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61)
  • * * *

    “황녀님을 왜 그렇게 급히 보내고 그러세요. 한참 재미있었는데요.”

    “…….”

    “정말로 추적 마법을 거신 겁니까?”

    이안이 능글맞게 웃으며 손가락을 맞닿게 한 상태로 꼼지락거렸다.

    라히트리안은 이마를 짚었다. 리즈벳의 말 한마디에 그는 순식간에 추적 마법이나 거는 파렴치한이 되고 말았다.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럼 황녀님이 위협을 받는 줄 어떻게 알고 바로 가신 겁니까. 저한테는 솔직하게 털어놓으셔도 되는데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리가.

    라히트리안은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재 가장 곤혹감을 느끼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네?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이안이 눈을 반짝거리며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철저한 무시였다.

    라히트리안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말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나한테 추적 마법 걸어 놨어요?!”

    리즈벳의 입장에서 불순한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안의 말만 들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해를 풀고자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추적 마법으로 오해하는 편이 나았다.

    이제 와 뭐라고 한단 말인가. 사실 마탑에서 만난 직후 줄곧 그녀의 감정이 전달되고 있었다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라고?

    ‘어떤 취급을 할지 뻔하지.’

    리즈벳이 이카르센에서 지낸 지 벌써 2주 가까이 되었다. 그동안 말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저를 보는 리즈벳의 맑은 벽안이 어떤 빛을 띠게 될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아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라히트리안도 억울한 마음이 컸다.

    그가 그녀에게 심장을 삼키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고, 외부에 심장을 따로 보관하기로 했을 때도 이런 결과는 예상 범주 밖이었다.

    하물며 설상가상으로 타인의 감정까지 공유받는 부작용까지 발생했다.

    이 상황의 완벽한 피해자는 어찌 보면 라히트리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런 부작용을 감당해야 하는 쪽은 리즈벳이 아닌가?

    ‘아니, 그것도 별로군.’

    그건 그 나름대로 문제였다. 차라리 자신이 겪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서로의 입장이 바뀌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절망적일 테니까.

    ‘하루라도 빨리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날이 갈수록 리즈벳과 연결된 감정이 짙어지니 라히트리안은 미칠 노릇이었다.

    그녀의 감정선에 동요해 마력이 흔들리는 건 이제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기분이 좋으면 마력이 부드럽게 흐르고, 저조하면 마력도 같이 예민하게 튀어댔다.

    지금도 그랬다. 라히트리안은 얼어붙는 것 같이 쿵- 내려앉는 느낌에 손끝을 움찔거렸다.

    마력이 날카롭게 일렁이자 이안이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기분이 나쁘신 건 알겠지만 갑자기 그러실 건 없잖습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

    “살려 주세요. 이제 안 물어보겠습니다.”

    라히트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이안을 지나쳤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심장을 회수할까.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하지만 결국 라히트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그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석상 앞에서 울먹이던 리즈벳을 볼 때는 왜 저가 다 안타까웠던 건지.

    크게 다치지 않고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후에는 어째서 안도감이 들었던 건지.

    “진심으로 아무! 상관없으니까 라히트리안도 전혀! 마음 쓰지 말아요.”

    튜니아트의 예법이 익숙할 리즈벳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 나오자 왜 속이 뒤틀렸던 건지.

    어느 것 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미치겠군.”

    아마도 심장을 뺏긴 부작용으로 미친 게 분명했다.

    “이안,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네? 아. 네, 갑니다.”

    멀찍이 웅크려 있던 이안이 슬그머니 곁으로 왔다.

    살벌하게 굳은 주인의 얼굴에 그는 눈치를 보며 입을 꽉 다물었다.

    라히트리안은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리즈벳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내가 황녀에게 휘둘리다니.’

    그의 자안이 짙게 일렁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 리즈벳 튜니아트에게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사실을 깨달은 이 순간에도.

    그러나 라히트리안은 끝내 알지 못했다. 훗날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한발 늦었다는 것을.

    * * *

    긴 악몽을 꾸었다.

    첫 번째 장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언젠가 본 적 있는 탑이었다.

    “이제 그만 내놓았으면 좋겠군.”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이곳이 마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라히트리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나는 그를 경계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이미 뒤에는 견고한 벽이 버티고 있었다.

    “갑자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황녀도 알았을 텐데.”

    멍청하기는.

    라히트리안의 손이 거침없이 내 몸을 꿰뚫었다.

    헉, 심장이 조여드는 강렬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손에 넣고 미련 없이 뒤돌아가는 라히트리안의 모습을 보며 끝없이 추락했다.

    다시 장면이 전환됐다.

    이번에는 정말 처음 보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나는 쫓기고 있었다. 모두 검은 그림자처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튜니아트 황실에서 보낸 사람들인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숨이 넘어가도록 달리고 또 달렸으나 도착한 곳은 막다른 벼랑이었다.

