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61)
  • * * *

    라히트리안의 침실이 있는 본성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자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마법사들을 전부 불러들였다더니, 처음 보는 사람들로 성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나타나자마자 하나같이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겠다는 듯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내 뒤에는…….

    “당신 일 안 해요?”

    “황녀가 집무실에 가는 걸 거부했잖아.”

    “……당연하죠! 우리 서로 갈 길 가요, 네?”

    아침부터 내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라히트리안이 뻔뻔하게 따라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저 사람들부터 어떻게 해 주시든가요.”

    “저들이 거슬리면 진작 말하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눈을 비비적거리던 성내 사람들이, 라히트리안의 시선 하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신도 가요.”

    “그럼 황녀가 나랑 같이 집무실로 갈 건가?”

    “사고 안 칠게요.”

    “믿음이 안 가서. 황녀가 날려 버린 게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았거든.”

    “……그, 그거 얼만데요?”

    “마법으로 내가 직접 만든 것들이라 값을 매기기 어려운데.”

    한마디로 돈으로 갚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울컥하여 걸음을 멈추고 빙글 돌았다. 뒤따라오던 라히트리안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살다가는 제 명에 못 살겠어!

    금방 그만둘 줄 알았는데, 라히트리안은 내 생각보다 훨씬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게 벌써 일주일. 이제 인내심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와 마주친 후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해결됐는지 궁금한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라히트리안은 내가 일어난 첫날부터 회복에만 전념하라며 교묘하게 내 질문을 피했다.

    그걸로 모자라 며칠이 지나도록 내가 궁금해 하는 건 전혀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어제 숲에서는 정점을 찍었다.

    라히트리안은 본인이 직접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말로는 산책 때마다 질문에 답해 주겠다고 했지만 어느 세월에 그걸 하나씩 주워듣고 있느냐고.

    사람 애타게 만들 작정이라면 아주 성공적이었다.

    “이제 더는 못 참겠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진심으로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그 정도로 눈치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그는 침묵으로 대답을 피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그냥 넘어갔어도 오늘은 제대로 설명해줘야 할걸요. 그렇지 않으면 라히트리안이랑 말도 안 섞을 거고, 맨날 모르는 척 지나갈 거라고요.”

    “…….”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너무 협박이 약했나. 하긴, 이런 게 통할 리 없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라히트리안을 협박하기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온실 속의 황녀가 살면서 타인을 협박해 볼 일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나는 조급해졌다. 무얼 또 걸고 넘어져야 좋을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보나마나 저 얼굴에 비웃음이 걸리면서 ‘그러든가. 편하군.’이라는 말이 돌아올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라히트리안의 입에서 침묵이 흐르고 반박할 거리를 열심히 모색하고 있을 때, 내가 예상한 것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답이 돌아왔다.

    “……얼마나.”

    “네?”

    “궁금한 게 뭔데.”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흐릿하게 곤란한 기색이 스치는 게 보였다.

    고작 이런 게 먹혀 든다고?

    내가 봐도 보잘것없는 협박에 넘어오는 모습에 놀라 올려다보았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라히트리안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알고 그러는 거라고 믿고 싶은데.”

    “……네?”

    “아니면 내가 좀 억울한데.”

    뭐라는 거야.

    내 인상이 찡그려지자 라히트리안의 인상도 같이 찡그려졌다.

    “모르고 그러는 거군.”

    “네. 말을 안 하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

    “아무튼 궁금한 게 뭐냐고 했으니까 알려주겠다는 거죠?”

    라히트리안이 비딱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적이지 않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거라도 얻어낸 게 어딘가 싶어 냉큼 물었다.

    “아니카랑 아르고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그러나 성의 있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첫 질문부터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자숙 중.”

    “……렘무트는 어떻게 됐는데요?”

    “지하 감옥.”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는요. 그대로 돌아가서 잠잠해요? 아무 짓도 안 하고?”

    “그건 황녀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 관심 두지 말았으면 하는데. 이카르센 제도에서 벌어진 일이니 내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지.”

    이 남자가!

    내가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자 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조촐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라는 걸 아나 보지.

    하지만 나도 쓰러져 있는 며칠 동안 정신은 깬 상태였기에 물어볼 건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어물쩍 넘어가려는 건 어림도 없다는 듯 하나씩 조목조목 따졌다.

    “아르고가 지하 감옥에서 렘무트를 감시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나랑 계약이 됐다는 것도.”

    “그걸 황녀가 어떻게 알고 있지?”

