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이카르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묘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야 하는 법.
이대로 넘어가면 라히트리안 혼자 무슨 오해를 하게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에 숲에서 나가려는 그를 막아섰다.
“아직 할 말 더 남았나?”
“네. 일단, 당신이 오해하는 게 있어요.”
가장 큰 오해가 하나 있었다.
“왜 내가 아트레시아 제국으로 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황녀가 더 잘 알겠지.”
“내가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했던 말 때문에요?”
참 신기한 일이다.
라히트리안은 내 감정을 다 느낄 수 있으면서 왜 이 말은 거짓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경황이 없던 게 아니고서야…….
‘그때 라히트리안이 여유를 잃을 정도의 상황이었던가?’
당시 상황을 떠올려 보면, 이안과 셋이 아침 식사를 하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뭐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원인으로 추정되는 요소가 없었다.
“내가 그때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자꾸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랑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니까 대충 둘러댄 거였어요.”
“그럼 사실이 아니었다는 건가?”
“네. 얼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남자를 내가 왜 따라가겠어요?”
남자 주인공 중 한 명인만큼 외모가 무척 잘생기기는 했었지. 환상적일 정도로.
하지만 외모에 혹하기에는 내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라히트리안은 계속 말하라는 듯 침묵했다.
나는 하나씩 그가 오해하고 있는 것을 풀어내기로 했다.
“제가 가려던 곳은 튜니아트 신성 제국이었어요. ……단도도 뺏긴 마당에 더 감춰 봤자 소용없으니 말해 주는 거예요.”
“……튜니아트로 가겠다는 건 무슨 자신감으로 결정한 거지?”
“에테르온에게 빼앗긴 신성력을 되찾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렘무트를 소환했던 거예요. 어쨌든 둘 중 하나는 끝을 봐야 하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무모한 방법이기는 했다. 내가 저지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게 최선이었다.
‘이러니까 좀 억울하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웠던 이유가 전부 라히트리안 때문이잖아.’
내 설명을 들은 라히트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그런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
“알아요. 저 정말 죽을 뻔했던 거.”
“…….”
“미안해요. 좀 더 잘 간수해야 하는데.”
순간 그의 자안 위로 황당함이 스쳤다.
“지금, 그게 문제인가?”
“그럼요?”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라히트리안과 나 사이에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지?
“아. 당신 목숨 위험하게 한 것도 진심으로 미안해요.”
“…….”
라히트리안의 입꼬리가 점점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이건 그가 기분이 저조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어, 왜 그럴까. 오해는 정말 다 풀린 것 같은데.
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생긋 웃었다.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지는 않겠지. 나름 내 얼굴도 봐줄 만하게 생겼으니까…….
“그럼 우리 하던 이야기 마저 할까요? 제가 물어본 거 대답해 주시면…….”
라히트리안이 비딱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주치의가 안정을 취하라 했으니까. 이런 머리 아픈 대화를 계속하는 건 안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거야, 그렇지?”
* * *
내 끈질긴 시위 끝에 질문을 할 수 있는 건 바깥에 나갈 때만 허용됐다.
그러니까 오늘 숲에서 산책했던 것처럼 그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라히트리안이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심장에 무리가 간 건가?”
그렇지 않고서 라히트리안이 나랑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내걸 리가 없는데.
이전엔 아무리 짧은 시간이더라도 내가 따라다닐 때마다 귀찮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풍기던 남자였다.
게다가 방은 왜 아직도 여길 사용해야 하는 건데?
나는 북쪽 성에서는 본 적 없는 새하얀 대리석 벽을 노려보았다.
라히트리안의 침실에서는 절대 지낼 수 없다고 시위하자 그는 내게 가까운 다른 방을 내어 주었다.
“감시하려는 건가? 사고 치지 말라고?”
하긴 거하게 사고를 치긴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잠재적 사고 유발자로 점찍어 놓고 감시하려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확 됐다. 나라도 내 집 마당에서 대형 사고 치고 돌아다니면 잡아 둬서 지켜보려고 할 것 같으니까.
“그래도 이건 좀 과한 것 같은데.”
감시만이 목적이라기에는 애매한 것들도 많고.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생각하기를 관뒀다. 궁금하면 내일 몰래 나가서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하루 내내 나를 감시할 수는 없겠지.
‘아니카랑 아르고의 안위 먼저 알아봐야겠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태평한 생각인지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날이 밝고, 외출하려 문을 열자 그 앞에 이안이 생글거리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복도 창가에 기대 있는 라히트리안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나는 당황스럽게 물었다.
