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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날이 갈수록 촉이 좋아지는 것 같아. 원래 이렇게 눈치가 빨랐던가?
주변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라히트리안은 유난히 나에 대해서만큼은 예민할 정도로 빠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수상해.
그러고 보면 그는 누구보다 내 상태를 제일 빨리 알아차렸다. 그게 어떤 상황에서든!
이건 확실히 추적 마법이랑은 관련이 없는 부분이었다.
‘추적 마법이 아니면 그게 가능한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건데.’
이건 꼭…….
‘내 감정을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지.’
에이, 설마.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하지만 마탑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건 생각도 못한 부작용이군.”
라히트리안이 귀걸이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며 준비한 딸기 케이크를 먹었을 때도…….
“고작 그런 거로 기분이 좋아지는군. 튜니아트 황실 재정이 부실한가?”
내가 악몽을 꾸고 깨어난 다음 성이 날아가 버렸을 때에도……!
“평소에도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인가? 얼마나 자주 꾸지?”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장면들에 나는 충격에 빠졌다.
가장 결정적인 건 내가 석상에 공격당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 구해 주고, 그 후에 나눈 의미심장했던 대화였다.
“라히트리안. 당신 설마……. 당신 어떻게 지금까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오해하지 마. 때가 되면 말하려고 그랬어.”
“나한테 추적 마법 걸어 놨어요?! ……뭘 때가 되면 말하려고 해요?”
“……그러는 황녀야말로 무슨 말을 한 거지? 내가 아무한테나 함부로 추적 마법을 거는 줄 아나?”
그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게 들어맞았다.
오, 맙소사.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일어나자 라히트리안이 미간을 좁혔다.
“황녀, 앉아.”
앉으라니. 지금 태평하게 그런 말을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은 심정이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런데 이 남자가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고 하면 과연 라히트리안이 순순히 자백할까?
‘턱도 없어.’
그건 지난번 튜니아트 서신 건으로 찾아갔을 때 떠본 라히트리안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안에게도 알리지 않은 걸 쉽게 말할 리가 없지.
‘좀 더 궁지에 몰아붙인 다음 물어봐야 해.’
지금도 내 감정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매우 착잡해졌다.
나는 저 멀리 이안이 음식을 가지고 오는 걸 발견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라히트리안 미모가 말이 안 된다고요. 오늘도 열심이네요.”
“…….”
“진짜로요.”
일단은 좀 더 확실한 추궁 방법이 생각날 때까지 묻어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느새 도착한 이안이 하나씩 음식을 내어 주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라히트리안을 외면하며 이안과 대화를 나눴다.
표정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장하시겠군요. 앞으로는 2인분을 준비하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이안.”
“아침 시간이 화기애애하고 좋은데 왜 거절하고 그러십니까.”
이안이 넉살 좋게 대꾸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를 따라 나도 다시 자리에 앉아 고개를 박고 고기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마치 고무를 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 신경이 라히트리안에게로 쏠려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안이 잔에 물을 따라 주며 물었다.
“오늘은 편안하게 주무셨는지요.”
“네. 편하게 잤어요. 이안은요?”
“저야 항상 잘 자고 잘 먹습니다.”
대충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라히트리안이 차갑게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체할 것 같아 급히 물을 마셨다.
“갈증이 심하셨나 봅니다. 더 따라 드릴까요?”
“네, 조금만 더…….”
그때 라히트리안이 끼어들었다.
“황녀.”
“……왜요?”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오늘 도착할 예정이야. 이동 포털이 열렸다더군.”
나는 들고 있던 잔을 놓치고 말았다.
툭. 쨍그랑!
“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분명 라리에트 침공 협조 요청은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나?
“거, 거절했다면서요.”
“그랬지.”
“그런데 왜 그렇게 됐을까요?”
라히트리안이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겠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있어야지.”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거 아니었어?
라히트리안 당신 그런 거 잘하잖아! 왜 이번에는 안 그런 건데?
“왜 그렇게 놀라지?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와 마주치면 안 될 일이라도 있나?”
“그건…….”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는 건 더는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 사실은 곤란해요.”
세이어드와 마주칠거라 생각하니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기회일지도 모르지.
아니카의 연구가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에는 이카르센 제도에서 나가야만 하는데. 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바로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였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의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그렇군.”
“네? 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
“그럼 무슨 말을 더 해?”
“……아니. 더 해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요.”
너무 순순히 그렇다고 하니까 적응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라히트리안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 게 이번이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설마 그것 때문에 저렇게 반응이 평범한 건가?
“먹지.”
“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히트리안의 이해하지 못할 태도는 이후에도 지속됐다.
그는 내게 세이어드와 마주치지 않을 방법을 제시해주기까지 했다.
“그럼 황자와 마주치지 않도록 잘 숨어 있어.”
“……안 그래도 그러려 했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알려지면 라히트리안도 곤란할 테니까요.”
“별로 곤란하지는 않은데.”
그럼 이쪽도 다행이었다.
“그래서…… 언제 돌아간다는데요?”
“금방 돌려보내지. 아트레시아의 황자를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는 것 같으니까.”
“그건…….”
문득 머릿속에 문구 하나가 스쳤다.
[황금을 녹여 내린 듯한 금발에 적안을 지닌 세이어드는 전쟁통 속에서도 시선을 빼앗길 만큼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생사가 달린 전시에도 시선이 갈 정도면 무척 잘생겼다는 거겠지.
게다가 아트레시아 혈족의 신체 조건까지 물려받았으니 전장에서 그는 미친 듯이 돋보였을 거다.
“네. 그분은, ……제가 처음으로 마음을 준 분이기도 하거든요.”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나는 힐끔 라히트리안의 눈치를 봤다.
이렇게 둘러대면 앞으로 세이어드와 관련해서 곤란한 질문은 더 듣지 않을 수 있겠지.
‘제발 이번 한 번만 속아라.’
심장이 콩닥거렸다.
순간 그의 입꼬리가 작위적으로 올라갔다. 누군가 웃는 게 이렇게까지 무서울 일일 줄이야.
“그렇군.”
놀랍게도 라히트리안은 속아 넘어간 것 같았다.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했어.”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라히트리안이 매우 기분이 저조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방에 박혀 있겠다는 거지? 먼발치에서 몰래 숨어 보지 않고. 황녀 특기잖아.”
퍽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단어 선택에 가시가 돋아 있다.
심기가 매우 저조하다는 것쯤은 세 살배기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머쓱하게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왜 화가 났어요?”
“내가 왜 화가 나겠어.”
“났잖아요.”
“안 났다고 했을 텐데.”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라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화나지 않았다니.
이러다가 유치한 말다툼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가 왜 이렇게 예민한 반응을 내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다 큰 성인끼리 이런 건 그만해요.”
내가 먼저 항복하며 끝을 알리자 이안이 동조하며 거들었다.
“네, 정말로 그만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슬슬 자리를 파하는 게 좋겠군요.”
“가지.”
라히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어디를 간다는 거야.
“아트레시아의 황자가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빨리요?!”
“이동 포털을 이용했으니까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아니카를 꼭 데리고 다니십시오.”
이안이 당부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어서 가 보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림이 좀 이상하다.
라히트리안도 마중 가는 건가? 황제같은 동급이 아니면 보통 제일 높은 사람은 직접 움직이지 않던데.
이안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라히트리안도 직접 마중 나가는 거예요?”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아?
차마 뒷말까지 할 용기가 없어 슬쩍 생략하며 묻자 라히트리안이 작위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보는 대로 직접 마중 나가려는 중이야. 같은 성에 있는데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와 만나지 못해 유감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