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61)
  • 혹시 내가 라히트리안의 심장을 갖고 있어서 더는 마력 제어구가 필요 없어진 건가?

    ‘맙소사, 정말 그런 거면 어떡하지?’

    그의 마력이 응집된 심장이 열심히 내 몸 안에서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제어구가 필요 없어진 거라면 말이 됐다.

    하지만 라히트리안은 혼자서 나라 하나를 날려 버릴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을 텐데.

    내 몸을 복구하는 게 그 정도로 많은 마력을 필요로 한다고?

    나는 충격에 휩싸여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황녀?”

    내가 말이 없자 라히트리안이 재차 나를 불렀다.

    “……라히트리안 혹시 그 귀걸이 말이죠.”

    나는 아니길 바라며 물었다.

    “혹시 필요 없어진 이유가…… 저 때문인가요?”

    “그게 제어구인 걸 알고 있었나 보군.”

    아차, 실수했다.

    나는 입을 급히 막았다. 그만큼 내가 받은 충격이 크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나는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제어구가 더는 필요 없어진 거면 앞으로 원작은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라리에트 침공 협력은? 세이어드 아트레시아의 향후 움직임은? 여주인공 시에타는?

    “아니카가 알아차린 것도 무리는 아니지. 확실히, 외부에 더 알려지면 곤란해지기는 하겠어.”

    라히트리안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 붉은색 귀걸이가 나타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가 착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들키면 서로 곤란하니 이걸 하고 있어. 용도는 설명 안 해도 이미 아는 것 같으니 생략하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라히트리안이 내 양쪽 귀에 제어구를 하나씩 채웠다.

    그러자 바깥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던 마력이 안으로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본래 느끼지 못한 넘실거리는 마력이 체내로 서서히 잡혀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니카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을 거야.”

    나는 무거워진 귓불에 착잡해졌다.

    라히트리안이 사용하는 제어구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마력을 잡아 둘 수 있는 수준이라면 아주 강하고 순도 높은 마력석일 텐데.

    그만큼 중요한 물건을 내게 넘겼다는 건 정말 라히트리안의 상태가 멀쩡해졌다는 걸 의미했다.

    ‘이걸 내가 하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럼 라히트리안이 여주 시에타랑 만날 일도 없고, 튜니아트 제국도 멀쩡할 거라는 이야기잖아?’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기다리고 있으면 튜니아트 제국이 알아서 무너질 줄 알았더니 복병이 생기고 말았다.

    그때, 뒤에 서 있는 줄도 몰랐던 이안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치 업무 도중에 급하게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한 손에 펜을 쥔 이안의 반대편 손에는 살짝 구겨진 금색 서신이 들려 있었다.

    반은 타오르는 태양을, 반은 달을 상징하는 원형을 중심으로 양쪽에서 검이 교차하는 금색 문양이 표면에 새겨져 있었다.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보낸 거야.’

    라리에트 전쟁과 관련된 제안이 저 안에 담겨 있을 것이다.

    이안은 내가 강렬하게 서신을 노려보자 당황하며 손을 뒤로 숨겼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이카르센이 아트레시아 제국이랑 교류하고 있는 줄은 몰라서요.”

    나는 라히트리안을 힐끔거렸다. 그는 서신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정말 거절할 생각인 거야.’

    망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데 순간 라히트리안이 내 양 뺨을 잡아 올렸다.

    “그만.”

    “네?”

    “얌전히 있어.”

    “……에?”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으니, 정말 죽겠군.”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밑도 끝도 없이 얌전히 있으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번에는 뭐 때문에 그러는 거지? 황녀가 차분하고 얌전하다는 평판은 대외용이었나?”

    “저 지금 얌전히 있었어요.”

    산책로 외엔 특별히 돌아다니지도 않았는데. 누가 보면 정신없이 여기저기 쏘다닌 줄 알겠다.

    불만스럽게 항의했으나 볼이 눌려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빼려고 시도하자 라히트리안은 꽉 잡은 볼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안, 그거 이리 내.”

    “네?”

    “서신.”

    라히트리안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신이 손에 닿기도 전에 푸른 불길이 일더니 형체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주 완벽하게.

    나는 허망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됐나?”

    “하, 하하…….”

    눈앞에서, 원작이 완전히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 * *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여신의 궁.

    에테르온은 초조하게 방 안을 거닐었다.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갔으나 리즈벳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안 돼, 안 돼……. 리즈벳을 얼른 찾아야 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방에 처박혀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그를 보며 호위기사인 벨리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밤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에테르온의 눈 밑은 새카맸고 안광은 흉흉했다. 미치기 직전의 인간이 저런 것일까.

