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서럽게 우는 리즈벳의 반응에 라히트리안은 현재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 상태였다.
이카르센 제도 땅을 밟은 이후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줄만 알았다.
감정의 폭이 심하게 널뛰긴 했지만 사소한 모든 것에 일일이 반응하기에 원래 성격이려니 했다.
그런데 리즈벳이 이렇게까지 큰 불안감을 속에 담고 있을 줄이야.
한껏 북받치는 감정은 그의 명치를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왼쪽 가슴이 뻐근한 것 같은 감각에 멈칫하던 그는 우선 리즈벳부터 진정시키기로 했다.
그가 이토록 혼란스러운 이유는 아마 그녀가 울고 있기 때문일 테니까.
“그렇게 울다가는 탈진해서 쓰러지겠어, 황녀.”
“흐윽……, 이 정도로는 안 쓰러져요.”
울고 있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말대답은 잘하는군. 그는 속으로 짧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가늘게 내쉬는 숨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어 라히트리안은 그게 꽤나 거슬렸다.
우는 사람은 달래 본 적이 없기에 난처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뺨에 흐르는 물방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판단은 빨랐고, 라히트리안은 무심결에 손을 들어 올렸다.
놀란 벽안이 크게 뜨인 채 그를 올려다봤다.
라히트리안의 손이 리즈벳의 젖은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내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라히트리안은 여기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지?
조급함에 가늘게 주름진 미간이 펴질 줄 몰랐다.
할 말을 고르고 또 고르던 라히트리안이 평생 써 본 적 없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라히트리안은 그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실수했어, 황녀. 앞으로 튜니아트와 관련된 장난은 삼가도록 하지.”
“……정말이에요?”
“그래.”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자 리즈벳은 얼떨떨해 보였지만 눈물이 곧 쏙 들어갔다.
그에 라히트리안은 한결 속이 편안해졌다.
눈가를 조심스럽게 문지르던 손을 내려놓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황녀도 좀 더 편하게 이카르센에서 지내.”
“아직 당신이 궁금해한 거 대답 안 했는데도요?”
“그래.”
“정말 번복 안 할 거죠? 더 추궁 안 해요?”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몇 번이나 의심스럽게 되묻는 게 지금까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인상을 쓰려던 그는 인내심을 갖고 대답했다.
“안 해.”
리즈벳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정말 이대로 넘어가는 게 맞는 건지 아리송한 눈빛이었다.
“어차피 황녀가 알고 있는 건 마룡이 내 심장을 노리고 있다는 정도겠지.”
“……뭐라고요?”
보아하니 마룡이라는 건 몰랐던 모양이다.
“마룡을 잡아 오라고 했지만 튜니아트에서 우리가 소란을 피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빠르게 잡긴 힘들 거야.”
“그거 나한테 왜 알려 주는데요?”
“황녀가 내 말을 믿지 않으니까.”
그러게,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걸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 이실직고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유를 찾으려 가만히 리즈벳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리즈벳이 진정한 건 지금보다는 좀 더 전이었다. 굳이 이런 사실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도 자신이 지금의 상황을 자처한 이유는 아마도…….
격해진 감정은 진정됐지만, 아직 응어리가 다 풀리지 않은 리즈벳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만약 이래도 충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다음 방법으로는…….
‘달달한 걸 먹으면 기분이 풀렸던 것 같기도 한데.’
차라리 그것부터 시도할 걸 그랬나.
라히트리안은 맑은 벽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멈칫했다.
왜 그녀의 기분을 풀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거지.
의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던 리즈벳이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뺨을 긁적였다. 조금 전 그의 손이 닿았던 왼쪽 뺨이었다.
“알았어요, 믿어 볼게요. 대신 저만 이렇게 넘어가면 불공평하니까, 나중에 라히트리안이 숨기고 있는 걸 알게 돼도 한 번 눈감아 줄게요.”
이해하지 못할 스스로의 행동에 의문을 품기도 잠시. 라히트리안은 곧 들려오는 리즈벳의 대답에 상념을 지웠다.
* * *
아직도 뺨이 화끈거렸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가 옆에서 이상하게 쳐다보는 아니카의 시선을 느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얼음찜질을 계속했다.
‘갑자기 왜 다정하게 굴고 그래?’
순간 당황해서 대충 아무 말이나 대답하고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느 정도 가라앉은 눈가를 확인하고 반쯤 녹은 얼음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꽤 오래 찜질을 한 탓에 눈이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손가락도 얼얼하니 조금만 쉬었다가 반대쪽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그런데 옆에서 집요할 정도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카? 저한테 할 말 있어요?”
“아침에 다녀오신다고 한 곳, 라히트리안 님을 만나고 오신 겁니까?”
“……아. 네, 만나고 왔어요.”
아니카의 은회색 눈동자에 걱정이 물들었다.
“라히트리안 님 때문에 우신 겁니까?”
“아하하…… 뭐. 항상 웃을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잘 해결됐어요.”
아마도.
그런데 아니카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왜 저러는 거지?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 심정 다 안다는 분위기의 표정이 매우 거슬렸다.
게다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뭐를요?”
이런 뜬금없는 말까지.
