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61)

* * *

이안에게 간단히 이카르센 성을 안내받은 후, 응접실에 먼저 도착한 세이어드가 혀를 찼다.

“괜히 시간 낭비만 했군.”

“네?”

“적당한 핑계를 대고 돌아가는 게 좋겠어.”

제어구가 없는 걸 확인했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리즈벳 황녀의 행방을 찾는 게 더 이득이었다.

“황녀는?”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만, 딱히 소득은 없습니다.”

“여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아직 튜니아트 제국에서 찾지 못한 걸 보면 누군가 그녀를 숨겨 주고 있다는 뜻인데. 대체 누가 그런 간 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게요. 아르고도 추적하지 못할 정도면 실력이 상당한가 봅니다. 정체가 뭘까요? 돈을 노리고 벌인 거라면 진작 튜니아트와 접선을 했을 텐데요.”

유스티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순간 세이어드의 적안이 크게 뜨였다.

“그래, 아르고도 추적하지 못할 정도의 실력자지.”

그게 가능한 자가 대륙에 얼마나 존재할까.

세이어드의 고개가 응접실 문으로 향했다. 동시에 문이 열리고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 들어왔다.

존재감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세이어드는 기세에 밀리지 않고 생긋 웃으며 간단하게 눈인사를 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안내가 무척 친절하더군요. 덕분에 눈이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뜸을 들이던 세이어드가 날카롭게 말했다.

“성이 지나치게 조용하던데.”

“이카르센에는 유능한 자가 많지. 그들을 원하는 사람도 많고.”

“그렇습니까?”

“필요 없는 염려를 하게 만들었나 보군.”

세이어드가 하- 하고 입꼬리를 당겼다.

섬뜩할 만큼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성이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는데 보란 듯이 그에게 성을 안내하라 지시하다니.

라히트리안은 여유롭게 준비된 차를 마시며 말했다.

“제안은 거절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냥 구경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저는 기대를 갖고 방문한 거였습니다만. 겸사겸사 이카르센에 와 보고 싶었기도 하고요.”

유스티아가 무슨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까지 시간 낭비를 했다며 돌아갈 핑계거리를 운운한 사람이 바로 세이어드였다. 그런데 저 입에서 ‘겸사겸사’라는 한가한 말이 나오다니.

라히트리안이 우습다는 듯이 픽 웃었다.

“내가 알기로 그리 한가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렇지요. 아시다시피 황태자에 책봉된 다음이 중요하니까요.”

“그럼 이곳에 있을 여유는 더더욱 없겠군.”

“아니요, 사정상 며칠 머물다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뻔뻔스럽게 며칠 머물다 가겠다는 말에 라히트리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대화를 지켜보던 유스티아가 당혹감에 작게 속닥였다.

“세이어드 님, 뭐 하세요?”

그러나 세이어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근 아르고의 몸 상태가 심히 걱정되어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포털을 여는 데만 평소보다 배는 걸렸으니까요.”

“적당히 부려먹으면 될 일 아닌가?”

“소진된 마력을 회복하려면 역시 이카르센 제도에 머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대꾸에 라히트리안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이카르센에 남아 볼 일이 있다는 거군?”

“또 마탑주와 제 관심사가 겹치는 듯하여.”

세이어드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리즈벳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미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라히트리안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

“관심사라.”

숨 막힐 정도로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에 두 사람 사이에 낀 유스티아가 어쩔 줄 몰라하며 죽을상을 했다.

잠시 후, 라히트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대와 관심사가 겹치면 어떻게 할 거지, 세이어드 아트레시아?”

“그것 참 곤란하군요. 이쪽도 황위가 걸린 문제인지라.”

“유감이군. 더 나눌 말은 없을 것 같으니 날이 밝는 대로 내 성에서 나가.”

라히트리안이 그 말을 끝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무거운 분위기가 환기되자 유스티아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곧 소심하게나마 원망을 담아 세이어드를 노려봤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마탑주를 자극해서 뭐가 좋다고요?”

“앞으로 아르고에게 어떤 정보도 넘기지 말도록 해. 특히 황녀에 관한 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예상외로 큰 복병이 버티고 있었어.”

황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건 이카르센에서 직접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대외적인 활동을 일절 하지 않던 이카르센 제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이어드의 적안이 매섭게 번뜩였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리즈벳 황녀는 그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패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 * *

라히트리안이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자 이안이 의아하게 물었다.