“……라히트리안 여기에서 뭐 해요? 일하러 안 가요?”
“가려던 중이야. 황녀랑 같이.”
* * *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 얼마 전부터 불경한 소문이 암암리에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지만, 튜니아트 황실의 공식적인 입장이 없자 반신반의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소문 들었어요? 황실에 망조가 들었다더군요.”
“쉿.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황족 모독죄로 삼족이 멸하면 어떡하려고?”
“……하지만 너무 내용이 자세하잖아요. 들어맞는 것도 많고요. 지방에서 들리는 말로는 국경 근처에는 마물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이 사람이!”
그러나 수도에 살고 있는 제국민은 모두 한 번쯤 들은 소문이었다.
국경에 마물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에테르온 반 튜니아트 황태자가 신성력을 잃었다.
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두려운 소문인가.
수도 골목길에 모습을 숨기고 사람들이 하는 대화를 엿듣고 있던 벨리언이 피식 웃었다.
“예상보다 훨씬 잘 퍼지고 있군요. 역시 돈이 좋기는 한가 봐요.”
그의 노을빛 눈동자가 어둠 속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로이드가 있었다.
“윈저가가 개입하니 순식간이군요. 같은 공작가라도 다르기는 한가 봅니다.”
로이드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듯 인상을 썼다.
차가운 그의 태도에 벨리언이 서운하다는 듯 과장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너무하시는군요. 저희 한 배를 타기로 한 거 아닙니까?”
“일이 끝나면 그것도 끝이지.”
“모시는 분이 같을 텐데 끝이라니요. 이렇게 뜻을 모은 것도 다 여신의 안배 아니겠습니까.”
벨리언이 어깨를 으쓱하며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인인 황태자 에테르온을 배신할 생각을 하는 자가, 두 번이라고 못 할 리 없다.
그런 자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게 로이드는 영 꺼림칙했다.
“그럼 다음 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에테르온 님을 뵈러 가야 해서.”
“그자는 어디로 사라졌지?”
“모릅니다. 갑자기 어둠에 휩싸이더니 사라져 버리더군요. 그자가 있어 편한 부분도 있었는데 아쉽게 됐지 뭡니까.”
로이드의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 그러자 벨리언이 터진 입술을 만지더니 픽 웃었다.
에테르온이 발작을 하며 폭력을 행사해 얻어맞은 흉터였다.
“적당히 봐주는 것도 힘들더군요. 맞는 건 익숙하지가 않아서.”
카드리아 공작가는 어릴 적부터 타인을 은밀히 암살하는 방법을 익히고 다루는 곳이었다.
가장 실력 좋은 후계자를 거르고 걸러 결국 마지막 한 명만 살아남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벨리언이었다.
“제 손으로 가문을 멸문시켜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좀 서둘러 주십시오.”
무심결에 손이 나갈 뻔한 게 몇 번인지 몰랐다.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로이드의 모습에, 벨리언은 흥이 식었다는 듯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로이드도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파 사이로, 로이드도 어느덧 모습을 감추었다.
* * *
튜니아트 제국의 황제 알현실.
황좌에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앉아 있던 카로스가 픽 웃었다.
“아틀레아, 꼴이 그게 뭐지?”
독기가 가득 서린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던 카로스가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무척 평온해 보이는 그 표정에 아틀레아는 이를 악 물었다.
리즈벳의 소식을 아트레시아 제국에게 전해 들은 후에도, 카로스는 어떤 태도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에테르온을 살려 주실 마음은 있으십니까?”
“짐이 어떻게 황태자를 살릴 수 있겠나. 그대도 알겠지만, 짐이 신은 아니야.”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보여 주셔야 함이 아닌지요.”
아버지. 그 말에 카로스가 알현실이 가득 울리도록 크게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배를 잡고 웃던 카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하나씩 밟고 내려갔다.
“아버지? 그럼 리즈벳은 내 딸이 아니던가? 어디에서 황녀를 낳아 온 거지, 아틀레아?”
“……폐하!!”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모욕감에 아틀레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카로스는 그런 아틀레아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아버지니까 내놓으라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어. 리즈벳이 돌아오면 그대가 무슨 짓을 할지 뻔하니까.”
“그럼 에테르온은 저리 고통스러워하는데 내버려 둬도 괜찮다는 것이옵니까?”
“그건 안 되지.”
카로스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짐이 직접 이카르센 제도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그대가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말이야. 그럼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