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내 흔적을 지우라는 명령을 했다니.”
그동안 아니카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라히트리안한테 납치당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요.”
내가 울면서 돌아온 이유도 튜니아트 제국으로 가고 싶다는 부탁을 거절당한 거라고 생각했다니 말 다 한 셈이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아니카. 어디 가서 소문 안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저한테 잘해 줬던 거예요?”
이카르센 제도에 사는 마법사들은 튜니아트 제국에 반발심이 상당했다.
특히 황족이라면 증오심까지 품고 있는 자가 많았는데 이유는 마력을 다루는 자들을 배척했기 때문이다.
여신의 가호를 받은 황실이 배척하니 일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래도 고마워요.”
이유가 어찌됐든 편하게 지낸 건 맞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곤란하게 됐다.
내가 성년이 되는 날 에테르온이 완전한 신성력을 얻지 못하면 다음 황위 자리가 공석이 된다.
그런 상황을 알면서 날 제도에서 보호한다는 건.
‘아무래도 라히트리안은 이번 기회에 튜니아트 제국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거겠지.’
내가 그 수단이 되어 버린 듯하고.
물론 이건 내 어림짐작이니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지우고 싶은 좀전의 일이 떠올라 얼굴을 감쌌다. 심지어 라히트리안 앞에서 볼썽사납게 엉엉 울기까지 하다니.
아니지. 잠시만.
‘어, 조금 이상한데?’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튜니아트 제국을 멸망시키고 싶은 거라면 처음 나를 보자마자 죽이면 되는 일이었다.
라히트리안은 그게 훨씬 편할 테니까.
그런데 굳이 날 살려 둔 이유는 뭘까. 정말 이카르센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보내지 않을 생각인 건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왜?”
“네?”
“아니카, 왜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서 아니카에게 물어봤다.
“라히트리안이 왜 그러는 걸까요?”
“그렇게 물어보시면 어떻게 답해 드려야 합니까?”
나는 아니카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으음, 이건 아니카만 알고 있었으면 하는데요. 지난번에 석상 움직였던 거 기억해요?”
끄덕. 아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비밀을 풀기로 했다.
“그게 오작동이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
역시나 아니카는 금방 속뜻을 알아차리고 놀라 경악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는 것 같았지만, 무언가 떠올랐는지 급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저번에 생명력을 다시 되돌리는 방법을 물어보셨던 게…….”
“나 좀 도와줘요, 아니카.”
여기 계속 있다가는 평생 라히트리안이랑 붙어 있게 생겼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돼.
“아니카한테 신성력이 필요하다는 거 알아요. 저한테 위험한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빌려줄게요.”
“제가 신성력을 원한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난번에 연구실에 갔을 때 흑마법에 대한 서적이 많은 걸 봤어요.”
“…….”
“우리 서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아니카가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황녀님께서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라히트리안 님께서 의심하지 않도록 주의를 끌어 주십시오.”
* * *
이안이 수풀 너머를 바라보았다.
라히트리안은 다시 시작된 숨바꼭질에 한숨을 내쉬며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그래서 두 분 무슨 관계이십니까?”
“관계라니.”
“저한테까지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이안이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며칠 전 리즈벳이 집무실에 찾아와 두 사람이 심각하게 싸우던 것을 들었다.
축객령으로 복도에 있는 바람에 자세히 들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 간에 다툼이 있었다는 것쯤은 알았다.
리즈벳의 감정 섞인 외침이 더는 들리지 않게 되자 이안은 사달이라도 나는 줄 알고 명령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하고도 미묘한 분위기를.
게다가 라히트리안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주춤거리다 집무실에서 도망가 버리던 리즈벳은 누가 봐도…….
“사랑싸움 하고 있는 거 맞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제가 라히트리안 님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디 있습니까.”
지금까지 그의 곁에서 모든 일을 맡아 처리했던 사람이 바로 이안이었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남녀 사이의 비밀이라니. 그게 몇 가지나 되겠는가? 뻔했다.
“두 분 관계에 변화가 생기신 거죠?”
“아니.”
“그럼 황녀님이 귀찮게 따라다니는데도 왜 묵인하십니까.”
