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61)

아르고는 아트레시아 제국에 귀환하기 전에 금단술을 제공하겠다는 말을 정말로 실현시켰다.

“여기 있습니다.”

그가 내게 건넨 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단검이었다.

“술식을 단검에 새겨 놨으니 신성력을 빼앗고 싶은 상대에게 찔러 넣으면 됩니다.”

“그럼 끝인 건가요?”

“모든 기운은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황태자가 발작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아르고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건 튜니아트 황성에서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있는 건데.

내가 알려 준 단서 몇 가지로 그런 것까지 추측했다는 건가?

아르고는 그럴 줄 알았다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황태자가 갖고 있는 신성력이 황녀님에게 돌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금단술이 신성력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 역할을 하는 거고요.”

그러고 보면 아주 어릴 적에 에테르온의 팔목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 본 기억이 있다.

주로 내 궁에 찾아와 난리를 피울 때,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소매를 걷어 붙이며 물건을 던져 댔었다.

몸에 금단술을 새겨 넣은 거였구나.

“황녀님은 본래 신성의 주인이시니 단검 형태로 충분할 겁니다. 하나밖에 없으니 잃어버리지 마세요.”

“네, 잘 간직할게요. 고마워요, 아르고.”

나는 단검을 어디에 둘까 고민하다가 품에 지니고 다니기로 결정했다.

아르고는 감사 인사를 받는 게 어색했는지 슬쩍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귓바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카도 저러던데…….

“두 사람 진짜 닮았네요.”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니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처음으로 본 그녀의 노골적인 불쾌함에 나는 입을 합 다물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만. 뭐라고 하셨나요.”

“칭찬이었어요.”

“살면서 그런 기분 나쁜 칭찬은 처음 들어 봅니다.”

서로 우애가 깊은 거 아니었어?

당황스럽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아르고가 내 방에 온 이후로 서로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까 두 사람 왜 인사 안 해요?”

아트레시아 제국에 있는 동생에게 연락을 해서, 부탁을 받은 동생이 이카르센 제도로 올 정도면 무척 친한 사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바람이 쌩쌩 불어?

의도적으로 아니카를 무시하고 있던 아르고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치 귀찮은 상대를 치워내는 듯한 제스처였다.

응. 싸웠구나.

안심한 나는 생긋 웃으며 방 밖으로 아니카와 아르고를 쭉 밀어냈다.

나란히 복도에 나가게 된 두 사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돌아봤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르고가 인상을 찡그렸다.

“둘 다 나가요. 나는 남매 싸움에 끼고 싶지 않으니까.”

* * *

두 사람을 쫓아내고 나는 이카르센 성의 동쪽 도서관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법과 관련한 금서까지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장소였다.

지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그게 이카르센 마도 제도의 입장이었으며 다들 이카르센을 탐내는 이유이기도 했다.

인류가 말살해 버린 정보도 이곳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으니까.

튜니아트 황실도 그에 못지않았으나, 이카르센은 제도는 서적을 취급하는 영역도 가리지 않았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몇 가지 해결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력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는 방해되는 것들부터 제거해야 했다.

우선,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카르센 제도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렘무트의 존재.

나는 책장 사이를 거닐며 서적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마족 소환의 유경험자인 아니카에게 물어볼까 했지만,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리게 될 것 같아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설마 생생한 피를 욕조 한가득 준비해야 한다거나, 몇백 구의 시체가 필요하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절로 속이 울렁거렸다. 만약 마족을 소환하는 데에 그런 게 필요한 거라면 끔찍했다.

‘그래도 렘무트는 퇴장해 줘야지.’

만약 라히트리안이 나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번 일로 나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지만.

“후우, 조금 무섭기는 하네.”

사실 렘무트를 불러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소란을 피워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의 눈에 드는 것도 목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라히트리안이 나를 이카르센 제도에 마음껏 묶어 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세이어드의 입장에서도 라히트리안이 버티고 있어 쉽게 나를 넘보지 못할 테니 싫어도 튜니아트 제국에 연락할 수밖에 없겠지.

아이러니하게도, 라히트리안과 세이어드 두 사람에게서 나를 무사히 지킬 방법으로 튜니아트 제국이 필요했다.

각자가 서로를 견제하게 될 테니까.

“……근데 뭔 관련 책이 이렇게 많아?”

마족 소환과 관련된 책이 무려 책장 세 개나 차지하고 있었다.

