안의 권역이니 허락 없이는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동 스크롤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가 마력의 흐름을 방해하면 끝이었으니까.

나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로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에메랄드 눈동자가 생긋 접혀 들어갔다.

그 미소에 슬슬 불안감이 올라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래서.”

“히끅.”

“그 손해 배상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일까요? 두 분 사이에 해결해야 하는 건 또 뭐고요.”

“……그, 그건.”

“그건?”

“그건 제가 라히트리안이랑 잘 해결하고 나서 알려 줄게요!”

“아.”

로이드가 표정을 지우더니 곧 살벌한 기운을 풍겼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이카르센 주인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사이가 되셨습니까? 아까 보니 꽤 사이가 친밀해 보이시던데.”

아무래도 2차전이 시작된 것 같았다.

* * *

“라히트리안!”

“꽤 늦었군.”

“이럴 줄 알고 그런 거잖아요.”

“로이드 윈저가 이렇게 길게 붙잡아 두고 있을 줄은 몰랐어.”

라히트리안의 방 앞에 도착한 나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일부러 로이드 앞에서 보란 듯이 행동했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덕분에 내가 로이드의 끈질긴 질문 공세에서 벗어난 건 해가 지고 저녁이 찾아온 다음이었다.

어찌나 질문을 쏘아 붙이는지 진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몇 번이나 라히트리안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로이드는 그제야 알겠다며 놓아주었다.

물론 그냥 놓아준 건 아니었다. 마지막에…….

“황녀님께서 이성을 보는 눈이 매우 높으실 거라고 삼촌으로서의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라는 말에 그러겠다며 몇 번이고 주의를 받아야 했으니까.

나는 방문 앞을 여전히 막고 서 있는 라히트리안을 보며 말했다.

“할 말 있어요.”

“해.”

“여기에서요?”

“그럼 어디에서 하자는 거지?”

라히트리안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방 안으로 눈길을 보내자 그가 멀리 떨어지라는 듯이 내 이마를 쭉 밀어냈다.

“윽.”

“어딜.”

그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흡사 ‘이걸 어떻게 하지?’ 같은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황녀는 종종 나와 성별이 다르다는 걸 잊어버린 것같이 굴 때가 있어.”

동시에 라히트리안이 표정이 지워졌다.

“그래서 기분이 별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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