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궁쿠궁-!
내가 기대어 있던 석상이 어느새 자리를 벗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느리게 움직이던 석상은 어느새 정확히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외양은 석상이었기에 정확히 나를 보고 있는 건지 여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노리는 것은 분명히 나였다.
쿠구궁-!
하늘 높이 팔을 든 석상은 정확하게 내가 있는 방향으로 검을 세우고 있었다.
“저, 저, 저게 뭐야!”
왜 갑자기 석상이 공격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주변 석상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생김새는 각양각색으로 다양했다.
지금 나를 공격한 석상이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면, 다른 석상은 책에서나 볼 법한 날카로운 송곳니와 손톱을 가진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콜록, 콜록!”
거대한 석상이 발을 옮길 때마다 흙먼지가 일었다.
나는 기침을 하며 눈을 찡그렸다. 눈에 먼지가 들어간 탓에 반사적으로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쿠궁쿠궁-!
‘도망쳐야 돼!’
나는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내가 열 걸음 달릴 때, 석상은 고작 한 걸음으로 나를 따라잡았다.
이러다 석상에 밟혀 죽는 건 아니겠지.
어이없으면서도 아예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생각을 할 때였다.
“누가…….”
쿵-!!
“아악!”
석상이 한 발자국 디딘 것뿐인데 땅이 깊이 패며 진동했다.
나는 발이 꼬여 앞으로 넘어졌다. 어느새 정수리 위로 흙이 떨어지며 거대한 발이 올라 오고 있었다.
‘진짜 미쳤나 봐.’
나는 현실감 없는 상황에 사고가 정지되었다.
그때, 어느새 익숙해진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만.”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싸 들어 올리는 힘이 느껴졌다.
조금은 익숙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나는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매끄러운 턱 선을 지나 석상을 보고 있는 차갑게 가라앉은 자안이 보였다.
석상은 언제 움직였냐는 듯 그 자리에 굳게 멈춰 있었다.
라히트리안이 다시 명령했다.
“돌아가.”
“아……?”
그러자 석상들이 하나둘씩 원래 있던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안겨 있는 상태로 라히트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군. 황녀가 이곳은 무슨 일로 온 거지? 아니카는 어디에 두고.”
“……그, 그게. 아니카 연구실을 구경하고 있다가…….”
“있다가?”
“잠깐 혼자 나왔는데 길을 잃은 것 같아서…… 그래서 잠깐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석상이 움직였어요.”
나는 서럽게 울먹이며 석상을 가리켰다. 어째 모양새가 그에게 이르는 것 같이 되어 버렸다.
라히트리안이 알 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석상을 만졌군.”
“만지면 움직이는 거예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지.”
라히트리안이 나를 안아 든 상태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걸을 기운은 없었지만 이건 좀…….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민망했다.
상황이 정리됐으니 이제 내려 줘도 되는데.
“불편해도 참아.”
그가 정면을 보며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안긴 자세로 꼼지락거리다가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지나가는 길.”
침묵하던 라히트리안이 대답했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마침 그가 지나가고 있었다니 천만다행이었다. 석상이 있던 곳을 벗어나니 내가 알고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놀란 마음이 꽤 진정되었다. 혼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데 라히트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발을 약하게 버둥거렸다.
“어, 저 이제 괜찮아졌어요. 내려 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대로 있어. 다리가 엉망이야.”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까는 느끼지 못했는데 다리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팔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보자마자 통증이 느껴졌다.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라히트리안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알았나 보군.”
“상황이 좀…… 여의치 않았잖아요. 앞으로 잘 모르는 장소는 혼자 돌아다니지 않을게요.”
나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모르는 장소만? 그럼 앞으로도 아니카를 두고 다니겠다는 말이군?”
“아니요, 꼭 붙어 다닐게요.”
라히트리안이 혀를 차며 나를 근처 벤치에 앉혔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다리와 팔의 상처를 살피는 그를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뭐 해요?”
“상처 보는 중이잖아.”
“그……!”
그러니까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행동을 하냐는 말이었다.
당황스럽게 잡힌 발목을 빼내려 하는데 오히려 앞으로 쭉 잡아 당겨졌다.
“아프게 안 할 테니까 버둥거리지 말고.”
“……네.”
나는 슬그머니 뒤로 빼려던 다리를 내놓았다.
라히트리안이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마법으로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색함에 딴청을 부리며 두리번거렸다.
괜히 귓불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 라히트리안이 치료하던 손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스럽게 배회하던 내 눈동자가 재빠르게 사선으로 올라갔다.
‘왜 갑자기 말도 없이 쳐다보고 난리람.’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나를 보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나는 금방 이유를 떠올렸다. 이건 전부 저 얼굴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매번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더럽게 잘생긴 얼굴 말이다.
뺨과 귀 끝에 화끈거리는 열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손부채질을 하자 라히트리안이 일어나며 말했다.