    “리즈벳, 이제 도망칠 곳은 없어.”

    모두가 검은 얼굴을 한 가운데, 에테르온만 온전한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승리자의 웃음을 흘리며 내 팔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잡힌 팔부터 내 몸이 깨져가듯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질렀다.

    “살려 주세요, 오라버니. 이러지 마세요!”

    그러나 나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목소리만 허공에 남은 채…….

    “헉!”

    식은땀을 흠뻑 흘린 채 눈이 떠졌다.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에 급히 탁자에 준비되어 있는 물을 찾았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뭐, 뭐야?!”

    바닥이 진동할 정도로 커다란 굉음과 함께 창밖으로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이카르센 본성이 날아가 있었다.

    흡사 재앙이 들이닥친 것 같은 장면에 나는 물을 마시던 것도 잊고 멍하게 굳었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당신이 아침부터 내 방에는 무슨 일이에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창가 앞에 서 있는 라히트리안을.

    그는 누가 봐도 다급히 온 사람처럼 보였다.

    아직 물기가 남은 긴 흑발과 셔츠가 제대로 잠기지 않아 반듯한 쇄골 아래까지 드러나는 옷차림이 그 증거였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잖아요.”

    조금 전 꾸었던 꿈이 떠올라 예민하게 재차 물었다.

    그가 심장을 회수해 갔던 장면이 생각나자마자 통증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숨이 다시 가빠졌다.

    설마 꿈이 현실로 이어지는 불행한 예지몽은 아니겠지.

    나는 의심스럽게 그를 쏘아봤다.

    그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떼며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황녀야말로-.”

    그리고 몇 초 입을 다물더니 내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이라니. 그걸 왜 여기에 와서 묻는단 말인가.

    소란스러운 건 창 밖에 보이는 성이지 내 방이 아니었다.

    “아무 일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러자 라히트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당혹스러움을 내비쳤다.

    아니, 정정하겠다. 그는 내 말을 믿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막 잠에서 깬 내 모습을 훑어보던 그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나는 한참 늦은 아침에 깬 게 민망해 괜히 헛기침하며 팔짱을 꼈다.

    “정말로 아무 일 없었어요. 일은 저쪽에서 난 거겠죠.”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소란스러운 난리는 저쪽에서 났는데 왜 나를 찾아온 거야?

    나는 슬쩍 말을 덧붙였다.

    “……악몽을 꾼 거 말고는요.”

    절대 라히트리안의 기세에 눌려서 덧붙인 건 아니었다.

    잠자코 내 말을 듣던 라히트리안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작게 실소했다.

    그리고 확인하듯 잇새 사이로 한 글자씩 끊어내며 물었다.

    “악몽을, 꿨다고.”

    “……네. 그게 왜요?”

    순간 라히트리안의 안색이 흐릿해졌다. 자포자기한 듯 얼굴을 가린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하다 하다 악몽까지…….”

    “라히트리안, 괜찮아요?”

    “……하.”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내 걱정 어린 물음에 라히트리안의 표정이 더 구겨진 것 같았다.

    왜 저러는 거람.

    “그런데 정말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

    “저 성은 누가 저런 거예요?”

    라히트리안은 할 말이 많아 보였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자안을 무섭게 번뜩이며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저렇게 노려보는 거야.

    “표정 좀 풀어요. 누가 보면 난동 피운 게 난 줄 알겠어요.”

    “황녀.”

    “네.”

    “평소에도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인가?”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걸까.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본래 꿈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어제 석상에 놀랐던 심리 상태가 꿈으로 표출된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지금 내 처지에 악몽을 안 꾸는 게 더 어려운 것 아닌가.

    나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게 왜 궁금해요?”

    “…….”

    “매일 매일 꿔요. 하루도 빠짐없이.”

    어째서인지, 라히트리안은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표정이 굳었다.

    나는 묘한 승리감에 씩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씻어야겠어요. 아니카랑 마주치지 않게 갈 때도 마법으로 돌아가시면 좋겠어요. 괜한 오해를 사긴 싫어서요.”

    “아, 그래. 황녀 말대로 하지.”

    ……음?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불안하게.

    나는 욕실 문을 열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라히트리안이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 황녀가 알아야 할 게 있어.”

    “뭐, 뭔데요?”

    그는 허공을 가르더니 붉은 촛농으로 입구가 봉해져 있었을 새하얀 서신을 꺼냈다.

    느긋하게 팔랑이는 그 서신은 어디에서 온 건지 묻지 않아도 될 만큼 눈에 아주 익은 색이었다.

    “튜니아트에서 서신이 왔어. 내용이 궁금하지 않나?”

    그게 무슨 소리야?!

    웃고 있던 내 얼굴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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