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로이드 님,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윈저 공작가.
테드의 보고에 로이드 얼굴의 수심이 깊어졌다.
윈저 공작가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투입했으나 어디에서도 리즈벳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은밀히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자를 데려와 수도 구석구석 살피게 했으나 헛수고였다.
대륙 어디를 가도 완벽하게 몸을 숨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로이드는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의 외양은 한눈에 봐도 튜니아트 황족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이론적으로나 가능할 뿐,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지 않은 한.
“마력을 지운 자는 추적할 수 없는 건가?”
“상대의 실력이 뛰어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추적할 수 없도록 흔적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조금 이상한 점이 발견됐습니다.”
테드가 뜸을 들이다가 이어서 보고했다.
“흔적을 지운 건 또 다른 자들이라고 합니다.”
“공범이 있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마력의 흔적을 지울 정도의 실력자들이라면 아무래도 이카르센 쪽에서 개입한 게 아닐지요.”
타인의 마력을 없앤다는 건 고도의 실력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자들이라면 누구나 이카르센 마도 제도를 떠올릴 것이다.
“이카르센이라.”
로이드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리즈벳을 납치했던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력을 신성시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아닌 존재와 손을 잡지는 않는 곳이었다.
그만큼 이카르센의 마법사들은 자부심이 남달랐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황성에서 황녀님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지운 게 아닐까요?”
“무슨 목적으로?”
“……그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요?”
테드가 자신감 없는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이카르센에서 리즈벳의 도주를 도왔다는 전제는 성립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이카르센과 아무런 접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카르센에서 황녀의 행방을 어떻게 알고 흔적을 지운단 말인가.
하지만 아주 만약에.
“……황녀님이 이카르센에 있는 거라면.”
“네?”
테드가 잘못 들었다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이카르센의 개입까지는 유추해도, 황녀가 제국 밖을 벗어났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로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리즈벳이 현재 이카르센에 있다면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지금까지 그녀를 목격한 자가 없는 것도, 그녀의 흔적이 깨끗하게 지워진 것도.
하지만 이카르센에서 무슨 이유로?
“황후마마를 뵈러 가야겠다.”
이제는 물을 때가 된 듯싶었다.
어째서 그날 눈물을 보이며 리즈벳의 눈과 귀를 가려 달라는 부탁을 한 건지.
어쩌면 리즈벳은 납치된 게 아닐지도 몰랐다.
* * *
“앞으로 어떻게 하지.”
라히트리안이 세이어드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나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내가 변수가 되어 버리다니. 애초에 살아남으려고 한 것 자체가 문제였던 건가?
‘설마 내가 시에타 역할을 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원작이 어긋나는 걸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라리에트를 포기한 세이어드의 관심이 향할 곳이 어디일지는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으니까.
내가 성년을 넘기고도 살아남는다면, 세이어드의 혈통을 해결하기 위한 최고의 대안이 바로 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재 나는 작중 최종 흑막인 라히트리안의 심장을 훔친 상황이었고, 폭주에 미쳐 가는 황태자 에테르온은 혈안이 되어 나를 찾고 있다.
“……어, 이거 좀 위험한 상황인 것 같은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혹시 이러다가 시에타 대타로 구르는 거 아니야?
나는 시에타처럼 여신에게 원래 세상으로 보내 달라고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녀와 달리 난 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이니까.
우려하는 일이 부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농후한 가능성에 착잡해졌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역시 누구보다 먼저 미래를 대비하는 게 중요하겠지.
‘라히트리안이 언제까지 심장을 묵인해 줄지가 가장 문제야.’
언제 심장을 도로 가져가도 이상할 게 없으니 그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러니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마력으로 내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그와 비슷한 다른 것으로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거니까.
“아니카.”
“네.”
그녀가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적고 있던 수식이 보였다. 무척 복잡해 보이는 수식이었지만 오늘따라 그게 예뻐 보였다.
나는 활짝 웃었다.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 * *
이렇게 된 이상 뻔뻔해지기로 했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으니 매일같이 눈도장이라도 찍기로 한 것이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가 활짝 웃었다.
“라히트리안! 좋은 아침이죠?”
활기찬 인사와 다르게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또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이 노골적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라히트리안이 성가셔하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이곳으로 향할 건 어떻게 알고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는 내가 숨어 있던 기둥을 보며 물었다.
