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61)
  • * * *

    “제법 구색은 갖추고 있군.”

    아니, 사실 이카르센 성은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갖고 있었다.

    성문에 손을 대는 순간 그대로 목숨을 잃게 되겠지만.

    이카르센 제도로 도착한 세이어드는 경이로울 정도로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성을 올려다봤다.

    이카르센 제도에 처음 와 본 세이어드의 적안이 흥미로움으로 빛났다.

    이곳에 온 이후 줄곧 뺨을 스치는 마력이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중독되어 실신했을 정도로 마력이 거대하게 응집되어 있었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력이 샘솟는 땅.

    가질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곳이었다.

    아트레시아 제국에서도 아카데미에서 마법사를 양성하고는 있었지만 이카르센의 마법사들만큼 실력이 좋지는 않았다.

    유스티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강대한 마력을 견디기 어려운지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도 상당한 내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하루 종일 성질이 다른 기운에 노출되면 금방 탈진할지도 몰랐다.

    “이런 곳에 자리를 잡은 게 대단하네요.”

    “그게 이카르센 제도의 마법사들이 무서운 이유지.”

    한 명 한 명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천 년이 넘도록 침략당하지 않고 건재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카르센은 파견하는 마법사들을 통해 각국의 은밀한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카르센을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세이어드의 표정이 좋지 않자 유스티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그러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이카르센을 싫어하십니까?”

    “자기들끼리 대립해도 상관하지 않는 족속들이니까. 신뢰할 수가 없지.”

    “그래도 안면이 있으면 적당히 해결하지 않겠어요?”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 중 마법사가 개입하지 않았던 일이 있던가?”

    잠시 고민하던 유스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없네요.”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마법사를 먼저 제거하는 게 첫 번째였다. 숱한 전쟁을 치르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더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이카르센의 마법사들은 서로를 겨냥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인정머리가 없기는……. 아, 실례.”

    유스티아가 공감하며 말을 하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백발의 남자가 건조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아트레시아 제국의 황실 마법사. 아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에 유스티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속닥였다.

    “세이어드 님, 지금 나눈 대화까지 마탑주한테 전부 고하면 어떡합니까.”

    “이런 쓰잘머리 없는 이야기까지 보고하는 건 유스티아 너뿐이야.”

    “……너무하세요.”

    세이어드의 독설에 유스티아는 의기소침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르고가 손을 하늘 높이 뻗으려 할 때였다. 그가 멈칫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본 세이어드가 표정을 지우고 성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에서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마탑주가 직접 나왔군.”

    이게 과연 긍정적인 신호인가, 부정적인 신호인가.

    거대한 성문이 열리자 그 중심에 흑발의 남성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이카르센의 2인자까지 함께였다.

    짙은 자안이 세이어드를 보고 있었다.

    세이어드가 생긋 웃으며 먼저 예의를 갖췄다.

    “이렇게 격한 환영을 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라히트리안 이카르센.”

    “이쪽도 아트레시아의 황자가 직접 올 줄은 몰랐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이어드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적안이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라히트리안의 귓가로 향했다.

    ‘제어구가 없군.’

    그가 하고 다닌다고 알려진 붉은색 귀걸이가 없었다.

    세이어드가 미간을 좁혔다. 제안을 거절한 건 정말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니.

    그때 라히트리안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는 굉장히 불량한 자세로 정확히 세이어드의 눈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윽고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아트레시아의 방문을 환영하지.”

    진심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음성이었다. 두 사람에게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휙 몸을 돌린 라히트리안이 지시했다.

    “이안, 손님 대접을 극진히 하도록 해. 돌아가는 날까지 불편함이 없도록 말이지.”

    그의 말이 한 문장, 한 글자씩 끊어지며 들렸다.

    * * *

    “으음, 언제쯤 가도 되는 거지?”

    잠시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나는 발장난으로 잔디 위를 가볍게 두드리다가 일어났다.

    “대충 이십 분쯤 지난 거 같으니까 가도 되겠지.”

    지금 세이어드가 나와 같은 성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무탈하게 끝났으면 좋겠는데.’