    “황태자 전하, 주무셔야 합니다.”

    “벨리언! 리즈벳을, 리즈벳을 찾고 있는 거겠지?”

    “카드리아 공작가에서도 최선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아닐 거야. 그렇지? 다들 날 속이는 게 아니겠지?”

    벌써 몇 번째 같은 물음이었다.

    에테르온의 상태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황제 카로스에게 버림받을까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거짓이 아니니 주무십시오.”

    “그래, 아직 시일이 남았으니 내치지는 않으실 거야.”

    벨리언은 입을 다물었다.

    불안정한 황태자는 마치 여섯 살 아이처럼 황제의 인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앞으로 저런 자를 황제로 모셔야 한단 말인가? 그는 제 처지가 안타까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벨리언은 창가를 노려보았다.

    “누구냐.”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겨누고 다가가자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달칵, 창문이 열리고 적발의 남자가 가뿐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상대의 외양을 확인한 벨리언의 노을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는 이미 제국 곳곳에서 수배하고 있는 존재였다. 반드시 살아 있는 상태로 포획해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놀란 건 벨리언뿐만이 아니었다.

    침입자를 알아본 에테르온은 숨이 넘어갈 듯한 반응을 보이며 외쳤다.

    “당장, 당장 저자를 잡아! 뭐 하고 있는 거냐, 벨리언!”

    “……진정하십시오, 황태자 전하.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당장 생포하라는 명령 안 들려?!”

    벨리언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게 쉬웠다면 황실에서도 황녀를 그리 쉽게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에서 가장 실력자로 꼽히는 로이드도 놓친 상대를 생포하라니.

    ‘이성을 아예 잃었군.’

    벨리언은 혀를 차며 상대의 기척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그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진정, 진정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냐.”

    “우선 같은 편이니까 진정하라고.”

    그 말을 믿는 등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벨리언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튜니아트의 황녀를 빼돌리고 황성을 탈출한 자가 바로 그였다.

    “……같은 편?”

    그러나 그 등신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가 같은 편이라고?”

    신경이 쇠약해진 에테르온은 그 말 한마디에 쉽게 흔들렸다.

    상대의 말을 믿을 수 있는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곧장 벨리언에게 명했다.

    “당장…… 당장 그 검을 내려, 벨리언!”

    “신뢰할 수 없는 자입니다.”

    “싸울 의사가 없다지 않아?! 듣지 못한 건가?”

    들었다. 그러니 더더욱 검을 내릴 수 없는 게 아닌가.

    벨리언은 이제 에테르온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를 모시는 호위기사로서 황태자의 명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벨리언은 마지못해 검을 내려놓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적발의 남자가 입매를 끌어 올렸다.

    벨리언의 눈에는 그 입꼬리의 비웃음이 명백하게 보였다.

    “황태자께서는 상황 판단이 뛰어나군.”

    상대는 보란 듯이 벨리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섬뜩한 기운이 벨리언의 목을 잠시 감싸다가 사라졌다.

    소름 돋는 감각에 그는 흠칫하며 급히 검집에 손을 올렸다.

    “황녀를 납치해 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돕겠다는 거냐.”

    “아.”

    적발의 남성이 샐쭉 웃었다.

    “내가 황녀에게 받아야 할 게 있는데, 지금 접촉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받아야 할 것?”

    “그래서 누가 내 말을 들어 줄까 고민하다가 아주 적절한 상대가 떠올랐거든.”

    적안이 에테르온에게 향했다.

    그러자 에테르온이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반색하며 매달리듯 물었다.

    “리즈벳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물론. 그런데 내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어서 튜니아트의 힘이 필요한데.”

    한마디로 제국이 직접 나서 달라는 의미였다. 벨리언은 기가 찼다.

    상대의 정체도, 의도도 의심스러운 상황에 무턱대고 제국이 직접 움직여 달라니.

    적발의 남성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황태자 전하의 자유지.”

    에테르온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물론 나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 리즈벳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숨이 넘어갈 듯이 상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초가 수년이라도 되듯 그 잠깐 사이에 안색이 희게 질려 갔다.

    그에 만족스러운 듯 상대의 입술이 열렸다.

    “이카르센.”

    “이카르센…….”

    에테르온의 벽안이 번뜩였다. 그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이카르센 마도 제도. 그곳에 리즈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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