“우연의 일치죠. 라히트리안이 어디에서 나타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겠어요?”
“튜니아가 탄식하겠어.”
모른 척 시치미를 떼자 라히트리안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라히트리안의 옆에 따라붙으며 걷자 이안이 보폭을 조금씩 좁히며 거리를 넓혔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황녀가 알 필요는 없지.”
“……저는 여기에서 잠깐 구경 중이었어요. 이카르센 제도는 승전 기념으로 가져온 옥새나 가문 인장을 땅에 박아 넣는다면서요?”
……그리고 그걸 보란 듯이 밟고 다니는 것이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인지 몰라도 취향 한번 지독했다.
참고로 이카르센 성내 바닥에는 독특하고 화려한 문양이 가득했는데, 돌아다니다 보면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왕조의 흔적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라히트리안의 과거는 자세하게 언급된 적이 없지만, 이카르센 제도의 역사 역시 튜니아트 제국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긴 편이니 그리 놀라운 건 아닐지도.
‘그런데 라히트리안은 왜 그 광활한 땅을 포기한 거지?’
수많은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 치고 이카르센 제도가 차지하고 있는 땅의 면적은 매우 좁았다.
‘황폐화 된 땅은 관심이 없는 건가?’
마력이 흐르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 영토를 넓히는 일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한참을 옆에서 따라 걷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이 뒷덜미를 덥석 잡아왔다.
“응……?”
“그러다 호수에 빠지겠어.”
“어라? 여기는 제가 머무는 성이잖아요!”
“이제 눈치챘나 보군.”
라히트리안이 혀를 찼다. 하마터면 호수에 빠질 뻔한 나는 뒷걸음질 치며 입을 비죽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허탕 친 것 같아.
나는 허망하게 익숙한 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푹 쉬도록 해, 황녀.”
“쉬십시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안이 키득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라히트리안의 동선을 알아내 하루가 멀다 하고 쫓아다녔다.
물론 정보의 출처는 아니카였다. 아니카가 누구에게 라히트리안의 일정을 얻어 왔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됐다.
“오늘도 또 뵙는군요.”
“안녕하세요, 이안.”
보나 마나 이안이 제공해 준 거겠지.
그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라히트리안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기가 막힌 우연이로군.”
첫 번째 날은 별자리를 볼 수 있는 첨탑 앞 기둥 뒤에서, 두 번째 날은 라히트리안이 잠시 들렸던 도서관 앞에서, 오늘은 가장 고대하던 집무실에서 마주치는 날이었다.
덕분에 이카르센 성 내 지리는 다양하게 꿸 수 있게 되었다.
지도가 없어도 머릿속에서 대충 약도가 그려질 수준이니, 내가 3일 동안 얼마나 성을 누비고 다녔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라히트리안의 행적이 일정치 않고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실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내가 라히트리안을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오늘은 반드시 뭐라도 건져낸다.’
집무실은 이카르센 제도의 모든 사안을 결정하는 중요한 장소인 만큼 사소한 행적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라히트리안이 팔짱을 끼고 비딱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무슨 꿍꿍이인지 말해.”
“제가 무슨 꿍꿍이가 있겠어요?”
“황녀 같으면 그 말을 믿겠나.”
당연히 안 믿지. 믿으면 바보였다.
“사실 라히트리안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거예요.”
“…….”
“이카르센 제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잖아요. 저도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하는지 정도는 알아요.”
라히트리안에게 잘 보여야 원하는 정보도 수월하게 얻어 낼 수도 있고.
우리의 대화를 듣던 이안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는 우리 관계성을 꽤 재밌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라히트리안 님, 이 정도면 노력을 높이 사 받아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노력? 아니지.”
라히트리안의 입매가 진하게 올라갔다.
“내 일정을 황녀에게 알린 자를 색출해, 이안.”
한껏 올라가 있던 이안의 입꼬리가 흠칫하며 내려왔다.
“반드시 찾아내서.”
시린 자안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살려 두지 말고 처리해.”
숨을 참고 마지막 말까지 모두 들은 이안이 쿨럭이며 식은땀을 흘렸다.
라히트리안이 그를 지나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하루 시간 주지.”
“너무 짧은 거 아닙니까?”
“유언을 남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