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4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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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라히트리안의 사역마를 따라 긴 복도를 한참 동안 걸었다. 복도 기둥 사이 사이로 중앙 화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인님, 리즈벳 황녀님을 모셔 왔습니다.”

    반구형으로 만들어진 문 앞에 멈춰선 사역마가 가볍게 노크하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 도착을 알렸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하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분위기가 왜 이래?’

    잘못 찾아온 건 아니겠지.

    문턱을 넘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싸늘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눈치를 보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라히트리안을 바라보자 그가 사색이 된 중년 남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마침 황녀가 왔으니 물어보면 되겠군, 서번트 트리아.”

    서번트 트리아. 낯설지 않은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중년 남자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땀을 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라히트리안의 심기를 건드린 것 하나는 확실했다.

    “리즈벳 황녀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려 입을 놀리던 그는 라히트리안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제 목을 살짝 만져 보는 게 아무래도 라히트리안에게 협박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무슨 협박을 당했는지 왠지 알 것만 같아.’

    아마도 목을 잘라 버린다는 협박이 아닐까.

    상황이 계속해서 악화되자 로이드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승기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말할 것도 없었다.

    “방금 트리아 백작의 발언은 저희 쪽 실수이니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쎄. 별로 내키지 않는데. 면전에서 황녀를 납치했다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았는데 그냥 넘어가 달라니. 튜니아트 신성 제국은 생각보다 뻔뻔하군.”

    응,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저건 내가 두둔해 줄 수 없겠어.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나까지 숨이 막힐 것 같아 응접실에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로이드에게 알은척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로이드. 잘 지냈어요?”

    “네, 황녀님도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여기에서 무척 잘 지냈어요. 그때 다친 곳은 없었고요?”

    내가 사근사근 웃으며 대꾸하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라히트리안이 나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이 열렸다.

    “황녀.”

    “네?”

    “언제까지 서 있을 거지? 이리 와 앉아.”

    라히트리안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내 물음에 대답하려던 로이드의 시선도 덩달아 그의 옆자리로 향했다.

    내가 자연스럽게 라히트리안의 곁에 앉으려 할 때였다. 로이드가 끼어들었다.

    “황녀님께서는 이쪽에 앉으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만.”

    “아니. 황녀는 지금 이카르센 제도에 머물고 있으니 내 옆에 앉는 게 맞지.”

    라히트리안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이신지?”

    로이드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하긴, 내가 튜니아트 황녀인데 라히트리안 옆에 앉는 것도 모양새가 좀 그렇지.

    어디에 앉는 게 맞는 걸까 고민하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고 나를 응시했다.

    “어디에 앉을 거지, 황녀? 골라 봐.”

    “고를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당연히 여기 앉으셔야지요.”

    두 사람 사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자리싸움에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별것 아닌 문제로 이렇게까지 진지하다니. 오히려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으음, 어떻게 한다…….’

    나는 짧게 망설이다가 라히트리안의 옆에 앉았다. 로이드와 트리아 백작이 앉은 자리는 이미 공간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맞은편으로 가자 로이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반면 라히트리안은 내 결정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조금 전 트리아 백작이 실수한 건 넘어가도록 하지. 이쪽도 튜니아트 제국과 갈등을 빚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자 쥐 죽은 듯 조용하던 트리아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이카르센 제도에서 황녀님을 보호하고 있던 것을 오해했습니다.”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이군.”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는 언급은 애매했지만 라히트리안은 굳이 그 부분을 정정하지 않았다.

    끝까지 눈치 없는 백작의 태도에 로이드는 짐짓 인상을 찡그리다가 끊겼던 본론을 이어 갔다.

    “너그러이 넘어가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리즈벳 황녀님이 이곳에 계신다는 걸 확인한 이상, 더는 이카르센 제도에 머물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황녀님께서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굳이 이유는 필요 없겠지요.”

    속뜻을 풀어 보자면, 이카르센에서 나를 데리고 있을 명분이 없으니 당장 나와 함께 튜니아트로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처음 보는 로이드의 강경한 모습에 새삼 놀랐다.

    평소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예의를 잃지 않던 그가, 라히트리안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 저런 가시 가득한 화법까지 구사하다니.