“이곳은 이카르센이야.”
“네?”
“튜니아트 예법 같은 건 잊어.”
아,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 거구나.
튜니아트에서는 황녀가 누구에게도 살갗을 보여선 안 되고 만지는 걸 허락해서도 안 되니까.
그런데 지금 예법을 어기고 타인에게 신체 부위를 보여 주고 있으니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저는 매우, 괜찮아요.”
“…….”
이거로는 부족한가?
“진심으로 아무! 상관없으니까 라히트리안도 전혀! 마음 쓰지 말아요.”
“그거, 다행이로군.”
어쩐지 말하는 모양새가 불쾌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그때 저 멀리서 이안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나와 라히트리안이 같이 있는 걸 보고 숨을 고르며 다가왔다.
“대체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했더니, 황녀님이랑 같이 계셨군요.”
“…….”
“집무실 결계가 다 깨졌습니다.”
“……이안, 그 일은 나중에 말하지.”
“라히트리안 님도 후회되시죠? 그러게 마력 한도가 제한된 곳에서 이동 마법은 왜 사용하셔서 다 망가뜨리십니까.”
나는 이안의 말을 듣고 라히트리안을 보았다.
“지나가던 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
“분명히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라히트리안, 당신 설마…….”
나는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에 표정을 굳혔다.
그러자 라히트리안이 곤란한 기색으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자안은 당황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얼핏 이안을 죽일 듯이 노려본 것 같기도 했다.
하,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당신 어떻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오해하지 마. 때가 되면 말하려고 그랬어.”
“나한테 추적 마법 걸어 놨어요?!”
서로의 목소리가 겹쳐졌으나 선명하게 귓가에 꽂혔다. 나는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뭘 말하려고 해요?”
“……그러는 황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내 말을 들은 라히트리안의 표정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하면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할 수 있지? 내가 함부로 아무한테나 추적 마법을 거는 줄 아나?”
“그러는 당신은요.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거죠.”
“전혀.”
라히트리안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황녀는 방에서 쉬는 게 좋겠어.”
번쩍. 눈앞이 점멸했다.
* * *
“치사하게 마법을 사용했어!”
분명히 숨기는 게 있었다. 당황하던 표정이 그 증거였다.
1초 정도의 짧은 변화였지만 라히트리안은 곤혹스러운 반응을 했다.
마치 내가 알면 무척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
숨기고 있는 게 대체 뭘까.
내가 라히트리안에게 솔직하지 않듯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본인은 아닌 척, 나만 추궁했던 거다.
역시 마탑에 심장을 보관하고 있는 것부터 알아채기는 했지만…….
“음침한 토끼 같으니.”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 천장을 노려봤다.
그나저나…….
“아니카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설마 나를 계속 찾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내 걱정은 기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니카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같이 따라갔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아니카 잘못도 아니고요.”
“……석상이 움직였다고 들었습니다.”
연구탑 근처에서 있던 일을 전해 들었나 보다.
나는 괜히 아니카가 죄책감을 느낄까 봐 얼른 손을 내저었다.
“전 아무렇지 않아요. 라히트리안이 와서 구해 줬거든요. 상처도 전부 치료해 줬어요.”
“제 불찰입니다. 황녀님이 석상을 마주치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그 말은 원래 내가 봐서는 안 될 걸 마주쳤다는 것 같잖아.
내가 길을 잘못 들어 석상을 건드리는 바람에 함정이 발동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건가?
아니카가 아리송한 내 표정에 마저 설명했다.
“마력이 아닌 기운이 감지되면 석상이 나타나면서 발동됩니다.”
“……아.”
“아무래도 오작동을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석상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카는 내 몸에 티끌만큼이지만 신성력이 있다는 걸 모르니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그런데 설명을 끝까지 듣고 나니 묘하게 찝찝해졌다.
……마력을 제외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니? 그건 신성력도 감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건데.
“……아니카, 석상이 어떻게 마력이 아닌 다른 기운을 구별해내는 거예요?”
“석상에 특정 기운들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나는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석상에는 신성력도 깃들어 있다는 것인데.
신성력이 존재하지 않는 이카르센 마도 제도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그 석상을 누가 만든 건지 알아요?”
아니카는 갑자기 심각해진 내 반응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라히트리안 님이 아주 오래 전에 만드신 거라고 들었습니다. 족히 천 년은 되었을 겁니다.”
“……천 년.”
천 년 전, 튜니아트 황제는 어떻게 신성력을 옮기는 금단술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튜니아트는 마력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이카르센의 마법사들을 탄압해 왔었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금단술을 완성할 수 있었을 리가. 당연히 지식이 해박한 자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카르센에는 그즈음에 만들어진 신성력이 깃든 석상이 있다. 마침 둘 다 공교롭게 겹치는 시기.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아무래도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