    “라히트리안도 제대로 안 알려 주면서 내가 그걸 왜 알려 줘야 해요? 아, 이건 내 문제니까 관심 두지 마시고요.”

    화사하게 웃으며 방금 들은 대답을 그대로 돌려주자 라히트리안이 움찔거렸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오늘 기필코 끝장을 보고 말겠어.

    이런 식으로는 목이 막혀 탄산수를 마셔도 뚫리지 않을 것 같다고!

    게다가 세이어드 아트레시아 이야기만 나오면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게 구니 더더욱 오늘로 모든 걸 끝내야 했다.

    나는 라히트리안과 계속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이카르센의 마법사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는 건 또 뭐예요.”

    “…….”

    “라히트리안. 자꾸 이럴 거예요?!”

    결국 항복한 라히트리안의 입이 열렸다.

    * * *

    그러니까 우선, 아니카는 내상 회복에 전념하기 위해 당분간 거처를 옮긴 상태라고 했다.

    내상 회복 중에는 타인의 마력이 오히려 치명적일 수 있어, 이카르센 성에서 유일하게 마력의 흐름이 차단된 장소에 있다고 했다.

    인적이 드문 서쪽의 별궁에 아니카가 머물고 있으니 원한다면 가도 좋다는 말도 함께였다.

    보고도 없이 무단으로 내게 협조한 아르고는 지하 감옥에 갇힌 렘무트를 감시하고, 나와 맺어진 계약을 안전하게 끊어낼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좀 나중에 해도 되지 않나?

    “렘무트랑 계약 해지는 나중에 하면 안 돼요?”

    “안 돼.”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은걸요. 마족은 계약자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책에서…….”

    ……봤는데.

    나는 라히트리안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동쪽 도서관 앞에서 마주쳤던 일은 서로 암묵적으로 꺼내지 않던 거였는데, 깜빡하고 내가 먼저 건드린 것이다.

    의외로 굳이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 라히트리안의 태도에 나는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곁에 둬야 하지 않을까요? 절 해칠 수 없는 데다 역으로 감시도 할 수 있잖아요! 여차하면 위험할 때 저를 지켜 달라 할 수도 있고요.”

    “……무모한 건지, 똑똑한 건지 알 수가 없어.”

    “둘 다라고 해요, 우리.”

    하지만 이 정도로는 명분이 부족한지 만족스러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 라히트리안에게도 득이 될 만한 이유를 들먹여 보는 수밖에.

    “사실 라히트리안도 나쁘지 않은 일이잖아요. 렘무트가 심장을 노릴 수 없게 됐으니까.”

    “그래서 마룡을 곁에 두겠다고.”

    “또…….”

    “그만하지. 어차피 마음 굳힌 것 같으니까.”

    “넵.”

    나는 그가 마음이 바뀔까 냉큼 대답했다.

    그는 렘무트를 하루라도 빨리 처리하고 싶을 만큼 거슬려 하는 듯했지만, 나는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생긴 것 같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실제 렘무트와 계약을 맺을 당시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렘무트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계약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게 아닐까.

    참고로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는 본국으로 귀환한 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사실 그게 좀 의문스럽기는 한데…….

    ‘세이어드가 그렇게 쉽게 물러난다고?’

    믿기지 않아 라히트리안에게 몇 번이나 사실 확인을 했고, 그렇다는 답을 들었으니 그런 거겠지.

    너무 허무한 결과였다. 혹시 내가 마족을 소환한 걸 보고 미친 여자라고 생각한 건가?

    조금 찝찝했지만, 본인에게 해가 될 거라고 판단한 거라면 오히려 잘된 걸지도.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겠다는데 얼마나 좋아.

    “그런데 황녀.”

    “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라히트리안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지? 겁도 없이.”

    “아. 그거야…….”

    당연히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막연하게 라히트리안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 것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그건 비밀이에요.”

    “……이쪽은 전부 말했는데 비밀이라고?”

    “으음, 너무 다 알려 주는 것도 시시하잖아요. 예를 들면 그런 거죠. 너무 다 알면 상대방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 적 없어요?”

    나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리고 라히트리안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는 걸 보고 말았다.

    사람 머쓱하게 저런 반응이라니. 나는 민망함에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라히트리안이 나한테 관심 가질 리 없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였어요.”

    “…….”

    “알겠어요! 확실히 할게요. 나도 당신한테 관심 가지거나, 얻으려고 한 거 아니에요.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됐죠?”

    하여간 농담도 못 해.

    나는 투덜거리며 걸음을 휙 돌렸다. 어째서인지 등이 무척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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