당황스럽게 아니카를 보는데 은회색 눈동자에 결연함이 스쳤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러니까 뭐를?
“아니카, 알아듣게 말을 해 줘요.”
“……라히트리안 님께 납치되어 오신 게 아닙니까?”
“라히트리안이 날 납치했대요?”
“그게 아니면 이카르센 제도에는 왜 오신 겁니까.”
우리는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차마 심장 도둑이라고 소개할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아니카는 왜 내가 라히트리안에게 납치당했다고 알고 있는 걸까? 그 배경이 심히 궁금해졌다.
나는 생글 웃으며 그녀의 손목 부근의 옷깃을 덥석 잡았다. 흠칫, 잡힌 옷을 빼내려 하는 것을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카, 좀 더 자세히 말해 봐요.”
깊은 대화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 * *
“에테르온, 안에 있느…….”
에테르온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여신의 궁에 들른 아틀레아는 그의 침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끔찍한 장면에 흠칫하며 숨을 들이켰다.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에 눈을 뒤집고 처참하게 쓰러진 시녀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오셨습니까.”
차를 마시고 있던 에테르온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끔찍한 광경을 앞에 두고도 비위가 상하지 않는지 에테르온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차가 좋다며 아틀레아에게 권유했다.
“이리 와서 좀 드셔 보시겠습니까?”
그 모습에 아틀레아는 덜컥 겁이 났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에테르온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졌기 때문이다.
태생이 황족이니 간혹 예민하게 굴기는 했으나 적어도 타인의 생명을 이리 경시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저 사특한 자가 에테르온과 함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에테르온.”
아틀레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제 고통을 시녀가 대신 감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저리 흉한 몰골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틀레아의 시선이 적발의 남성에게로 향했다. 어느 날 에테르온에게 접근한 정체 모를 남자.
그리고 현재 에테르온이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자.
“어머니, 너그러이 봐주세요. 절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도 너무 가까이 하지는 말거라. 신원이 불명확한 자가 아니더냐.”
“아직도 그런 의심을 하시다니요.”
에테르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그녀의 손에 들린 보랏빛 서신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이카르센 제도에서 답신이 온 겁니까?”
“그래, 리즈벳이 제도에 없다더구나.”
“이미 예상했던 답입니다.”
“에테르온, 이제 그만하거라! 저자의 말이 틀렸다. 애초에 리즈벳을 황성에서 탈출시키려던 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이냐?”
결국 아틀레아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순식간에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미소 짓던 표정을 지운 에테르온이 차갑게 아틀레아를 불렀다.
“어머니.”
“…….”
“이분께 무례를 범하지 말아 주시지요.”
“하?”
충격을 받은 아틀레아가 숨을 들이켰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적발의 남자가 픽 웃었다.
분노가 치솟아 올랐으나, 아틀레아는 손톱이 파고들 만큼 주먹을 쥐는 것으로 분을 가라앉혔다.
리즈벳이 없는 상황에서, 에테르온의 발작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틀레아는 돌아가기 위해 휙 몸을 돌렸다.
“카드리아 경.”
“네, 황후마마.”
벨리언은 속으로 조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임무가 에테르온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늘 명심하십시오.”
“물론입니다. 카드리아 공작가는 언제까지나 황태자 전하만을 주인으로 섬길 것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벨리언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저런 인간을 황위에 올려 제국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니.
그가 보기에 현재 튜니아트 황실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카드리아 공작 가문까지 무너지게 생겼군.’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철저하게 방관만 하고 있었다. 벨리언이 보기에 에테르온은 내쳐진 지 오래였다.
‘황제는 황태자가 완전히 망가지기를 바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 했다.
황실에 충성을 바치는 것은 실질적인 이득이 주어질 때나 가능한 것이다. 에테르온이 쓸모없어지면 더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새로운 주인에게 주면 되는 거니까.
“카드리아 경.”
“네, 황태자 전하.”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오세요.”
“네, 그리 하겠습니다.”
벨리언이 고개를 숙이고 아틀레아를 보며 생긋 웃었다.
“모시겠습니다, 황후마마.”
마침 이곳을 나가고 싶었던 벨리언은 냉큼 아틀레아를 호위했다.
황후궁에 도착할 때까지 아틀레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벨리언은 차라리 그게 편했다. 두 모자 사이에 끼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여신의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저 멀리 로이드 윈저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윈저 경. 또 황후마마를 뵈러 가는 길입니까?”
“그렇습니다. 안에 황후마마가 계시는지요.”
벨리언이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 전부터 로이드 윈저는 꾸준하게 아틀레아에게 만남을 요청하고 있다고 들었다.
“오늘도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군요. 하지만…… 꼭 황후 마마를 뵈어야 일이 풀리는 건 아니잖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경께서 궁금하신 것을 제가 알려 드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국경 지대에 가셨다고 들었는데, 보신 거지요?”
마물을.
생략된 뒷말을 알아들은 로이드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벨리언은 재미없는 반응에 혀를 찼다.
하여간, 윈저 공작가는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같은 배를 탈 수 있지 않겠는가?
“경께서 궁금하신 것들을 모두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께서는 제게 무엇을 약조해 주실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