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61)
  • * * *

    “내가 이카르센 제도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집무실을 나오기 전 라히트리안이 한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튜니아트에서는 내가 렘무트에게 납치됐다는 사실만 알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를 텐데.

    심지어 렘무트의 정체도 모를 것이다. 나도 모르니까.

    또 황성에서 탈출한 다음에는 인적이 없는 골목길에서 이동 마법으로 마탑에 도착했다.

    그 자리에 있던 렘무트를 제외한다면 내 행방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설마 렘무트가 내 위치를 불었을까?’

    왜? 어째서?

    나는 혼란스럽게 방 안을 서성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렘무트의 목적은 뭐였을까?

    내가 황성을 탈출하고 난 다음에 그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만 알았지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알지 못했다.

    그도 목적을 이룬 건가?

    “그럼 내가 대가로 주기로 한 보석은 어떻게 된 거지.”

    보물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튜니아트 황족 혈통이라는 인증이 필요했다.

    내가 직접 보물 창고를 가야 문도 열어줄 수 있을 텐데. 당시에는 탈출이 너무 급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했었다.

    ‘렘무트는 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았으면서 날 탈출시켰지?’

    만약 나였더라면 대가를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지 재차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렘무트는 보물을 받는 방식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보물에 그토록 환장하던 그가 가장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다니.

    아니 잠깐만.

    보석이라면 나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값지고 귀한.

    나는 심장에 손을 대어 보았다.

    렘무트는 내가 탈출해서 살아남으면 본인의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설마…….

    “하, 라히트리안의 심장이 목적이었어?”

    처음부터 날 살려 줄 생각 따위는 없던 거구나.

    그럼 라히트리안이 나를 이카르센 제도로 데려온 이유도…….

    나는 어이가 없어 허탈하게 웃었다.

    * * *

    리즈벳이 돌아간 후.

    라히트리안이 그녀에게는 보여 주지 않은 서신을 펼쳤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서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서 도착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트레시아 제국에서 온 것이었다.

    “두 제국이 동시에 이카르센을 찾을 줄은 몰랐군.”

    “튜니아트에서 어떻게 황녀의 행방을 알고 연락을 한 걸까요?”

    “뻔하지.”

    마룡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리즈벳을 마탑에 오르게 하고, 라히트리안의 심장을 삼키도록 하게끔 만든 범인.

    “황녀가 돌아오지 않으니 계획을 바꾼 거야.”

    “……아직도 라히트리안 님의 심장을 노리고 있다니 징글징글하군요.”

    “제법 머리를 썼어.”

    평소의 라히트리안이었다면 마룡의 예상대로 리즈벳을 돌려보냈을 것이다.

    성가신 방법이기는 했으나 튜니아트와 엮이는 건 사양이었기에 황녀의 육신이 가루가 되는 순간을 기다렸을 터였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라히트리안은 리즈벳이 제 손에 떨어진 이상 누구에게도 쉽게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특히 마룡이 황성에서 버티고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귀찮은 건 미리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무래도 마룡을 빨리 잡아야겠어, 이안.”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튜니아트도 어지간히 급한가 보군.”

    그는 서신을 성의 없이 내려놓으며 픽 웃었다.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않고 다짜고짜 황녀를 돌려내라니.

    이안이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튜니아트에서 이렇게 황녀를 아낄 줄은 몰랐습니다.”

    “아껴?”

    라히트리안이 재밌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실소를 내뱉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안다면 절대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 일조한 사람이 라히트리안이긴 했지만.

    그리고 그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여신 튜니아와의 악연을 끝낼 생각이었다.

    “이카르센에 황녀가 없다고 해.”

    “네? 얼마 가지 않아 들킬 텐데요. 튜니아트에서 문제 삼으면 어떡합니까?”

    “그럴 일 없어.”

    어차피 리즈벳 튜니아트의 흔적은 대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테니 튜니아트 제국에서 증거를 들이밀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트레시아 2황자의 방문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적당히 준비해. 그리 중요한 손님이 아니니까.”

    “……그래도 아트레시아 제국의 황태자가 될 사람입니다만.”

    “당분간 황녀가 마음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둬. 아니카에게 잘 지켜보라 하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안은 라히트리안의 의중을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라히트리안은 조만간 보게 될 리즈벳의 반응이 기대됐다.

    ‘말할 생각이 없으면 직접 마주치게 하면 그만이지.’

    아트레시아의 서신을 태워 버리자 망연자실하던 황녀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대체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건지.

    황녀는 매번 진실을 감추고 의도적으로 거짓을 섞어 대답한다.

    그때마다 그녀의 벽안은 시선을 회피하며 흔들렸고, 공명하는 감정은 불안으로 물들었다.

    게다가 최근 황녀는 무슨 이유인지 무척 기분이 저조했다.

    덩달아 라히트리안까지 기분이 저조해져 화풀이로 성을 날려 버릴 뻔할 만큼.

    그러니 필요하다면 리즈벳을 불안하게 만드는 건 전부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이 상태로는 내 손으로 그녀를 죽여 버리겠어.”

    “네?!”

    그의 혼잣말을 들은 이안이 대경실색하며 화들짝 뛰었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다. 황녀가 끝을 맞이하는 건 좀 더 나중이어야 했다.

    * * *

    “와아. 여기가 연구실이구나.”

    “들어오십시오.”

