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울상으로 변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라히트리안 님.”
라히트리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실패인 건가.
이안이랑 함께 굳어 눈치를 보고 있는데 걸음을 멈춘 그가 돌아보았다.
“황녀는 따라와.”
“…….”
“오늘은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없으니까.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말고.”
그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이안의 팔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카르센 성의 집무실.
나는 이안과 함께 벌을 서듯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지은 죄가 있었기에 무릎 위에 손을 다소곳하게 올려 두고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황녀.”
“네…….”
“왜 그렇게 위축됐어. 하루가 멀다 하고 날 따라다닐 때는 언제고.”
“…….”
“친해지고 싶다던 말은 순 거짓말이었나 보지?”
정곡이 찔려 어깨가 움찔거렸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올리자 짙은 자안과 마주쳤다. 나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라히트리안은 더 시간을 끄는 건 영양가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용건이 뭔지 말해. 성가시게 따라다니는 것도 오늘부로 그만두고.”
“……서, 성가시게.”
“그래, 무척.”
그것도 무척이래…….
귓가에 푹푹 박히는 말이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것 같았다.
시선을 힐끔 옆으로 돌리자 안색이 하얗고 퍼렇게 질린 채 안절부절못하는 이안이 보였다.
일단 그부터 살려 주고 봐야겠다. 이러다 정말 유언을 남기게 생겼으니까.
“미안해요. 사실은 제가 아니카한테 부탁해서 당신 일과를 알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그러니까 유언은 안 해도 되는 거죠?”
라히트리안이 어디 더 말해 보라며 턱짓했다. 어쩐지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화 많이 났어요?”
당연히 화났겠지. 뭐 그런 걸 물어.
의기소침하게 있는데 앞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웃은 건가? 내 귀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놀라 고개를 들자 라히트리안은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화를 푸는 건 생각해 보는 걸로 하지.”
“……생각해 보는 건 뭐예요.”
“불만 있나?”
“아니요.”
나는 냉큼 고개를 젓고 입을 다물었다.
라히트리안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뒤편에 있는 책상 쪽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금색 서신이 날아와 그의 손에 가볍게 잡혔다.
아트레시아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서신이었다.
이건 저번에 태워 버린 게 아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라히트리안이 테이블 위로 서신을 툭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이것 때문에 따라다닌 거 아닌가?”
“어, 어떻게 알았어요?”
“황녀는 본인 감정이 얼굴에 다 티 난다는 걸 모르나 보지?”
“…….”
몰랐다. 정말로.
곁을 지키는 사람은 시녀 리사가 유일했기에 주의를 주는 사람이 없어 알 기회도 없었을 테지만.
“마침 나도 황녀에게 물을 게 있으니 원하는 걸 보여 주는 거야. 아트레시아 제국과 주고받은 내용이 뭔지 궁금한 거지?”
나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왜 아직도 남아 있어요?”
“새로운 답신이 온 거야.”
라히트리안은 서신을 다시 가져갔다.
“황녀는 내가 제어구가 필요 없다는 말에 이상할 정도로 당황하더군. 왜 그런 건지 이유는…… 물어도 답하지 않을 것 같고.”
“그럼……? 왜 집무실로 따라오라 한 거예요?”
“그냥, 어설프게 따라다니는 게 웃기기도 하고. 황녀랑 비슷한 작전을 이용해 보려고.”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얼음이 들어간 레몬 티와 딸기 케이크가 퐁 하고 나타났다.
갑자기 웬 티타임이람.
라히트리안의 행동에 놀라 흠칫하자 그가 먹으라며 눈짓했다.
독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의심스럽게 쳐다보기만 할 뿐 일절 손을 대지 않자 라히트리안이 불쾌함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황녀는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제가 어떻게 봤다고 그래요.”
“그럼 먹어.”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독약을 들이키듯 두 손으로 음료를 한입에 들이켰다. 청량하면서 톡 쏘는 맛이 입 안에 가득해졌다.
‘맛있어!’
이게 얼마 만에 먹는 얼음이 들어간 음료지?
눈을 반짝이며 더 들이키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이 신기한 생물을 보듯 날 구경하고 있었다.