“벌써 끝나신 겁니까?”

“이안.”

“네.”

“전원 귀환 명령을 내려.”

툭. 데구르르.

이안이 펜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펜을 급히 주운 그가 귀를 툭툭 치며 물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아직도 못 알아 들었나?”

“아, 아닙니다. 제대로 들었습니다.”

다만 라히트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파장이 커서 그랬다.

특히 이런 일은 전례가 없었다. 대륙 전체의 정세가 얼어붙을 명령이었다.

이카르센 제도에서 타국에 마법사를 파견하는 건 그들을 적대할 일이 없다는 일종의 증거이자 약속이었다.

“설마 전쟁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아트레시아 황자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차라리 아르고만 귀환시키는 게…….”

“특정해서 좋을 게 있나.”

쓸데없는 친절로 주변국을 배려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 아트레시아를 따르는 곳이 많은 시국에 오히려 문제 삼을 빌미만 만들어 주는 꼴이었다.

“본인만 알고 있으면 돼.”

그러나 아트레시아 제국은 바로 이유를 알아차릴 것이다. 2황자가 이카르센 제도를 방문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이건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온전하게 아트레시아 제국과 황위를 물려받고 싶다면 더는 설치지 말고 얌전히 바짝 엎드리라는 경고.

“당장 연락 돌리겠습니다.”

“하나 더. 아르고가 뭘 하고 다니는지 알아봐.”

“네?”

“아트레시아 황자가 헛소리를 하더군. 아르고가 마력이 소진된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이야.”

리즈벳의 흔적을 지우는 일을 아르고에게 주로 일임한 건, 마력이 소진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흑마법은 마족과 계약을 맺음으로 인해 사용 가능했다. 때문에 아르고는 순수한 마력이 아닌 계약한 상대의 마력을 빌려 마법을 부렸다.

그 사실을 세이어드라고 모르지 않을 것이다. 노골적인 핑계에 불과했다.

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녀님이 이카르센에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거군요.”

“그래. 그 녀석이 돌아올 이유가 뭐가 있겠어.”

“아니카 말고는 없지요.”

하나뿐인 혈육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게 아르고였다.

“잠시 잊고 있었군.”

라히트리안의 자안이 가라앉았다. 석상이 움직였던 날 리즈벳이 아니카의 연구실에 갔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흑마법이 필요한 부탁을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안 다음으로 이카르센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그녀가 아르고를 부를 이유가 없었다.

* * *

“아, 기운 빠져.”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웠다.

같은 남매인데 어쩜 그렇게 성향이 다를 수 있지?

아르고가 적극적으로 금단술을 완성시키는 데 협조하겠다고 약속한 후, 아니카는 무척 들떠 보였다.

그렇게 좋은가. 내가 볼 때 아르고는 절대 흑마법을 포기할 것 같지 않은데.

“아니카,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가요?”

“아르고가 흑마법을 익히게 된 이유가 뭐예요?”

굳이 흑마법을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내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아니카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네?”

마법사가 마력이 없다니 그것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어디 있어?

“아르고가 흑마법에 손을 댄 저와 함께 이카르센 제도에 들어오기 위해서였습니다.”

“아……. 설마.”

내 짐작이 맞는다며 아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듯 초점이 흐려졌다.

“제가 어릴 땐 마력에 대한 편견이 더 심해 어디를 가든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저를 받아 줄 곳은 이카르센 제도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마족과 계약을 한 거구나. 흑마법을 익히면 마력을 빌려 사용할 수 있으니까.

이카르센 제도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아니카는 회상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침묵하다가 눈을 감았다.

“지금은 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졌으니…… 아르고도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황녀님께는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아르고도 이번에 결심이 선 거겠죠.”

아니, 그거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아니카가 혈육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고는 신성력을 얻게 된다면 다른 쪽으로 사용하고 싶어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마족 소환은 어떻게 한 거예요? 마력도 없는데.”

“조건만 충족된다면 소환에 사용하는 마력은 꼭 본인의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 말투는 이미 한번 해 본 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은데.

아니카가 순순히 아르고에게 마력을 내어 줬을 것 같지는 않고. 그럼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구나.

저 남매도 사연이 참 복잡하다.

나는 더 물어보는 건 실례일 것 같아 이쯤 하기로 했다.

‘꼭 본인의 마력일 필요는 없단 말이지.’

아무래도 마족 소환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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