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61)

* * *

아니카가 산책로를 안내해 준 이후, 나는 꾸준히 그곳에 드나드는 중이었다.

마력을 먹고 피어난 꽃과 하늘하늘하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아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카르센 제도에서는 생화가 오래 살아남지 못해 특별히 가꾸는 곳이라고 했다.

다른 땅보다 훨씬 강력한 마력이 흐르고 있어서 연약한 생명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는 게 이유였다.

내가 이곳을 찾을 때마다 아니카는 은근한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붉어지는 귓불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마음에 드십니까?”

“네. 엄청 예쁘잖아요. 손이 많이 갈텐데 여기는 누가 관리하고 있는 거예요?”

이카르센 성에는 다른 곳처럼 시종이나 관리인이 없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자는 출입할 수 없었고, 모든 일은 마법으로 대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마법사들이 돌아가며 관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제가 하고 있고요.”

“그렇구나.”

나는 한가롭게 돗자리 위에 앉아 비스킷을 와그작 씹어 먹었다.

옆에서 같이 초콜릿이 박힌 쿠키를 골라 먹던 아니카가 물어왔다.

“산책이 끝나면 오늘은 뭘 하실 예정입니까.”

“음……. 사실 라히트리안을 다시 찾아갈까 싶었는데요.”

하지만 며칠 전 그렇게 쫓겨났으니 당분간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 라히트리안이 심장을 가져가려 할지 모르니 그 전에 심장 없이도 살 수 있는 방법도 강구해야 하고.

‘뭐야, 나 엄청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잖아?!’

나는 짐짓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아니카.”

“네.”

“아니카는 아주 아주 뛰어난 마법사인 거죠?”

“……아주 아주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 못 봐줄 정도는 아닐 겁니다.”

좋아, 그 정도면 됐어.

나는 작게 목소리를 낮췄다. 절로 낮아진 목소리에 아니카가 가까이 다가왔다.

“있잖아요. 혹시 다 사그라져 가는 인간의 생명력을 다시 평범한 상태로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생명력…….”

아니카의 미간이 좁혀졌다.

너무 광범위했나.

하긴 내가 봐도 그랬다. 생명력이라는 단어부터 난이도가 최상급이었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잃은 생명력은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그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한마디로 금기라는 뜻이었다.

‘그럼 영생을 얻은 라히트리안은 그걸 어겼다는 거겠구나.’

인간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고갈되어야 할 생명력을 잃지 않고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어쩌다 영생의 존재가 된 걸까.

원작에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기에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라고 처음부터 영생을 살았던 것은 아닐 텐데.

역시 결국에는 라히트리안이 답인가보다.

나는 손에 들린 비스킷을 마저 입 안에 욱여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그때, 갑자기 쿵- 하고 심장이 강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마탑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으나 그때보다 조금 더 강했다. 나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놀란 아니카가 급히 내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몸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당장 치료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제 손 잡으시고…….”

“하아. 하아……. 괜찮아요. 다시 괜찮아졌어요.”

나는 금방 진정된 심장에 안도하며 상체를 세웠다.

괜찮다는 의미로 아니카가 내민 손을 꼭 잡고 생긋 웃어 주는데 그녀가 묘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봐요?”

뜸을 들이던 아니카가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라히트리안 님 마력의 상당 부분이 황녀님에게서 느껴지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라,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

“정, 정말로 몰라요.”

아니카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까의 이상 반응으로 내 몸속에 있는 마력이 라히트리안의 것이라 확신한 듯했다.

큰일 났다.

나는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라히트리안이 나타나 주길 기도했다.

당신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러다가 당신 심장이 나한테 있다는 걸 만천하에 들키게 생겼다고!

* * *

라히트리안의 집무실.

“아트레시아 제국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서신?”

라히트리안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황제가 아닌 2황자에게서 도착한 서신입니다.”

이안은 아트레시아 제국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내용을 확인하던 라히트리안이 실소했다.

라리에트 왕국을 점령하는 데 힘을 보태 달라는, 아마 이전이었더라면 꽤 구미가 당겼을 제안이었다.

분명 마력 제어구를 착용하고 있을 때였더라면 라히트리안은 고민 없이 수락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가 마침 마력을 분출하여 해소할 시기라는 걸 아트레시아의 2황자가 어떻게 알고 연락을 넣은 건지.