    이카르센 성 내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아니카의 연구실을 살폈다.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서 내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평소와 달리 초조해하는 내게 아니카가 먼저 구경시켜 주겠다며 데려온 곳이었다.

    사적인 공간을 보여 주는 게 살짝 의외였으나, 내심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연구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에는 온갖 수식과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다양한 서적이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는 실험용 장비들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얼마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보였다.

    ‘최근까지도 실험을 하고 있던 건가?’

    나는 뒷짐을 지고 시계 방향을 따라 연구실을 구경했다.

    구경하다 발견한 특이한 부분은 유독 흑마법과 관련된 책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니카는 튜니아트가 보유한 신성력을 얻고 싶어 하기도 했었다.

    흑마법과 신성력은 각자 상반된 성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랬기에 함께 언급되고는 했다.

    ‘뭐…… 나랑 별로 상관없는 거겠지.’

    단순히 호기심에 연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관심을 거두고 아니카에게 물었다.

    “연구탑에 다른 마법사는 없어요?”

    “필요한 일이 없으면 다들 자리를 비우는 편입니다. 황녀님도 아시겠지만, 이카르센 성은 딱히 할 만한 게 없으니까요.”

    “그건 정말 맞는 말이에요.”

    처음이나 신기하지 한정된 면적의 작은 성에서 평생 지내야 한다면 지루해서 나가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럼 아니카는 이런 지루한 곳에 어째서 남아 있는 걸까?

    ‘그만큼 지금 하는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이려나.’

    내가 이카르센 제도에 오기 전부터 진행하던 것일 수도 있다.

    힐끗 아니카를 돌아보니 무언가 골똘히 종이에 써 내려가고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상당히 집중했는지 내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평소에도 따로 시간을 내서 연구탑에 들러 실험을 할 정도면 꽤 몰입한 것 같은데.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카. 저 탑 주변 좀 구경하고 올게요.”

    “그럼 저도 같이…….”

    고개를 들어 올린 아니카가 손에 들려 있는 펜과 종이를 내려놓으려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생긋 웃었다.

    “그럴 필요 있어요? 설마 근처에 위험한 거라도 있다든가…….”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럼 제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찾으러 와 주세요. 여기에서 길 잃는 거 말고 더 있겠어요.”

    위험한 게 없다는 사실까지 확인받았으니 적당히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오면 되겠지.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연구탑을 나왔다.

    * * *

    “이안.”

    “네?”

    “원래 감정이라는 게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건가?”

    “……예?”

    라히트리안은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를 직면한 사람처럼 심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들여다보던 서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질문이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이안이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글쎄요. 얼마나 자주 변합니까?”

    그건 가장 중요한 전제였다. 답을 내놓기 전에 무엇이든 전제가 있어야 했다.

    “조금 전까지는 죽을상이더니.”

    라히트리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지금은 좋아 죽는군.”

    “……누가 말입니까?”

    이안이 미심쩍게 물었다.

    라히트리안은 마치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뒷받침될 만한 근거로, 최근 라히트리안은 전에 없이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였다.

    아무 이유도 없이 기분이 저조해지다가도, 갑자기 풀어지는가 하면,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런 행동에 맥락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곧바로 의구심을 지웠다. 인간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아무리 영생을 사는 라히트리안이라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가 한 질문은 무슨 의도인 걸까?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이 널뛰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있어.”

    “……그럼 그 사람에게 이유를 물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유라.”

    라히트리안은 픽 웃었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진작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리즈벳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었다.

    명색이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황녀라면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 여신 튜니아가 하늘에서 보면 탄식할 일이었다.

    그게 제법 신선하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이번에 물어보면 제대로 알려 줄 때까지 붙잡고 있어 볼…….”

    ……까.

    그러나 라히트리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급한 손길로 집무실 문을 열었다.

    이안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또 어디 가십…….”

    흰빛이 터지며 라히트리안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음, 길을 잃은 것 같지.”

    나는 몇 분째 같은 장소를 돌고 있는 중이었다. 연구탑이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외부인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게 의도적으로 길을 꼬아 둔 것 같았다.

    “아니카랑 올 땐 이런 곳 못 봤는데.”

    다시 돌아갈까?

    하지만 연구실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으면 아니카가 찾으러 올 테니 여기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아 보였다.

    미아가 되면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까.

    곤란해진 나는 볼을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석상 말고는 주변이 휑했다.

    “생김새 한번 험악하네.”

    석상은 하나같이 위협적이었다. 만약 저게 살아 있다면 당장 무기를 휘두를 것처럼 역동적인 자세로 세워져 있었다.

    이런 기괴한 걸 성내에 만들어 두다니. 고안해 낸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취향 한번 독특했다.

    나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결정하고 근처에 있는 석상 하나에 등을 기댔다.

    “누구 지나가는 사람 없으려나.”

    몇 번이나 같은 곳을 맴맴 도느라 다리가 아팠다. 종아리를 주무르며 앉아 있는데 돌연 쿠궁-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음?”

    무슨 소리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콰아아앙-!

    강한 먼지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바로 옆으로 거대한 검이 땅을 깊숙하게 파고 들어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귀를 막은 상태로 실눈을 떴다.

    그리고 초토화가 된 땅을 보자마자 빳빳하게 굳었다.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안개가 걷히듯 먼지바람이 사라지고 땅에 박혀 있던 검이 천천히 뽑히며 다시 움직일 준비를 했다.

    “……설마.”

    에이, 설마.

    바닥에 내 몸집보다 수 배는 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멍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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