영혼을 팔아넘긴 사람이 생각보다 꽤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중 가장 두꺼운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두꺼운 만큼 목차도 다양하고 담긴 정보가 많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마족을 소환하는 의식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생각보다 어렵다.

첫째로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어야 하며, 둘째로는 그들을 불러낼 강력한 마력이 준비되어야 하고, 셋째로는 그들의 허락이 필요하다.]

“조건은 그렇게 안 까다롭네?”

다만 첫 번째가 문제였다. 렘무트가 내게 알려 준 이름이 진명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의문은 바로 다음 장에서 해소됐다.

[마족의 진명은 특별하기에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또, 유일하게 꾸며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위의 조건들을 충족한다면 마족을 소환하는 건 무엇보다 쉽다고 하겠다.

다만, 첫 번째 조건에서 대부분 막히기에 소환을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태생이 마족인데 이름을 속일 수 없다니.

내용이 틀리지 않았다면 렘무트라는 이름은 진명이라는 뜻이었다.

“이름을 나한테 왜 알려 줬지?”

내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라히트리안의 심장을 삼킨 내가 본인의 이름을 언제든지 무심결에라도 부르길 바라서?

이유는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내게는 현재 렘무트를 불러낼 충분한 마력도 있고, 꼭 소환 당사자의 마력이 아니어도 된다는 건 알고 있었을 테니까.

“좋아.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돌아가는 날에 한번 시도해 봐야겠어.”

나는 누가 보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도서관을 나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정말로 완전 범죄를 꿈꾸었는데.

“어딜 그리 급히 가, 황녀?”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께서 동쪽 도서관에는 무슨 볼일이십니까? 일반 서적은 취급하지 않는 곳인데요.”

“……그러는 이안이랑 라히트리안은 여기 무슨 일로 왔어요?”

“내가 내 집 돌아다니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렇게 답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내가 나온 방향을 힐끔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다니지 않고 방에만 있겠다던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지 설명해 보실까.”

“……갑자기 지식에 대한 욕구가 올라와서요?”

“아. 지식. 그렇다 치지.”

조금 울컥했지만 렘무트를 불러내려고 했다는 걸 들키면 안 되었기에 입술을 비죽이는 걸로 대신했다.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새면 안 되니 방으로 데려다주지.”

“이거 놔요! 뭐 하는 거예요.”

재빨리 뒤로 물러났으나 라히트리안은 뒷덜미를 덥석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소매 안에 넣어둔 단검이 흘러내릴까 바짝 긴장했다.

안쪽 천에 끈이 매어져 있기는 했지만 입고 있는 옷이 얇아 혹시라도 모양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 얌전히 따라가자 라히트리안이 의외라는 듯 나를 내려다봤다.

“반항하는 것 치고는 얌전하게 구는군.”

“제가 언제 반항했다고 그래요. 그냥 혼자 갈 수 있어요. 놔주세요.”

“싫어.”

‘이 음침한 토끼가!’

“이 음침한 토끼가!”

순간 왼편에서 ‘헉!’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팟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사색이 되어 귀를 툭툭 치고 있었다. 싸늘한 기운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왔다.

“지금, 뭐라고, 그랬지?”

나는 헙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으로만 그친다는 게 입 밖으로도 외친 모양이다.

어떻게 상황을 넘어갈 방법이 없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같은 방향을 보며 걷고 있던 나를 빙글 돌린 라히트리안이 눈을 마주쳐 왔다.

“지금까지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나 보지?”

“…….”

“토끼.”

“…….”

“그것도 음침한.”

그가 재밌다는 듯 씨익 웃으며 내 뒷덜미 부근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올렸다.

고작 손가락으로 성인 체형을 들어 올릴 수 있을 리 만무하니 마법을 사용한 것 같다.

붕 뜬 발끝이 애처롭게 대롱대롱 흔들렸다. 나는 울상을 짓고 라히트리안을 올려다봤다.

“왤까.”

“……하, 하하.”

“기분이 더럽군.”

라히트리안은 나를 내려 주지 않은 상태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와 달라는 뜻으로 이안에게 눈빛을 쏘아대며 열심히 신호를 보냈지만, 그도 ‘토끼’가 충격적이었는지 필사적으로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때 라히트리안이 내 고개를 가볍게 잡아 돌렸다.

“황녀.”

“네?”

나는 이안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재빨리 라히트리안에게로 옮겼다.

아무 시도도 하지 않았다며 방긋방긋 웃자 라히트리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곧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한눈팔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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