라히트리안은 불쾌함을 드러내며 서신을 성의 없이 접었다.

사연이 어떻게 되었든 라히트리안은 이용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거절해.”

“알겠습니다.”

“황녀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아니카의 전언에 따르면 최근 산책로를 자주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곳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라히트리안은 호숫가를 내려다보다가 쿵 내려앉는 느낌에 산책로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그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강력한 마력이 일렁이며 그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지금 날 소환하고 있는 건가?’

그 느낌은 마치 소환식과 비슷했다. 라히트리안은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버티면서도 황당함에 실소를 내뱉었다.

이제 하다하다 리즈벳 튜니아트는 그를 부르는 것까지 가능해지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그가 이렇게 반응한다는 걸 몰랐고, 계속 모른 채로 놔둬야 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그를 불러대면 감당이 되지 않을 테니까.

라히트리안은 심사가 뒤틀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상태로 현재 그를 흔들고 있다는 게 무척 거슬렸다.

“산책로에 있다고?”

“누구……, 아. 황녀라면 아직 거기 있을 겁니다.”

라히트리안이 미간을 더욱 좁혔다. 산책로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길래.

“어디 가십니까?”

이안이 뒤를 따라붙었다. 라히트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이 거슬리는 감각부터 해결해야 했으니.

“산책로.”

라히트리안은 아주 오랜만에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 * *

해명을 요구하는 아니카의 집요한 시선을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열심히 핑곗거리를 찾아봤지만 그럴듯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이유를 대든 아니카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파악할 테니까.

“……아니카가 착각한 거겠죠?”

“제가 라히트리안 님의 마력을 착각할 리 없습니다.”

“그럼 비슷하다거나…….”

“마력의 고유한 성질은 각자 다릅니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내게서 라히트리안의 마력이 느껴지는 건 아마 내 몸을 복구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한계까지 망가진 몸을 복구하기 위해서 그의 심장을 삼켰으니까.

보통 마법사들의 마력은 심장을 중심으로 쌓이니 라히트리안의 마력이 내게서 느껴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사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의 심장을 갖고 있다는 걸 들키는 것도 문제였지만, 누군가는 나를 라히트리안이라고 착각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거였으니까.

“……황녀님의 몸은 마치 텅 빈 것 같군요. 라히트리안 님의 마력 외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하.”

너무 족집게 아니냐고. 이제 어떻게 하지?

열심히 딴청을 부리고 있는데 마침 반대편에서 라히트리안이 나타났다. 나는 반가움에 단숨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라히트리안! 세상에, 이런 우연이!”

그는 내 어색한 인사에 어떤 반응도 해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온몸이 따가울 정도로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소매를 잡고 작게 목소리를 낮췄다.

“조금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나는 아니카를 피해 그를 급히 한쪽으로 끌고 가 작게 속닥였다.

“아니카가 제 몸에서 당신의 마력이 느껴진대요. 당신 심장을 삼켜서 그런 것 같아요. 이거 알려지면 곤란한 거 아니에요?”

“…….”

“아니카 말고도 다른 사람이 눈치채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왜 그렇게 쳐다봐요?”

열심히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어떤 반응은커녕 나를 묘하게 보는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그의 귓가에 있어야 할 마력 제어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속으로 무척 놀랐지만 모른 척 물었다.

“어? 귀걸이 안 했네요?”

“필요 없어져서.”

필요 없어졌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어……, 그게 왜 필요가 없어졌을까요?”

그러면 안 되는데. 분명히 지금 내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을 거야.

나는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회피했다.

“잘 어울렸는데.”

“잘 어울려?”

“미, 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고 해야 할까요?”

라히트리안이 어디까지 하나 보겠다는 태도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건 어느 정도 진심을 담은 말이었는데.

참고로 경국지색이라 칭송받는 아틀레아와 그녀를 닮은 에테르온을 보고 자란 내 미적 기준은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당연히 하고 있어야 할 마력 제어구가 감쪽같이 사라져서 놀란 게 더 크긴 했지만.

이때,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나를 보던 라히트리안이 내게 잡힌 팔을 탐탁지 않게 빼냈다.

그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비딱하게 내려다봤다.

“말 돌리는 데는 선수군.”

“티 났어요?”

“그럼 그런 것도 모를까?”

“음. 그럼 적당히 넘어가 주시지…….”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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