    ‘어쩌면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럼 남은 건 라히트리안이 가져간 단검인데……. 어디에 뒀으려나?’

    로이드의 말대로 이카르센에서 나를 붙잡을 명분은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라히트리안은 로이드의 말을 칼같이 거절했다.

    “아니, 그건 이쪽이 곤란해.”

    “이카르센이 곤란할 건 없어 보입니다만.”

    “계산할 게 아직 남았거든.”

    계산할 게 남았다니?

    라히트리안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입매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덩달아 불안해진 내가 급히 라히트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계산할 게 뭔데요?”

    “뭐기는. 황녀가 내 성을 보기 좋게 박살냈잖아.”

    “…….”

    “그것도 겁도 없이 마룡을…….”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나는 다급하게 라히트리안의 입을 양손으로 막았다.

    눈을 부릅뜨고 ‘저 사람들 앞에서 그걸 말하면 어떡해요?’라는 의미로 눈짓하자 그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힐끔 로이드와 트리아 백작을 살피고, 나는 라히트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은 반칙이죠. 이럴 거예요?”

    라히트리안이 입을 막고 있는 내 손을 톡톡 쳤다. 살며시 손을 떼자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럼 내 손해는 누가 배상하지?”

    “……그, 그거 제가 갚으면 되잖아요.”

    “얼마를 요구할 줄 알고?”

    “얼마인데요?”

    눈빛 교환을 하며 내가 난처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금 두 분 뭐 하시는 겁니까.”

    로이드가 차가운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어떤 자세로 있는지 깨달았다.

    다급히 입을 막느라 내게 밀려 반대쪽으로 상체를 뒤로 빼고 있는 라히트리안과, 한쪽 팔은 소파 등받이를 짚고 나머지 한쪽으로는 라히트리안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나.

    그리고 로이드와 트리아 백작이 대화를 들을 수 없도록 작게 말하느라 상당히 밀착된 자세를 하고 있었다.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자 자세를 바로 한 라히트리안이 피식 웃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어. 황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그런 거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상황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요!”

    억울함에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그럴수록 로이드의 표정은 서늘해지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한 로이드는 흔들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두 분, 무슨 관계이십니까.”

    “저희 아무…….”

    “설마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정말로 아무 사이 아닌데요.

    하지만 이미 단단히 착각한 로이드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황녀님.”

    “네. 로이드.”

    “튜니아트 제국으로 당장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카르센 성에 무슨 피해를 끼쳤는지 모르겠으나 황실에 알려지면 곤란한 문제라는 건 알겠습니다.”

    로이드는 별문제 되지 않는다며 생긋 웃었다. 상당히 열받은 듯한 에메랄드 눈동자가 번뜩였다.

    “손해 배상은 윈저가에서 처리하도록 하지요.”

    그러자 라히트리안이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 마음대로?”

    그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황녀에게 받고 싶은데. 직접.”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거 알고 계시겠지요?”

    “억지로 보인다니 유감이군.”

    “그게 아니면 뭡니까. 두 사람이 계속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것쯤은 아실 텐데.”

    로이드는 자신의 말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트리아 백작이 놀란 눈으로 보고 있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었다. 그만큼 로이드는 평정심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이러다 사달이 날 것 같아 로이드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아니에요, 로이드. 그걸 왜 윈저 가문에서 해결해요? 제가 갚으면…….”

    “그것 말고도 나와 황녀 사이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게 많아. 그렇지?”

    이제 로이드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아직 해결해야 할 게 많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걸 굳이 이 자리에서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나는 원망스럽게 라히트리안을 쏘아보았다.

    불난 데 기름 붓고 태풍까지 일으키는 행위를 서슴지 않은 라히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트리아 백작이 당황스럽게 손을 뻗었다.

    “어, 어디 가십니까? 이렇게 하고 그냥 가시면 저희는 어떡하라는 건지.”

    “남은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하는 걸로 하지.”

    라히트리안이 자리를 뜨며 말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그럼 황녀,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해.”

    탁. 응접실 문이 닫혔다. 혼자 남게 된 나는 어색하게 굳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이미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켠 로이드가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럼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들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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