    마치 폭풍전야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꺼림칙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세이어드가 방문한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거절당한 문제를 재고해 달라 찾아온 건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답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 시도할 것이었다. 특히 황태자 책봉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더 마음이 급하겠지.

    “뭐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거야.”

    나는 익숙하게 동쪽 성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코앞에 검은 로브와 백색의 땋은 머리를 한 인영이 인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올리자, 칙칙한 검은색 로브 안에 화려한 장신구가 달린 제복을 입은 처음 보는 남자가 무표정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유심히 남자를 살피는데 그가 입고 있는 붉은 제복 옷깃 위로 낯선 문양이 보였다.

    왼편은 태양을, 오른편은 달을 상징하는 원을 중심에 두고 양쪽에서 검이 사선으로 교차하는 문양이.

    ‘저 문양이 왜 새겨져 있어?!’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충격에 빠졌다.

    마찬가지로 남자도 나를 살피고 있었는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차이나는 그가 허리를 숙이더니 내 귓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건 라히트리안 님의 귀걸이가 아닙니까?”

    이걸 왜 네가 하고 있어? 하는 눈빛.

    그제야 나는 이 남자가 이카르센 제도의 마법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했다.

    “그러니까 아니카 부탁을 받고 온 거란 말이죠?”

    “네.”

    “아니카랑은 남매고요.”

    “네.”

    “좋아요. 이제 믿음이 가네요, 아르고.”

    진작 아니카의 동생이라고 소개했으면 됐을 일인데.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아니카와 똑 닮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성별이 달라 골격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아르고는 묵묵히 옆을 따라 걷고 있었다. 시야각으로 곱게 땋은 백발이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제 머리는 왜 자꾸 보십니까.”

    “그냥요. 장발이 유행인가 싶어서.”

    “저도 머리가 긴 건 귀찮습니다. 가끔 쓸 일이 있어서 기르는 것뿐이고요.”

    가끔 어디에 쓰길래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을까. 만져 보고 싶다.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아르고의 머리를 덥석 잡고 있었다.

    “아.”

    “…….”

    “미안해요. 그…….”

    사과하며 얼른 손을 떼려는데 손에 잡힌 머리카락이 거뭇하게 생기를 잃어 가더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바스락.

    허공에서 가루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 나는 그대로 굳었다.

    이것과 비슷한 장면을 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닿자마자 화상을 입고 떨어지던 렘무트에게서 말이다.

    끝이 잘려나간 머리카락 끝을 만져 보던 아르고는 손가락을 급히 뗐다. 피부가 화상으로 물집이 잡혀 있었다.

    “여신의 가호가 실존하는 거였다니.”

    아르고의 입매가 진하게 올라갔다.

    회색빛 눈동자가 짙게 일렁였다. 그는 다시 머리카락 끝에 손을 대보는 행위를 하며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아르고의 무미건조하던 목소리가 한껏 상기됐다.

    “누님께서는 제가 흑마법을 다루는 걸 염려하셔서 평생 계약을 파기하는 방법을 연구하셨습니다. 튜니아의 신성력을 얻게 되면 분명 방법이 생길 거라고 하셨죠.”

    그래서 아니카가 신성력을 구하려고 했던 거였구나. 이제야 이해가 갔다.

    마족과 계약하면 결국 인간의 정신은 붕괴되고 미쳐 버리니까. 아니카는 그걸 걱정하는 거다.

    “하지만 저는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현재의 저에게 만족하니까요.”

    회색빛 눈동자가 무서울 만큼 번뜩였다.

    그 안에 희미한 광기까지 엿보여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인간의 양면성이 이런 건가?

    렘무트에게서 느꼈던 음습하고 섬뜩한 기운이 아르고에게서도 짙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황녀님께 협조하겠습니다. 방법 정도는 알아 두어서 나쁠 게 없으니까요. 아트레시아 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금단술을 제공해 드리지요.”

    나는 지금쯤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아니카를 향해 깊은 애도를 보냈다.

    “그 대가로 제게도 연구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해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아니카, 안타깝게도 당신 동생은 이미 미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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