라히트리안은 유독 리즈벳에게 무르게 굴었다.
본인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안이 보기에는 그랬다.
이안은 키득거리며 은근슬쩍 자신이 했던 말과 반대되는 말을 던졌다.
“하기야 그렇게 아름답고 태어날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라신 분이 뭐가 아쉬워서 라히트리안 님께 특별한 감정을 가지겠습니까.”
“…….”
“사이도 안 좋고 볼 때마다 으르렁 대기만 하시는데…….”
“쓸데없는 소리.”
라히트리안은 리즈벳이 왜 또 저러는지 알수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는 무슨 속셈인지.
그녀는 목적이 없으면 절대 라히트리안을 찾지 않았다. 그만큼 그와 엮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럼 이유를 알아보면 그만이지.’
라히트리안의 입술이 나직하게 열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기척이 느껴지는 수풀 너머로 향해 있었다.
“그만 나와, 황녀.”
“어떻게 알았어요? 이번에는 진짜 안 보였는데.”
수풀이 움찔거리고 동그란 정수리가 보이더니 리즈벳이 놀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본인은 간발의 차로 들켰다고 여기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라히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린 채 혀를 찼다.
“노력이 가상하기는 한데, 황녀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속이는 건 불가능해.”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영원히 안 돼.”
“영원히라고 붙일 건 또 뭐람.”
리즈벳이 태연하게 맞은편에 앉았다.
라히트리안은 이럴 때면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녀의 곁에 아니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아니카는 어디에 두고 혼자 돌아다니는 거지?”
“잠깐 할 일이 있다고 해서요.”
“…….”
“정말이에요. 일부러 혼자 온 거 아니라고요.”
“갈수록 뻔뻔해지는군.”
리즈벳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런가?’
혼자 읊조리는 작은 입술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랑 다르게…….”
게다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격식을 갖춰 입고 있는 상태였다.
리즈벳이 관심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눈을 가리고 싶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짧은 구경을 끝낸 리즈벳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청 화려하게 차려입었네요? 꼭 누가 오는 것같이.”
라히트리안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벽안이 흔들리고 있었다.
옅은 불쾌감이 그를 잠식해왔다.
한참이 지나서야 리즈벳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혹시 누가 와요?”
불안함을 숨기고 웃는 낯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라히트리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리즈벳이 속내와 다른 표정을 보일 때마다 기분이 저조해졌다.
“황녀가 그런 건 왜 관심을 갖지?”
아니, 아니다.
겉과 속이 달라 그런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리즈벳이 순수한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불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이유로 이런 감정을 품어 본 적 없던 라히트리안은 멈칫했다.
자신은 왜 불쾌한 걸까.
비슷한 목적을 가진 인간은 수없이 만나 봤다. 하지만 라히트리안은 그때마다 이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황녀님도 같이 식사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돼요?”
“제가 준비해 오겠습니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는지 실실 웃으며 구경하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쉬움이 가득 담긴 발이 느릿느릿 옮겨졌다.
“이안, 천천히 다녀와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즈벳의 요구대로 이안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이안의 등을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리즈벳을 보니 라히트리안은 묘한 짜증마저 올라왔다.
이안에게는 저리 솔직하게 대하면서, 왜 본인을 대할 때는 감추는 게 그리도 많은지.
다른 게 무엇이라고.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어.”
라히트리안은 모든 걸 알고 싶었다.
“갑자기 이러는 걸 보면 또 궁금한 게 있는 거겠지.”
어째서 리즈벳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릴 때마다 다시 제게로 돌리고 싶어지는 건지.
“당연히 보고 싶어서 그렇죠.”
가식이라는 걸 알면서 저런 입에 발린 말에 마음이 풀리는 이유도.
“황녀는 나를 만나는 걸 꺼림칙해 하잖아.”
그리고 리즈벳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것을 부정하는 대답을 하는 자신은 또 왜 이렇게 비참한 건지도.
“제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우리 그래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런 거예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던 리즈벳이 물감이 번져 나가듯 해사하게 웃었다.
그 순간 라히트리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리즈벳이 웃는 순간 쿵- 하며 명치 부근이 저 아래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번과 같은 감각.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