“고작 그런 거로 기분이 좋아지는군.”
“…….”
“튜니아트 황실 재정이 부실한가?”
“그건 아닐 거예요.”
너무 정신없이 먹은 것 같아 민망해졌다.
찻잔을 내려놓고 뒤늦게 예의를 차리며 케이크를 한입씩 먹고 있는데 자꾸만 라히트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건 신기하다는 듯 계속 나를 구경하는 라히트리안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할 말 있어요?”
“귀걸이의 역할이 뭔지 아는 자가 많지 않아. 그런데 최근 외부인 중 두 사람이나 나타났지. 한 명은 세이어드 아트레시아.”
나머지 한 명은 나라는 뜻이었다.
하긴, 그가 마력을 주기적으로 분출해 주어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라히트리안은 그 시기가 올 때마다 이카르센의 마법사들이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정보를 이용해 판을 만들고는 했다.
이카르센 제도의 마법사들은 타국과 계약을 맺고 활동했기 때문이다.
각국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일들이 모두 이카르센 제도로 향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필요에 따라 마법사와 협력하기 위해 각국은 그 사실을 서로 눈 감아 줄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고.
단 한 곳, 튜니아트 신성 제국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제어구에 관한 건 누가 알려 줬지?”
“……튜니아트 황실 도서관은 없는 정보가 없거든요. 우연히 봤어요.”
“그럴 리가.”
라히트리안이 실소했다. 그가 상체를 숙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와 관련한 자료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와 봤어요?”
라히트리안은 튜니아트 신성 제국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게다가 신성력과 상충되는 마력을 지닌 그가 국경을 넘을 수 있을 리 없다.
‘아니,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나?’
마족인 렘무트도 버젓이 황성을 휘젓고 돌아다녔으니까.
내가 긴장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은 싱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가 말할 생각이 없으니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누가 알고 있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아니니까.”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라히트리안이 어떤 방법으로 알아보려 마음먹었는지.
몸을 물린 라히트리안이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서는 황녀를 찾는 걸 그만뒀다더군. 군대도 모두 철수했고. 황녀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수색하는 군대를 철수시켰다니.
튜니아트 황실이 절대 그런 선택을 할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튜니아트 제국이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 * *
“이카르센 제도에서 방문을 수락했다고?”
“네, 세이어드 님. 오늘 아침 답이 왔습니다.”
유스티아의 손에는 보랏빛 서신이 들려 있었다.
세이어드는 서신을 펼쳐 보았다. 지나치게 간단한 답변이 중앙에 박혀 있었다.
[아트레시아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으니 거절한다.]
제안은 거절했으면서 방문은 수락한다니.
무슨 생각인지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라는 인물 자체를 만나 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이카르센 제도에 가 봐야겠어.”
“네?! 황자님께서 직접이요?”
“물론 직접 가야지.”
유스티아가 경악하며 만류했으나 세이어드는 강경했다.
직접 가서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의 의중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건국일 전까지 확실히 해 두어야 하니까.”
“하지만 이카르센에 직접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그들이 호의적으로 나올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위험? 내가 그런 걱정을 들을 줄 몰랐는걸. 입에 발린 소리가 늘었어.”
유스티아는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세이어드 아트레시아를 상대로 그런 염려를 하다니.
유스티아는 황급히 눈을 피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게 가장 효율적이야.”
아트레시아의 황후는 여간 능구렁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황자를 황위에 올리려 할 것이었다.
차기 황태자감으로 세이어드가 인정받고 있다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혈통.
아트레시아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후계요소로 꼽는 것이었다.
타국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극명히 차이나는 역량에도 세이어드와 1황자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번에 변방으로 쫓겨나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1황자가 될 거야.”
그걸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문제가 될 만한 싹을 미리 잘라내야 했다.
세이어드는 고작 혈통 따위가 발목을 잡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카르센이 이렇게 나온다면 다른 방법도 염두에 두어야 할 터.
“유스티아.”
“네.”
“튜니아트 황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을 알아봐.”
책상을 두드리고 있던 세이어드는 계산을 끝냈다.
꼭 라리에트의 왕녀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